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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통일 느낌 있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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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한가운데서 마음이 길을 잃다, 순천
                    
                     ‘하늘에 순응한다’는 뜻을 가진 순천(順天). 햇빛을 받아 금은색으로 빛나는 순천만의 드넓은 갈대밭과 갯벌, 그 안에서 매일 ‘난장’을 벌이는 온갖 미물들의 배후에는 거대한 힘을 가진 자연의 섭리가 버티고 있다. 정해진 운명과 인연을 거스르고 세월을 역행하려는 건 인간의 욕심, 나약한 마음뿐이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갈대숲 가운데서 지친 마음이 길을 잃는다.

가을 순천만의 주인은 갈대와 갯벌, 철새

고흥반도와 여수반도 사이에 자리한 순천만의 주인은 갈대와 갯벌, 그리고 철새들이다. 전 세계 5대 연안습지로 10여 년 전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이곳엔 천연기념물인 흑두루미, 재두루미, 노랑부리저어새, 검은머리갈매기를 비롯한 200여 종 넘는 조류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고 있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안쪽, 광활한 갈대밭 사이로 난 데크를 따라 걷다보면 낙엽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갈대꽃이 옷에 스치운다. 갈대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건 순천만의 검은 갯벌이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해풍에는 갯내음이 묻어나지 않다. 갈대 잎은 갯벌 냄새를 걸러내고 대신 제 몸이 부대껴 만들어낸 서걱대는 소리를 바람에 싣는다. 갈대와 갯벌 갈대밭 옆 S자로 휘감겨 도는 수로에는 벌써 겨울 철새들이 자리를 잡았다. 고요한 수면을 힘차게 박차 오르는 철새 떼는 생동감 넘치는 한바탕 군무를 펼치다 어디론가 사라진다. 갑자기 고요함이 밀려들면 민물도요와 노랑부리저어새들이 조용히 사색에 잠기고, 자그마한 농게와 칠게, 짱뚱어들이 가만가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사람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평온하기만 한 갈대숲 한 가운데 서서 밀물처럼 차오르는 고독감에 몸서리를 친다. 마음은 온통 뿌연 해무(海霧)로 가득 찬다.

순천만 제방길에서 만나는 김승옥 문학관

김승옥 문학관 외부과 내부사실 순천을 찾은 건 김승옥 때문이었다. 그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에서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 같고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다’고 묘사된 무진, 아니 순천의 명물, 해무를 볼 수 있을 줄 알았다. 성마른 20대의 겨울, 차가운 골방에 앉아 그의 소설을 읽으며 세상을 미리 배웠던 기억이 났다. 소설 속 무진은 김승옥의 고향 순천 일대를 배경으로 창조한 가상의 공간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마음은 잠시 이곳에서 일탈할 곳을 찾는다. 김승옥 소설의 매력은 인간의 욕망과 가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절망적이고 회의적이고 때론 음험하기까지 한 정조가 가득한 그의 작품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유, 그건 인간 본성이 가진 아이러니를 솔직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김승옥 문학관은 순천만 공원 주차장에서 천변을 따라 1.5km 가량을 걸어가거나 갈대열차를 타고 갈 수 있다. 김승옥문학관 역에는 딱정벌레를 닮은 무인궤도열차 스카이큐브가 연신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몇 해 전 이곳 문학관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노 작가를 직접 만나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그는 없었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 문학관 옆 작은 방에서 옛 작품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집필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논밭 한 가운데 초가집 모양으로 조성된 김승옥 문학관 옆에는 한국 아동문학의 지평을 넓힌 고 정채봉선생의 문학관도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담장 너머 밥 짓는 연기가 솔솔, 낙안읍성민속마을

순천의 서쪽 끝에 자리한 낙안읍성은 이날 축제로 들떠 있었다. 낙안읍성은 조선 초인 1397년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흙으로 쌓았던 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이후 일제에 의해 폐군되었다가 1984년 낙안읍성민속마을로 재탄생됐으며, 주민 120세대가 실제로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성곽 계단을 이용해 성벽 위에 올라서면 정면으로는 남도의 너른 평야와 야트막한 산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편으로는 옹기종기 초가지붕을 맞대고 있는 낙안읍성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낙안읍성 성곽

읍성 안으로 들어가 골목길 양 옆으로 늘어선 낮은 돌담을 넘어다보면 소박하고 투박한 옛 시골마을의 정취가 물씬 묻어난다. 초가지붕 위에 소담하게 앉아있는 흰 박 두세 개, 샘 옆에 옹기들이 가지런히 놓인 장독대, 집 뒤 자그만 텃밭에 심어진 푸릇한 채소와 목화, 담과 담 사이 삐뚜름하게 걸려있는 싸리문까지 둘러보고 나면 마음은 더욱 어려진다. 근심 걱정하나 없이, 뭐 하나 바쁠 일도 없이 온 동네를 들고양이처럼 싸돌아다니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그곳에 있다. 낙성읍성 마을 전경, 전통혼례

순천의 별미, 꼬막정식과 짱뚱어탕

순천 낙안읍성을 빠져나와 벌교읍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조정래 길’을 만난다. 순천시는 소설가 조정래 씨가 태어난 곳 일대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부터 휴전 직후까지 한국 근대사의 격동기를 그려낸 그의 대작 ‘태백산맥’에는 벌교 꼬막에 대한 묘사가 몇 군데 나온다. ‘간간하면서 쫄깃쫄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배릿하기도 한 맛’이라는 겨울 꼬막.

11월부터 이듬 해 2월까지는 이른바 ‘꼬막의 계절’이다. 순천과 벌교에는 꼬막정식을 파는 식당들이 여럿 있는데 꼬막 정식을 주문하면 꼬막전, 양념꼬막, 꼬막 회무침, 꼬막탕(찌개), 삶은 꼬막 등 다양한 꼬막 요리와 정갈한 밑반찬들이 나온다. 짭조름하면서 감칠맛 나는 꼬막 본연의 풍미를 잘 살린 음식들이 한 상 가득이다. 짱뚱어탕 또한 순천의 별미로 꼽힌다. 순천만 갯벌에서 나고 자란 짱뚱어탕은 맛이 담백하며 보양식으로 선호된다.
꼬막정식과 짱뚱어탕 해가 순천만 위로 힘없이 떨어지며 갈대밭을 검붉게 물들일 때 순천을 떠난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무진기행의 주인공은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찢어 버린다. 지금의 나는 과거 무수한 나로 이뤄져 있다. 마음이 다시 제 길을 찾으려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다. 타인에게 기대는 건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갈대밭 어딘가에 짧은 문장 하나를 묻고 떠난다. 안녕, 당신.

<글.사진 /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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