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호 > 커버스토리
커버스토리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내 문제, 남북관계, 동북아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특히 남북관계와 통일에 대해서는 통일 대박론의 거대 담론으로부터 나아가서 드레스덴 구상을 구체화하는 작은 통일론을 제안했다.
올해는 광복 69주년이자 분단 69주년이다. 올해 8·15 경축사는 분단 69년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내년 광복 70주년을 준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동북아 차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질서가 탈냉전을 거쳐 격동의 변화 조짐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동북아 질서에 대비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한편 통일 준비와 동북아 질서 변화에 대한 대비는 국내적으로 국가 역량을 강화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올해 8·15 경축사는 크게 보면 국내 문제, 남북관계, 동북아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담았다. 우선 국내 문제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안전체계를 정비하고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국가 혁신에 초점을 두었다. 국가 재도약을 위해 국민 안전망의 혁신, 병영문화 개선, 규제 개혁과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의 추진 등이 중점 과제로 제시됐다.
역대 8·15 경축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남북관계와 통일 문제에 많은 비중이 주어졌다. 박근혜정부는 출범 이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제시하고 신뢰 구축을 토대로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과 통일 대비를 강조해왔다. 특히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 대박’을 제시해 통일담론에 불을 지피고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기를 점화하고자 했다. 그리고 3월에는 드레스덴 구상을 통해 대북 제안을 했으며, 8월 초에는 통일준비위원회가 출범했다. 8·15 경축사는 통일 대박론의 거대 담론으로부터 나아가서 드레스덴 구상을 구체화하는 작은 통일론으로 나타났다.
작은 통일론은 통일 대박론의 거대 담론으로 점화된 통일의 불씨를 남북한이 실질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미시 담론으로 구체화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남북한의 군사적 대립과 갈등을 감안할 때, 비군사적이고 비정치적인 생활담론을 실행함으로써 남북한 주민의 마음속에 신뢰를 쌓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 실천 방안을 패키지로 제시해 5·24 조치의 해제와 같은 현안을 둘러싼 논란을 잠재우면서 북한의 호응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통일 준비의 출발점은 비정상적인 남북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위해 무엇보다 먼저 북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번 8·15 경축사는 북한이 우선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서방 세계의 경제 지원과 과학기술 협력을 받음으로써 경제 발전에 성공한 카자흐스탄과, 개혁·개방을 선택해 성공한 베트남과 미얀마를 북한이 본받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됐다.
그리고 남북한의 실천 과제로 세 가지 분야의 ‘작은 통로론’이 제시됐다. 작은 통로는 남북한이 서로 만나서 소통하고 융합할 수 있는 샛길이다. 이러한 샛길들이 종횡으로 연결되고 확대되어 통일로 나아가는 큰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통로는 남북한 주민이 서로 만나고 물자, 정보, 기술을 교류하고 공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상호 융합하는 상생의 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작은 통로는 남북한이 미래의 큰길로 나아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경로이다. 남북한이 작은 길에서 화해하고 협력하면서 민족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공유함으로써 통일에 이르는 큰길을 지향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통로는 무엇보다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다. 이 길을 통해 남북한 주민이 서로 필요한 것을 얻고 생활 향상에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남북한이 만나고 소통하고 융합하자
첫 번째 통로로는 환경 협력의 통로가 제시됐다. 한반도의 생태를 연결하고 복원하여 환경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성사진을 보면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도시화와 산업화 측면에서 확연히 구분될 뿐만 아니라 산림녹화의 측면에서도 뚜렷이 구분된다. 분단은 체제와 사람의 분단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분단과 이질화를 발생시켰다. 더욱이 최근 기후변화는 한반도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남북한의 환경 협력이 절실한 문제이다.
환경 협력의 우선 과제로 하천과 산림의 공동 관리가 제안됐다. 임진강, 북한강 등 남북 공유하천의 관리는 홍수 조절 및 하천 이용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다. 유럽의 여러 나라를 가로지르는 라인 강의 공동 관리 및 이용을 위해 관련국의 협력체계가 가동되는 것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앞으로 백두대간 생태계 연결 및 복원사업이 추진될 수도 있다. 특히 북한의 산림녹화와 병충해 방지를 위한 사업도 중요한 과제이다. 북한도 산림녹화에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에 대해 북한이 호응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올해 10월 평창에서 개최되는 유엔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에 북한 대표단의 참가를 촉구했다. 북한도 이 협약의 비준국이어서 북한의 참가를 기대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두 번째 통로로 민생 통로를 제안했다. 민생 통로는 남북한 주민의 실질적인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남북 협력의 목표가 협력의 양적 증가나 확대가 아니라 남북한 주민이 모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 주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생존권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역점을 두겠다는 것이다. 민생 협력의 중요성은 이미 드레스덴 구상에서 밝혀진 것으로 앞으로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과제가 필요하다.
민생 협력의 우선 과제는 이산가족 상봉이다. 더욱이 고령 이산가족이 많은 실정을 감안할 때 이산가족 상봉은 시급히 해결돼야 할 문제다. 일회성 상봉을 넘어 상봉을 정례화하고 동시다발적 상봉을 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그리고 북한 주민의 민생 향상을 위해 맞춤형 인도적 지원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드레스덴 구상에서 제안된 모자 보건 패키지 사업이 선결 과제가 될 것이다.
북한 주민의 생활환경 개선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서는 주거, 농업, 산림, 하천 관리, 환경 보전 등이 복합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논의 중에 있는 복합농촌단지 건설이 이러한 민생 협력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주민의 민생 인프라 건설을 위해 남한에서 농촌 개발과 생활환경 개선, 산림녹화 등에서 축적된 경험과 지식이 활용될 수 있는 방안이 모색돼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8·15 경축사에서 민생 통로의 중·장기 과제들이 제시됐다. 남한의 경제개발 경험을 전수하기 위한 협력 방안, 북한의 지하자원과 노동력 활용 방안 등이 향후 추진될 수 있는 과제로 제시됐다.
세 번째는 문화의 통로다. 남북한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질화된 문화의 간격을 좁히고 문화적으로 소통하고 새로운 문화적 융합을 이룩해야 한다. 통일 문제에 대해 정치군사적인 측면과 경제적 측면을 넘어서 문화 융합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은 민족동질성 회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 또한 문화 융합은 통일이 정치적, 법적 측면의 외적 통일을 넘어서 문화적으로 어울리는 내적 통합을 이룩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문화 통로를 위해 우선 문화유산의 공동 발굴과 보존이 제시됐다. 21세기는 문화의 세기이며 모든 나라들이 문화유산을 통해 국가적 자존심을 고양하고 관광산업과 문화산업을 발전시키고자 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남북한에 흩어져 있는 유형, 무형의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것은 시급한 과제다. 또한 문화 협력은 비정치적, 비군사적 문제이기 때문에 남북한이 비교적 용이하게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문화재 발굴·보전사업과 관련하여 현재 진행 중인 개성 만월대 발굴사업, 겨레말 큰사전 편찬, 개성 한옥 보존사업 등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박 대통령은 내년 광복 70주년을 함께 기념할 수 있는 문화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위해 남북대화가 필요할 것이며 이는 남북관계 진전의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박 대통령은 작은 통로를 열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남북대화 재개를 제안했다. 북한에 이미 제안한 남북고위급 접촉에 호응할 것을 요청했다. 남북대화 제안은 교황의 방한을 통한 한반도 평화 메시지, 북한 대표단의 인천 아시안게임 참가 등 남북관계의 긍정적 요인들을 감안해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남북대화 제안에 대해 북한의 반응은 아직까지 부정적이다. 북한은 올 초 이후 미사일 발사 등 대남 위협을 지속하고 있으며 드레스덴 구상에 대해서도 흡수통일 기도라고 비난한 바 있다. 또한 북한은 여러 경로의 성명을 통해 한미 군사훈련 및 5·24 대북조치 등 적대행위 중지, 6·15 공동선언 등 기존 남북 합의 이행, 주한미군 철수, 남한의 외세 의존 정책 중지 등을 요구해왔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이 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전면 수용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그러나 북한이 경제적 실리 및 우호적 대외환경 조성 등을 위해 남북대화의 필요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사안별로 남북대화에 응할 가능성도 있다.
원자력안전협의체 구성 제안해 동북아 협력 도모
이번 8·15 경축사에서 동북아 문제는 한일관계와 동북아협력구상에 맞추어졌다. 우선 한일관계는 동북아 질서 재편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통일 준비를 위한 국제 협력 형성이라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더욱이 내년은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한일관계는 그동안 경제·문화 협력과 외교적 협력을 통해 많은 발전을 했으며, 양국관계는 여러 분야에 걸쳐 밀접하게 얽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문제와 영토 문제는 한일관계 발전의 족쇄가 되고 있다. 이를 감안해 박 대통령은 일본의 올바른 역사 인식,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결단을 촉구했다.
그리고 동북아 협력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 제시됐다. 박 대통령은 동북아의 갈등과 대립을 완화하고 협력의 주춧돌을 놓기 위한 협력사업으로 원자력안전협의체를 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석탄·철강공동체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가 갈등 해소와 평화 정착에 기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에서 원자력 안전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한 만큼 원자력안전협의체를 결성해 원자력 이용의 안전 방안을 강구하고 이를 통해 다자 협력의 바탕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아울러 동북아 평화 협력을 위해 재난 구조 협력, 기후변화 대응, 마약 문제 등의 분야에서 협력을 축적함으로써 다자 간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 정착을 도모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올해 8·15 경축사의 세 축인 국가 혁신과 통일 준비를 위한 작은 통로, 그리고 동북아 협력 제안은 서로 연결돼 있다. 국가 혁신을 바탕으로 통일을 위한 통로 개설과 동북아 협력이 실효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국내적 역량을 바탕으로 대북 제안과 국제적 제안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세 분야를 연결할 수 있는 구체적 실행 방안들이 뒤따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