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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꿈꾸다 | 또 다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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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인 드메이씨가 UN기념공원에서 근무하는 이유는
캐나다에서 공직생활을 하던 드메이 씨는 2007년 4월 경 UN 은퇴군인 재방문 프로그램 참가 차 한국에 오게 됐고, 아버지의 묘소에 처음으로 헌화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1월 다시 한국에 와서 영어 강사를 하다가 지인의 소개로 UN기념공원에서 사무업무를 맡게 됐고, 현재는 국제협력실의 수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UN군 전사자들의 넋이 ‘천년의 잠’을 청하는 이곳 UN기념공원은 어찌 보면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지만, 공원 관리처에는 수많은 일들이 밀려든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가족 및 동료들의 추모방문을 돕는 일은 물론이고 UN참전 11개국 합동으로 이루어지는 행사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는 주로 퇴역군인들과 그들 가족의 방문 행사 등을 주관하고 UN기념공원 관리처와 협력하는 국가들의 대사관과 협업하는 일을 맡고 있다. 무슬림국가인 터키인 추모객에게 찬송가를 틀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이 각국 방문자를 위한 세심한 문화적 배려도 잊지 않는다.
“UN기념공원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기쁜 일은 제 아버지의 산소를 매일 돌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전쟁때 전사한 아버지 존재, 53년 만에 알아
그런데 드메이 씨는 왜 캐나다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하고 한국에 정착하게 됐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먼저 아버지 앙드레 레짐발드 씨와 모친에 관한 안타까운 사연을 풀어야 한다.
2006년 드메이 씨는 한 입양기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친모가 그를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알츠하이머로 투병 중이던 친어머니를 만나러갔을 때 그는 처음으로 ‘앙드레 아델라드 레짐발드’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듣게 됐고, 아버지가 한국에 잠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버지 레짐발드 씨는 한국전쟁에 참여하기 전 어머니와 약혼한 뒤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모른 채 한국에 왔다. 하지만 그는 1953년 9월 전사하고 말았고, 드메이 씨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17세에 얻은 아들 한 명에 이어 또 다른 아이가 아빠 없이 태어나자 레짐발드 가족과 약혼녀는 그들을 각각 다른 집에 입양시키고 말았다. 친부모는 물론이고 형의 존재조차 몰랐던 드메이 씨는 올해 해외 언론보도를 통해 그의 기사를 읽고 찾아온 이복형 앙드레 브리즈브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의 묘소를 찾고 싶어서 처음 한국에 왔는데, 그때 느낀 한국에 대한 인상이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전쟁의 피폐함을 이겨내고 경제적으로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룬 한국인들이 도대체 누구이고, 어떤 정신을 가졌는지 궁금해졌거든요.”
드메이 씨는 생모와 만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책 ‘워 리플(War Ripple·전쟁의 파장)’을 11월 에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는 놀라운 것들에 익숙해졌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아버지를 매일 매일 만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폭탄주’ 같이 마시면서 한국사람들과 친해져
캐나다에서는 대부분 한국을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전자제품, 자동차 등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나라정도로만 알고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남한은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삼성, 현대, LG, 기아 등 대기업 제품의 이미지로 주로 각인됩니다. 또한 캐나다에서 남한이 북한에 비해 상대적으로 크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북한이 가진 정치적 특수성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이 분단국가인 것을 알고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는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웠던 것 같지만 일상적인 대화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분단국가라는 이미지 보다는 생활용품, 가전제품 브랜드로 더 많이 기억되고 있는 것 같다”고 답했다. 또 한 가지, 드메이 씨는 TV를 통해 1980년대 민주화항쟁의 모습을 본 적이 있고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많은 한국인들이 노력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캐나다가 아닌 한국에서 본 한국인들의 모습은 어땠을까? 그는 재래시장 사람들의 따뜻한 ‘인정’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온지 2주쯤 지났을까,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부산 재래시장을 이용했는데 시장상인들이 모두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식료품 등을 구입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어요.”

딱 한번 바가지를 쓸 뻔한 적도 있었는데 인근에서 장사를 하는 한 아주머니가 나서서 적극 보호해 주신 것에 큰 고마움을 느꼈다고 했다.
“대부분 재래시장 상인들끼리는 모두 알고 지내잖아요. 그런데도 이웃이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려는 것을 딱 제지하고 도와주는 것에 감동을 받았어요.”

또한 UN기념공원에 근무하기 전 잠시 영어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같이 어울리기도 하고 ‘폭탄주’도 같이 마시면서 한국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직위가 높다는 이유로, 혹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권위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유교적 한국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산가족상봉은 인간 존엄의 문제, 통일로 풀어야 할 숙제
통일에 대해서는 역시 ‘e-행복한통일’ 웹진 10호에서 인터뷰한 세바스티앙 팔레티 기자와 같은 시각이었다. “한국인들이 통일에 대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빨리 통일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는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 했다.

“학생들과 이야기해 봐도 통일비용 문제 때문인지,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많이 보진 못했어요. 북한의 태도와 남한의 상황 등을 총체적으로 봤을 때 통일 가능성을 높게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산가족상봉에 대해서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드메이 씨는 지난 11월에 60년 만에 이복형제를 만났기 때문에 이산가족의 비극과 가족 상봉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문제를 가족사와 연관시키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정말 인간존엄성이 없는 판단이며, 전쟁으로 고통 받아온 사람들에게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족 상봉은 그의 인생에서도 가장 큰 일이었기 때문에 드메이 씨는 “통일이 언제 될지는 몰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반드시 통일은 이루어져야 하고 통일이 되면 가족상봉의 장면들을 꼭 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참전군인 가족 모두의 삶에 영향 준 6.25전쟁, 잊혀지는 게 안타까워
드메이 씨는 UN기념공원에서 6.25전쟁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외국인들에게 적극 알리는 일을 맡고 있다. 특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UN군 참전용사들이 공원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이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일이 무엇보다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전쟁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관심 없어 하는 것에 대해서는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어디로 갈 지를 아는 법”이라며 서방에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나라로 단 걸음에 달려왔던 각국 파병부대의 군인들, 죽음을 맞이하기엔 너무 젊은 희생당한 참전용사들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한국전쟁은 한국인들 뿐 아니라 그와 연관된 세계 참전국, 참전군인의 가족, 형제, 자매, 자녀들의 인생 전반에 관해 영향을 미친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끝으로 드메이 씨는 현재의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허락된 시간까지는 UN기념공원에서 최선을 다해 계속 헌신하고 싶다는 각오를 전했다.

<글. 사진 권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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