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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말하다│포커스

통일외교, 선택이 아닌 필수요건 글. 차두현 이사(한국국제교류재단 국제교류협력)

차두현 교류협력이사(한국국제교류재단)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되었던 舊공산블럭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이라는 대격변의 서막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당시 동독 내에서는 한스 모드로프에서 로타르 드 메지에르로 이어지는 개혁세력이 집권하게 되었고, 이는 동ㆍ서독의 통합논의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독일통일과정에서 양 독일간의 협상과 협의 이상으로 중요했던 것은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서독 정부의 통일외교였다.

유럽의 역사에서 강력한 통일 독일의 출현은 항상 중대한 세력균형의 변화를 불러왔고, 더욱이 2차 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의 이미지가 여전했던 독일의 재통합은 프랑스 등 주변국가들의 비상한 경계심을 촉발하기 충분한 사안이었다. 더욱이, 독일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경선의 확정과 동ㆍ서독이 기존에 맺은 군사동맹의 처리, 독일 내 외국 군대의 철수 문제 등 복잡한 국제관계적 현안들이 선결되어야 했다. 예를 들어, 당시 동독과 서독 내에서는 미군을 비롯한 서방군대(서독)와 舊소련군(동독)이 동시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서독을 중심으로 한 재통일은 결국 서독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잔류와 舊소련군의 동독지역으로부터의 일방 철수를 불러올 것이었기에, 이와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의 동의가 없이는 안정적인 통합작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 독일을 방문해 베를린 장벽을 둘러보고 있다.

서독은 오랜 동맹국인 미국의 협력을 바탕으로 여전히 통일에 대해 우려의 눈초리를 거두고 있지 않았던 프랑스 등을 꾸준히 설득해 나갔고, 무엇보다 통일독일의 안보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舊소련으로 부터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부심하였다. 결국 콜은 1990년 7월 고르바초프와의 독ㆍ소 정상회담을 통해 이를 타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 통일은 분단이후 지속된 서독의 합리적 양독 관계 운영의 결실인 동시에 콜 정부 외교의 승리로도 특징지워질 수 있다. 이를 감안한 콜 정부는 동독 정부와의 통합협상이 물밑으로 개시되던 1990년 초부터 주변국과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90년 5월부터 양 독일과 미국, 영국, 프랑스, 구소련 등 관련국들 간의 ‘2+4 외무장관 회담’이 개시되었고, 2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결국 통일독일의 NATO 잔류(서방군대 주둔 유지 포함)와 인근 국가들과의 국경선 확정 등을 골자로 하는 ‘2+4 조약’이 통일 직전에 체결될 수 있었다. 콜 정부가 노력을 기울인 것은 이러한 다자적 합의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서독은 오랜 동맹국인 미국의 협력을 바탕으로 여전히 통일에 대해 우려의 눈초리를 거두고 있지 않았던 프랑스 등을 꾸준히 설득해 나갔고, 무엇보다 통일독일의 안보에 최대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舊소련으로 부터의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부심하였다. 결국 콜은 1990년 7월 고르바초프와의 독ㆍ소 정상회담을 통해 이를 타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점에서 독일 통일은 분단이후 지속된 서독의 합리적 양독 관계 운영의 결실인 동시에 콜 정부 외교의 승리로도 특징지워질 수 있다.

독일분단의 상징물이었던 베를린 장벽 앞에 모여든 인파 시각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대통령께서 연초 ‘통일대박론’을 강조하셨고, 이것이 금년 3월의 ‘드레스덴 선언’을 통해 더욱 가시화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통일한국을 향해서는 넘어야 할 단계가 많다. 3대 세습을 통한 수령통치의 지속이라는 낡은 정치적 행보를 계속하는 북한은 여전히 우리 정부의 대화 제의에 대해 진정성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4차 핵실험 징후의 노출 등 오히려 안보 불안 요인을 가중시키고 있다. 원론적인 면에서는 통일을 지지하면서도 정작 통일 과정에서 발생할 부담을 나눠지는 문제에 대한 충분한 국민적 합의도 여전히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미래 통일과정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주변국의 통일지지 여부는 여전히 외교적 수사 이상의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록, 한반도 통일에 대해 명시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한 주변국은 없다고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의문점에 대해 아무도 분명한 답을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통일 이후에도 한ㆍ미 동맹이 지속되고 주한미군도 유지된다고 가정할 때, 과연 중국은 이러한 통일한국과 국경선을 맞대는 것을 환영할까? 역(逆)으로 통일한국이 현재의 동맹체제에 중대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계산이 설 경우 우리의 오랜 동맹국인 미국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수치적으로도 통일한국은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재래군사력의 등장을 불러올 수 있으며, 일부 대량살상무기 능력도 갖출 수 있다. 과연 이러한 군사강국의 등장을 한반도와 역사적으로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던 일본이 환영할까? 어떠한 방법으로든 훼방을 놓으려 들지는 않을까? 러시아 역시 이러한 세력관계의 일대 변화에서 과연 어떠한 손익계산을 할까?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통일의 비전을 주변국과 공유하고, 통일한국 이 가져다 줄 주변국에 대한 편익을 깨닫게 하고 설득해 나가는 일은 지금부터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국내의 바쁜 현안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 채 자원외교에 나섰던 대통령과 정부의 열정이 통일외교 에서도 발휘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6자회담 한·중 수석대표회의 의문은 안보ㆍ전략적인 분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통일은 분명 비용을 훨씬 뛰어넘는 중ㆍ장기적 편익을 불러올 것이라 기대되지만, 통합과정에서 드는 북한 재건 비용은 예상보다 훨씬 더 높을 수 있다. 이러한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한국 단독의 힘보다는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공통의 역량을 결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어떤 조건 하에서 주변국과 국제사회는 우리의 통일 이니셔티브에 동참할까? 이런 의문에 답을 주려 노력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통일은 남북한의 문제인 동시에 국제적 문제라는 점을 새삼 절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막상 통일이라는 기회의 창문이 열렸을 때 이러한 의문에 답을 얻으려 하고, 주변국을 설득하려 해서는 이미 늦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통일독일이라는 대업을 앞두고 콜이 전개한 외교가 효과를 발휘한 것은 당시 서독정부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은 서독이 그 이전 20여년을 꾸준히 쌓아온 국제관계 상의 자산에서 나왔다고 봄이 타당하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의 비전을 주변국과 공유하고, 통일한국이 가져다 줄 주변국에 대한 편익을 깨닫게 하고 설득해 나가는 일은 지금부터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국내의 바쁜 현안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쪼개 채 자원외교에 나섰던 대통령과 정부의 열정이 통일외교에서도 발휘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 : 청와대,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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