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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만나다 | T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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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고, 시리고, 서러운 겨울바다의 응원가 강원도 삼척여행

자연이 잉태하고 시간이 길러낸 ‘동굴도시’
싸리 눈이 비가 되고 비가 다시 싸리 눈이 되어 옷깃을 적신다. 그렇게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넉넉하게 겨울비와 눈을 쏟아냈던 구름이 홀쭉해진 사이 물방울들은 다시 여행을 준비한다. 일부는 흘러, 흘러 바다로 떠나거나 다시 구름이 된다. 그리고 조금 더 부지런한 녀석들은 백두대간 뱃속 깊숙이 품고 있는 또 다른 세상 안쪽까지 적신다. 삼척 땅에 들어서면 유난히 동굴에 관한 표지판을 자주 볼 수 있다. 국가지정 문화재, 지방기념물 등 공공기관에서 관리하는 동굴부터 소규모 동굴까지. 동해안의 그리 크지 않은 이 도시가 품고 있는 동굴의 수가 무려 여든 두 곳이다. 도시 인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골짜기 마다 동굴을 키워낸 셈이다.
그중에서도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이루는 덕항산 자락 밑에 자리한 대금굴과 환선굴은 일부러 길을 찾아올 만큼 진귀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매표소를 지나며 신발끈을 고쳐 묶고 걸어본다. 숨 한 모금을 크게 들어 마시자 몸 안 가득 시원한 바람이 분다. 공기에도 색깔이 있다면 아마 이곳의 공기는 청명한 푸른빛일 것이다.
걷다 보면 소나무 판자를 이용해 지붕을 이은 너와집과 참나무 껍질로 지붕을 올린 굴피집, 눈꽃이 쌓인 가지 끝으로 아직 수확되지 못한 홍시까지. 정겨운 풍경들을 만나게 된다. 갈매산의 장쾌한 경치를 즐기고 싶다면 동굴입구까지 걸어 올라가도 좋겠지만 산행에 자신 없다면 케이블카만이 살 길이다. 7분간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케이블카 아래로 고운 눈가루가 바람에 날리는 풍광 역시 아름답다.
‘환선굴’에서 만나는 5억 3천 년 전 시간여행
겨우 닿은 환선굴의 입구를 통과해 호젓하게 동굴 안 탐방에 나선다. 국내 석회암 동굴 중 가장 규모가 큰 동굴답게 다리를 건너고, 샘과 폭포를 지나 5억 3천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자연이 잉태한 장엄한 볼거리에 압도된 채 걷다보면 어느새 이마에 땀이 밸 정도. 환선굴의 볼거리가 웅장하다면 일명 ‘물골’로 불리는 대금굴은 섬세하다.

규모는 작지만 동굴내부로 흐르는 수량이 풍부해 높이 8m의 폭포를 비롯해 석순, 석주 등 동굴 생성물은 환선굴보다 신비롭다. 무엇보다 모노레일을 타고 동굴 140m 지점까지 들어갈 수 있어 색다른 즐거움도 만끽할 수 있다. 운이 좋다면 졸고 있는 박쥐 등 동굴서식생물을 만날 수도 있으니, 놀라지 말자.

굽이굽이, 바다를 달린다 ‘새천년도로’
예까지 와서 바다구경을 빼놓는다면 삼척 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없을 터. 동굴탐험 중 놀라고 감탄하고, 즐거워하는 동안 달아오른 두 뺨을 식힌다는 핑계로 엉덩이 들썩이며 짠 내 가득한 바다를 향해 달린다. 겨울바다. 혀끝이 매끄럽게 입천장을 스치며 내뱉어지는 단어만으로도 설레는데 그사이 말갛게 갠 하늘과 경계가 모호해진 옥빛 바다 옆에 꼭 붙어 달리자니 아이마냥 신이 난다. 삼척항에서 삼척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4km의 새천년도로는 밀레니엄을 기념해 원래 바다로 이어지는 절벽이 길로 만들어진 것으로, 파도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드라이브를 즐기기에 좋다.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도로 위로 땅거미가 질 때면 하나 둘 켜지는 야간조명과 밤바다의 어울림은 서정적이고, 동해안의 기암괴석 위로 잘게 부셔지는 파도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구경할 수 있는 낮의 얼굴은 역동적이다. 특히 아름다운 것은 일출이다. 밤사이 얼어있던 해풍을 녹이며 등장하는 동해의 일출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특별한 감동이다. 새천년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소망의 탑과 조각공원은 일출명소로 손꼽히는 곳이다.
게으르게 즐기는 망중한, ‘작은후진해수욕장’과 ‘장호항’
멀리 찾아온 길, 바다만큼은 원 없이 보고 싶다면 이름 없는 해변이나 인적 드문 포구가 좋을 것이다. 삼척시청에서 북쪽으로 1.5km. 삼척해수욕장과 인접해 있지만 이름만큼 아담한 규모를 자랑하는 작은후진해수욕장은 낮은 야산을 뒤로한 조용한 어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후졌다’는 속된 말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이곳은 백사장 길이가 150m 남짓에 규모가 작다보니 편의시설도 다양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오래 머물러 망중한을 즐겨도 누구하나 탓하는 이 없으며, 오롯이 바다를 구경하기에 더 없이 한가롭다.

새하얀 해안선이 아름다워 ‘한국의 나폴리’로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한 장호항 역시 한눈에 들어올 만큼 아담한 백사장이 정겨운 곳. 파도가 높은 동해안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바위가 요새처럼 큰 파도가 들이치는 것을 막아서고 있어, 여름철에는 물놀이 인파로 북적이지만 의외로 초겨울 이맘때에는 갯바위 낚시꾼을 제외하고는 한적하기 그지없다.

아기자기한 빨간 등대와 흰 등대, 인기척에도 졸기 바쁜 게으른 갈매기 떼, 빛에 따라 색이 달라 보이는 바다, 겨울 해풍에 몸을 말리고 있는 오징어. 손에 쥔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만 있다면 산책로 벤치에 앉아 정말 질릴 때까지 바다를 구경하기 좋은 곳이다.
바다 옆 남근조각공원 ‘해신당공원’
바다를 원 없이 구경했다면 인근의 다양한 볼거리에 관심을 가져 봐도 좋을 것이다. 장호항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해신당공원은 본격 19금 공원이다. 동해안 유일의 남근숭배민속이 남아있는 지역에 위치한 공원은 시선이 닿는 곳곳에 남근을 형상화한 각종 조각들이 즐비해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곳에 이처럼 남근조각이 즐비한 이유는 물에 빠져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향나무로 깍은 남근 조각으로 제사를 지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이 지방의 전설 덕분이다. 공원과 바다사이에는 배 모양의 어촌 민속 전시관이 있어 어민의 생활과 다양한 정보는 물론 세계 각국의 성문화 전시물도 두루 엿볼 수 있다.

또 관동팔경 중 유일하게 바다가 아닌 내륙에 있는 ‘관동 제 1루’ 죽서루도 놓치기 아쉬운 명소다. 비록 예전 명성에 비해 주변의 현대식 건물에 가려 그 풍광이 덜해지긴 했지만 물에 비친 그림자가 하도 아름다워 임금에게 글로나마 전하고 싶었던 정철의 충심을 느끼기엔 부족하지 않다.

그런가 하면 삼척시는 인접한 동해와 더불어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무고한 목숨들이 숨을 거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다른 고장에 비해 유독 전적비 대신 마을 내 충혼탑과 위령비가 많은데 각 마을 출신, 죽은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란다. 특히 북한 무장공비들에 의해 희생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교동 삼척공설운동장 건너편의 무공수훈자탑과 남양동 공원의 충훈탑은 죽서루에서도 지척이니 발길을 옮겨보자.

자연의 웅장함과 거대함 속에 비록 우리의 존재가 미약할 지라도 지척의 짙푸른 바다를 이토록 평화롭게 지킬 수 있었던 것 역시 평화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누군가의 노력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삼척은 자연이 잉태하고 시간이 기르고, 인간이 지켜 온 고장이다.
‘인생역전’, 곰치국의 화려한 변신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더욱이 이 계절의 여행길은 뱃속부터 든든히 채워야 덜 춥게 느껴진다. 다행히 삼척에는 뱃속을 뜨끈뜨끈하게 데워 줄 먹거리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제철 맞은 곰치국은 빼놓으면 섭섭할 정도. 사실 곰치는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그 못생긴 생김새로 인해 잡힌 자리에서 바다로 버려졌던 생선이다. 물속에 빠질 때 소리가 텀벙텀벙 한다고 해서 물텀벙으로도 불렸었는데 살은 흐물흐물하지만 비린내가 적고 감칠맛이 있어, 해장용으로 그만이다. 곰치를 끓여내는 방법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데 삼척에서는 곰치에 묵은 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얼큰하게 끓여낸다.

좀 심심하다 싶으면 뼈째 썰어 초고추장으로 무쳐내는 가자미회를 곁들여도 좋다. 갓 건져낸 해산물들이 싱싱한 것은 기본 손맛까지 더해져 한 입 두 입 먹다보면 절로 웃음이 터진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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