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호 > 특집
특집 / 드레스덴 구상의 실천 과제
박근혜 대통령은 드레스덴 구상에서 인도적 문제 해결,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과제를 제시하고, 인도주의 사안인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해결 의지와 북한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 확대를 동시에 제안했다. 특히 ‘임신부터 두 살까지’ 북한의 산모와 영·유아에게 영양과 보건을 지원하는 ‘모자보건 1000일 패키지 사업’은 ‘북한의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해 한반도의 통일 미래를 함께 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남북한이 함께 추진할 행복한 통일 준비라는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경제난으로 북한의 중앙 배급 체계가 사실상 붕괴되면서 장마당 등을 통한 사적 경제 거래는 당국의 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확대돼왔다. 또한 기존의 무상치료, 무상교육, 사회보장 체계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해 경제적 부담 능력을 갖추지 못한 계층들의 권리는 심각하게 침해당하고 있다. 북한 내 취약계층 중에서도 아동의 경우는 성장기의 심각한 영양부족이 신체 및 인지 발달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임신·수유부의 영양부족 역시 출산 아동의 신체 및 인지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북한 내에서도 취약계층인 임산부와 영·유아
2012년 유엔기구와 북한 중앙통계국이 실시한 북한 어린이 및 여성의 영양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의 5세 미만 어린이 가운데 15.2%가 저체중이며, 27.9%가 만성 영양장애, 4%가 급성 영양장애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임산부도 31.2%가 빈혈을 보이고 있으며, 음식물 섭취가 특정 식품군에 치우쳐 있어 복합 미량 영양소 부족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임산부의 영양부족 상황은 영·유아의 건강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2012년 북한의 신생아 사망률과 5세 미만 어린이 사망률은 1000명당 각각 16.7명, 22.7명으로 나타났다. 모성 사망률은 2012년 68.1명으로 보고됐다.
북한의 신생아 사망률과 모성 사망률이 높게 나타나는 것은 분만 시 과다 출혈 등 응급 상황에 대한 대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로 목숨을 잃는 어린이가 많은 것도 5세 미만 사망률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이다.
국내 입국 탈북자 대상 심층 면접조사 결과에 따르면, 북한 당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임신한 여성이 마을 진료소나 구역병원에 임신 등록을 하면 출산 전까지 정기 검진을 받고, 유엔에서 지원한 비타민이나 철분 등 영양제를 지급받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실제 북한에서 출산을 경험한 국내 입국 탈북 여성들의 상당수가 임신 등록을 하지 않으며, 경제적 부담을 감안해 산파를 불러 가정에서 출산한 것으로 파악됐다.
‘1000일’은 엄마가 아기를 잉태하는 출산 전 9개월부터 만 두 살이 되기까지의 기간으로 아기의 신체적, 인지적 성장에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이 1000일 동안의 산모와 영·유아의 영양실조(Undernutrition)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비용 면에서도 효율적이다.
2008년 영국의 의학 전문지인 란셋(Lancet)은 5회에 걸쳐 1000일 프로젝트의 효과성을 입증하는 특별논문을 게재해 국제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미국, 영국, 아일랜드 정부가 1000일 계획의 국제적 실행을 주도했으며,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은 재임 시절 1000일 계획을 강조하는 데 앞장섰다. 힐러리 클린턴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 여성대회 기조연설을 통해 “여성의 권리가 인권이다(Women’s rights are human rights)”라고 강조한 바 있다.
1000일 패키지 프로그램은 임신·수유부의 영양 및 출산 관리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권리 개선과 관련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세계식량계획(WFP), 유엔아동기금(UNICEF),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들도 임산부 및 영·유아 영양 및 보건 개선사업들을 추진해왔다. 특히 WFP는 2010년 영양실조 해결의 선도적 노력을 강조했다. 즉, 전 세계적으로 개발도상국 정부, NGO, 재단, 연구기관, 기업이 공동 협력해 1000일 계획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면서 레이저빔 프로젝트(Laser Beam Project)라는 이름으로 공여국과 기부자들이 공감하기 쉽게 명칭을 부여했다.
1000일 계획은 영양 개선(SUN, Scaling Up Nutrition) 프로그램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으며, SUN은 구체적인 목표와 평가지표들을 포함한 실행 계획이다. 2010년 영양 개선 실행 합의 틀(Agreed Framework for Action to Scale Up Nutrition)로 시작했으며, 유엔 사무총장실 산하 식량안보 및 영양 특별보고관이 SUN 운동의 조정관으로 임명됐다. SUN 프로그램은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51개 국가에서 추진돼왔다. 인도네시아는 2011년 SUN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후 2013년 국가 부처 4곳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대통령령으로 법제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영양 개선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선진국에서도 SUN 프로그램을 모유 수유 장려 및 모성 보호와 연계해 일부 적용해왔다. 특히 저소득 임산부와 영·유아를 대상으로 단백질 공급 등 영양 지원과 모유 수유 프로그램이 이루어져왔다.
1000일 패키지 사업은 남북한 간 ‘인도적 협력(Hu-manitarian Cooperation)’ 사업으로서 상호 신뢰 형성을 위해서도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산모 및 영·유아 대상 영양 및 보건 개선사업은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하며, 해당국 정부가 개선의 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지역주민의 참여를 독려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과 우리 정부의 협력 약속이 중요하다.
북한이 앞장서고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가 지원해야
드레스덴 선언에서 제안된 ‘1000일 패키지 사업’은 단순히 위기에 처한 취약계층인 임산부와 영·유아에 대한 지원사업으로 추진되는 것을 넘어서야 할 것이다. 북한 당국이 신생아 및 영·유아 사망률 저하, 모성 사망률 저하를 목표로 국가적 차원의 전략을 수립하도록 하고,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가 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유엔의 새천년개발계획에 이미 명시된 것이며, 북한 당국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강조해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영·유아 보육 및 학교급식을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 수혜자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차별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추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북한 내 1000일 패키지 사업은 출산 전 9개월부터 만 두 살까지의 임신·수유부와 영·유아를 대상으로 특정한 구분 없이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추진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북한 실무당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고, 평양 등 특정지역은 북한 당국이 담당하고 국제기구, 국내외 NGO가 기타 지역에 대한 실행 파트너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000일 패키지 사업의 효과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 당국이 사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가용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 우선적으로 투입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우선적인 책임을 강조해 국제사회의 지원 필요도를 저하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존 사례에서 보듯 해당 국가 내 실행 인력들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에서 실무당국뿐만 아니라 지역 단위 집행 관련 인력들의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과 연수사업도 추진돼야 한다. 북한 내 호담당의사 등 보건인력뿐만 아니라 북한 내 유일한 여성조직인 ‘여맹’의 역할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1000일 패키지 사업은 북한 내 가임기 여성들이 임신을 하게 되면 집중 지원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여맹 혹은 여성기금과 같은 관련 조직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 SUN 프로그램 추진 과정에서도 ‘양성평등’ 가치를 강화하는 것이 병행됐다는 점에서 북한 내에서 관련 활동을 담당할 수 있는 여성 보건인력의 역량 강화가 수반돼야 할 것이다.
1000일 패키지 사업과 농촌 복합단지 병행 필요
1000일 패키지 사업은 단순히 구호물자 지원에 대한 분배 확인 등의 모니터링 방식으로 추진돼서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오히려 사업 효과성 측정을 위해 사업 대상이 되는 임산부와 영·유아들의 베이스라인 데이터와 정기적인 후속 데이터 축적이 필요하다. 데이터의 수집은 어린이 및 여성 영양 실태조사와 유사하게 측정이 용이한 체중, 신장, 가슴둘레, 빈혈검사 등의 자료를 축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는 지원사업의 효과성 차원을 넘어서 북한 당국이 목표 달성을 위한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보완 발전시킬 수 있는 근거자료로도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1000일 계획이 담고 있는 영양 개선 중심의 접근과 2005년 추진한 우리 정부의 영·유아 지원사업의 보건 중심 접근에서 한 단계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북한 임산부 출산 관리가 더욱 체계적이고 실효성 있게 추진될 수 있도록 돕는 방안들이 포함돼야 할 것이다. 임산부와 아이들의 영양 섭취가 단순 곡물 위주로 이루어지는 상황을 감안해 단백질 및 미량 영양소 섭취가 가능하도록 지역 내 생산 기반 조성과 병행 추진하는 융합모델이 바람직하다.
드레스덴 선언에서 명시된 ‘농촌복합단지’를 추진할 때에도 이러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지역 여성조직 등 단위기관이 축산, 두유 생산, 양계 등을 통해 생산 기반을 마련하고, 우선적으로 지역 내 임산부 및 두 살 미만 아동이 있는 가구에 우선적으로 공급하도록 하는 방식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식수·위생·보건(WASH), 교육사업 등이 병행되어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 단위 역량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1000일 사업의 효과를 높이려면 사업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추진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행복한 통일을 위한 준비 차원에서 1000일 패키지 사업이 갖고 있는 의미에 공감하고 정치적인 입장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가 공감하고 지지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여성이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한 여성계가 주도적으로 1000일 패키지 사업 추진 기반을 조성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남북한 여성계가 참여해 단순히 북한 여성들의 임신과 출산 관리를 체계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한 내의 임신 및 출산 관리도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을 함께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행복한 통일 준비로서 여성의 재생산 권리가 북한 내에서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에서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는 소외계층들의 권리를 회복시킨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이 글은 2014년 6월 17일 국립외교원·통일연구원 공동 학술회의 ‘드레스덴 선언과 북한 취약계층 지원 방안’ 발제문의 일부를 재정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