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늘 우리 주변에 존재해 왔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골목을 지나친다. 그러니 사실 골목투어를 위해 구태여 멀리 떠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봄을 품은 골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경상도 중앙에 위치한 대구광역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래된 골목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한 덕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소 100년 이상 된 근대건축물들이 여전히 붉은 벽돌을 반짝이며, 높다랗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그 곁으로는 오래된 골목 역시 존재한다.
골목투어의 시작은 풋풋했던 첫사랑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위에 백합필적에’, 푸른 담쟁이덩굴(靑蘿)로 뒤덮인 선교사의 사택이 모여 있다 해서 이름 붙여진 청라언덕. 고등학교 등하교 길이었던 청라언덕에서 사춘기 남학생은 종종 마주치는 한 여고생을 보고 첫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내성적이던 남학생은 끝내 말 한마디 못 붙여보고 그렇게 첫사랑을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훌쩍 세월이 흐른 후에도 여전히 아련히 남아 있는 첫사랑의 추억을 담아, 한 곡의 노래가 완성됐다. 바로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친숙한 ‘동무생각’이란 곡이다.
기억을 더듬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언덕을 오르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국적인 건축물과 마주하게 된다. 19세기 말, 대구에 터를 잡았던 파란 눈의 미국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주택들이다. 주택에는 스윗츠, 챔니스, 블레어 등 선교사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지금은 선교, 의료, 역사를 테마로 소규모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중 스윗츠 주택의 기단(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층 높게 쌓은 단)은 일제치하에 강압적으로 허물어야 했던 대구읍성의 돌로 만들어 역사적 의미도 깊다. 또한 의료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챔니스 주택에서는 상아로 만든 청진기 등 이색적인 의료기구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붉은 벽돌로 지어진 벽면과 스테인 글라스 창문, 유럽식 굴뚝과 한국식 정원이 어우러진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아름답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실천하러 간다’는 비문처럼 낯선 타국 땅에서 종교적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애썼던 선교사들의 무덤(은혜정원)도 박물관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선교사주택 주변의 골목은 폭이 좁다. 더욱이 1900년대 이 길가는 솔밭과 잡목이 우거져 있었다. 그러니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피해 대구 도심을 향해 행진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었다.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서문시장에 모인 계성고, 신명고, 대구고보, 성서고 학생과 일반 주민 등 800여 명은 이 길을 따라 도심으로 향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남녀노소 누구나 목이 터져서 이 땅의 봄이 오길 기원하며, 도심을 향해 걸었던 길.
선교사주택과 제일교회 사이로 난 90여 개의 계단 길에는 3.1운동 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한 전시물을 볼 수 있으며, 골목 한편으로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요즘은 어지간한 국경일이 아니면 보기 힘든 태극기가 파란 하늘아래 힘차게 펄럭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코끝이 찡해온다. 비로소 봄은 실감한다. 단순히 햇살이 따뜻해서, 혹은 담장 아래 봄꽃을 쉽사리 찾을 수 있어서가 아니다. 이 땅의 봄, 우리의 봄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그리 길지 않은 계단을 차분히 걸어 내려오면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계산성당과 마주하게 된다. 얼핏 서울 명동성당과도 비슷한 분위기의 계산성당은 현존하는 1900년 대 성당건축물 중 유일한 것으로 건물 자체가 중요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특히 故 김수환 추기경이 사제서품을 받은 곳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유명하다.
다시 성당 정문에서 왼쪽 길로 걷다보면 중절모에 검은색 코트를 갖춰 입은 시인 이상화의 벽화를 만나게 된다. 현대적인 고층건물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진 한옥 두 채. 그 중에 한 곳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이 생전에 거주했던 자택이며, 맞은 편의 한옥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자산가 서상돈의 고택이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빚을 갚지 못하면 다시 이 땅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금가락지를 뽑아서 돈을 마련했던 사회운동의 시발점이 된 인물이 바로 서상돈 선생이다.
비록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시인은 끝내 생전에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이 땅에 다시 새 봄이 찾아왔다.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두 고택의 지붕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유난히 따사로워 보이는 것은 이 땅의 진정한 봄을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 두 분의 염원 때문이 아닐까.
대구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사과와 미인밖에 없다는 것은 이 땅의 국민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학창시절 은사님께는 죄송하지만 여전히 대구란 지명과 연상되는 단어가 많지는 않다. 다만, 요즘엔 추억이란 이름의 단어 하나가 더 늘어나긴 했다. 바로 김광석 거리다. 방천시장은 고인이 된 가수 김광석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지역으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로 조성되어 김광석과 관련한 다양한 음악과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평범했던 골목길은 김광석의 노랫말에 맞춰 다양한 벽화들이 채워져,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다. 최근 유행했던 복고의 영향으로 드라마, 영화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소개돼 더 친숙한 김광석의 음악도 쉽사리 들을 수 있다.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