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안 있으면 삼복 더위 중 마지막인 말복(末伏)이 찾아온다. 복날에는 삼계탕과 보신탕을 파는 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곤 한다. 요즘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열량, 고지방 음식을 꺼려하고, 사회문화적 인식이 변화되어 여름보양식의 트렌드가 좀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보신탕을 최고의 보양식으로 치는 이들이 많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도 보신탕을 먹을까? 남북한 음식비교로 좌충우돌 남한적응기를 시작해 본다.
북한에서도 보신탕을 먹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유득공은 ‘경도잡지’에서 ‘개장을 먹고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기운을 보충할 수 있다’고 썼다. 보신탕은 남과 북이 갈라지기 전부터 우리 민족이 함께 먹었던 음식이었던 것이다. 다만 북한에서는 보신탕을 ‘단고기’ 또는 ‘개장’이라 부르고, 조리방식과 양념도 남한과 차이가 있긴 하다.
청진에서 꽤 부유한 삶을 살았던 A씨는 남한에서 먹는 보신탕은 북한에서 먹었던 단고기 맛이 아니라며 아쉬워했다.
“남한에서는 육개장이가(육개장이) 그래도 북한 단고기 맛에 가깝더란 말이지.”
김책 출신의 아주머니 B씨는 단고기를 ‘개장’이라고 불렀다. 바닷가가 고향이어서 처음에는 ‘게장’을 뜻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보신탕을 가리키는 말.
“남한 개장은 북한의 개장하고 달라. 돼지고기 살토매기(살) 같은 맛이 나더라고? 그래서 얼마 전엔 통 거(개 한 마리를 통째로) 사가지고 손님들 초청해다가 대접했었어.”
남북한 부르는 음식 이름은 같은데 재료가 다른 것이 있으니 바로 ‘순대’다. 탈북한 지 10여년이 지나도 아직 C씨는 남한의 순대를 못 먹는단다.
“북한의 순대는 당면이 안 들어가거든요. 지금도 순대 사러 가면 ‘내장 많이 주세요’라고 말하고 내장만 먹어요. 순대는 아바이 순대 파는 데 가서 따로 먹고요.”
하지만 된장은 남북한이 비슷해서 갓 남한에 온 사람이라도 된장찌개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메주된장 맛은 이 짝(남한)이나 저 짝(북한)이 같더만.”
이처럼, 하물며 벌레가 먹고 보잘 것 없는 배추라도 북한 토양에서 나고 자란 것이 그립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의외로 북한의 옛 맛이 전혀 그립지 않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D씨는 중국에 와서 생활하다 다시 북송되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북한에 있을 때는 배고파서 뭐든지 잘 먹었거든요. 그런데 중국에 살다가 다시 북한으로 잡혀가서 먹었던 음식은 맛이 없었어요. 순대도 국수도 북한을 떠나 있을 때는 진짜 북한 거 먹고 싶었는데, 막상 돌아가서 먹어보니 국수도 밥도 모래 씹는 것 같아요. 입맛을 베려놔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예전에 먹었던 그 맛을 다시 느낄수 없었어요.”
북한이탈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의외로 ‘맞아 맞아, 우리 남한도 그래요’ 이렇게 맞장구를 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일상 예절에서 공통점을 많이 느꼈다는 A씨.
“서로 갈라져 있는 기간이 오라서(길어서) 그렇지, 조선민족 풍속은 다 같다는 걸 많이 느꼈어. 밥을 왼쪽에 놓고 반찬을 오른쪽에 놓고… 밥을 다른 쪽으로 놓으면 대단히 욕해. 어른보다 먼저 밥숟가락을 들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아**가? 이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역할 변화이다. 물론 한국에 온 지 오래된 이들은 북한을 남존여비가 매우 강한 사회로 회상했다. 탈북한 지 7년 정도 된 남성 A씨.
“내 (북한에) 있을 때꺼지는 남자를 낳아야 좋다고 했어. 며느리들이 아들을 낳게 되면 미역국을 끓여주고 돼지발족(족발)을 사서 고아주는데, 딸 을 나면 값이 없었다 말이지. 그런데 2007년 이후에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북한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데는 동의했다. 북한에서는 남자들이 직장을 갖지 않으면 추방당하거나 처벌받는데, 막상 직장에 다녀도 끼니를 잇지 못하기 때문에 대개 여자들이 장마당에서 장사를 한다. 50세 이상의 여성들만 시장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국가에서 정해놨지만, 50세 미만 여성들도 규찰대 단속을 피해 ‘메뚜기장’에서 반찬이나 소채(채소)를 팔곤 한다고.
“여자들이 하루 종일 장마당 나가서 먹여 살리니까 집안에서 남자가 가사 다 해야 하거든요. 유머 도는데(우스갯소리로), 남편을 메주 주무르듯이 주무른다고 이야기해요.”
그 이유와 양상은 다를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늘어난 것만은 남한과 북한이 같은 셈이다.
그런데 문득, 영화나 드라마에서 처럼 북한에서는 정말 사람들끼리 호칭을 ‘동무’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
“북한 학교에 있을때 간부들에게 지령이 떨어졌었요. 이제부터 각 학급별로 동무라고 불러라. 무슨 무슨 동무라고 부르지 않는 애들은, 그 학급은 처벌준다(처벌한다). 그래서 서로 막 어색한데도 무슨 동무라고 부르긴 했어요. 하지만 친구끼리는 아무개야, 이러면서 편안하게 대해요.”
F씨는 그때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가 많이 그립다고 했다. 하지만 남한에 와서는 아직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못 만났다고.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상냥한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생각을 고쳐먹어야겠다 하는데도 벽을 쌓게 되고, 뒤돌아서면 내 숭(흉)을 보는 것처럼 느껴져 처음에는 열등감이 많았어요.”
남한 주민들도 오해가 있긴 마찬가지. 바로 북한 사람들이 일할 때 그닥 적극적이지 않다는 것. 경쟁사회에서 살아온 남한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일 수도 있지만, A씨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북한에서는 당에서 한 걸음 걸으라면 한 걸음 걸어야지 더 잘하겠다고 두 걸음 나가게 되면 말썽이 될 때가 있어. 열성이 말썽이다... 그러니까 열성을 혼자 피우다가 지나치게 나가면 말썽이 된다는 말이지.”
또 남북한 주민어울림 행사 등에 나와서 참여해달라고 요청을 해도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는 오해들도 있다. 알고 보면 사정은 이렇다.
“내가 원래 성격이 왈락왈락한데(활달한데), 혹시라도 북한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한테 방해가 되지 않는가, 잘못했다가 이 사람들에게 불행이 오지 않을까해서 안 나가는 기지.”
남한사회로 들어오기 전, ‘신용’에 대해서 철저히 교육받았기 때문에 직장생활을 할 때도 약속을 어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C씨의 하소연도 들었다.
“하나원에서 교육받을 때는 남한 사람들이 약속 어기는 것을 절대 싫어하기 때문에, 혹간 못나올 때나 늦을 때는 꼭 전화해야 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아! 한국 사람들은 신용이 철저한가 했지요.”
하지만 막상 나와서 취업을 해보니 업주가 당초 계약을 맺은 만큼 월급을 올려주지 않아 실망했다는 C씨. 어느 사회라고 좋은 사람만 있겠나 체념했다면서도 아직 꾸준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에 만난 한 탈북 남성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남한의 애국가가 진짜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린 것 같아요. 딱 9년 됐습니다.”
‘대통령’보다는 ‘장군님’이란 말이 아직 더 자연스러운 이들이 남한 주민들을 ‘내 이웃’으로, 한국을 ‘내 조국’으로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 세월 살아온 터전을 떠나 ‘무한한 기회의 땅’이자 동시에 ‘무한 경쟁의 땅’이라는 양면성을 지닌 사회에 뛰어든 이들에게, 남한 사람들이 먼저 가슴을 열고 이웃이 되어 그들의 삶에 길라잡이가 되어줄 필요가 있겠다.
<글. 기자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