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호 > 포럼
포럼 / 상하이에서 열린 한·중 평화통일포럼
7월 30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의미 있는 포럼이 중국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이곳에서 ‘동북아 평화·협력과 한반도 통일’을 주제로 한중 평화통일포럼을 연 것이다.
윤완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한중 평화통일포럼이 열린 상하이 르네상스호텔 회의장에 ‘동북아 평화·협력과 한반도 통일’이라는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걸렸다. 한반도 통일이라는 주제를 다뤘음에도 500여 명의 청중이 방청석을 가득 메웠고, 그중 상당수가 젊은 중국 대학생들이었다. 중국에서 한반도 통일에 대한 논의 자체가 금기시돼왔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변화였다.
민주평통은 이번 포럼을 한반도 문제 연구에 저명한 중국 푸단대 한국조선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주최했다. 민주평통 상하이협의회가 주관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했다. 이 덕분에 포럼에 참가한 한국 측 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중국 측 학자들도 상하이에서 내로라하는 한반도 및 동북아 전문가들이었다. 주상하이총영사관 관계자는 “상하이에서 한반도 문제로 방귀 좀 뀐다는 전문가들은 다 모였다”고 농담 같은 진담을 던졌다. “상하이의 핵심 한반도 전문가들이 포럼 패널로 총출동했다”고 했다.
포럼은 신정승 전 주중대사가 한중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기조연설을 한 뒤 ‘한반도 정세 변화와 중국’(제1세션), ‘동북아 안보구조 변화에 대한 평가와 전망’(제2세션), ‘미래지향적 한중 협력 방안’(제3세션)을 논의하는 순으로 이어졌다.
기조연설에 앞서 주최 측인 민주평통 박찬봉 사무처장이 개회사에서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설명하면서 중국에 던진 메시지도 의미심장했다.
박 처장은 “상하이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꽃피운 중국 시장경제의 상징이다.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통일을 지지한다면 북한이 중국을 본받아 경제의 시장화를 하루라도 빨리 앞당길 수 있도록 북한을 설득해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또 “25년 전 5배였던 남북 간 소득 격차가 지난해 21배로 확대됐다”며 “남북 간 소득 격차가 커지면 통일 과정 자체가 불안해진다. 하루빨리 북한이 시장경제를 도입토록 해 남북 간 격차를 좁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중국이 역할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박 처장은 “북한 경제의 시장화는 남북 간 경제의 구조적 차이를 해소해 한반도 경제공동체로의 통합을 용이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따른 ‘작은 통일’이 이뤄지면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 즉 ‘큰 통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박 처장은 “중국이 협력하면 통일은 더 앞당겨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반도 통일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북한 경제를 시장화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 평화통일 구상은 북한 경제의 전면적 시장화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드레스덴 구상을 통해 북한 경제의 시장화와 남북 경제공동체 건설을 거쳐 한반도의 완전한 통일로 벽돌 쌓듯 차근차근 발전시켜갈 것”이라고 소개했다.
“중국, 무조건 북한 편들지 않아”
본격 세션에서 나온 중국 전문가들의 발언들은 청중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한중관계가 이미 북중관계를 넘어섰다. 북중관계는 (이제) 정상적인 국가관계다.”(공커위 상하이 국제문제연구원 아태연구센터 부주임)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변화했다. 북핵 문제에서 (북한보다) 중국의 국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북한이 4차 핵실험을 한다면 중국 국익에 큰 도전이다. 중국의 대응은 앞선 핵실험 때와 다른 방식이 될 것이다.”(정지융 푸단대 국제문제연구원 한국조선센터 주임)
“중국은 남북한 정책에서 (북한에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추구한다.”(샤리핑 통지대 정치와국제관계학원 원장)
중국의 저명한 한반도 전문가들로부터 일제히 “중국의 대북정책이 변했다”는 말이 쏟아져나온 것이다. 주상하이총영사관 관계자는 “이들은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라 중국 당국에 정책을 제안하고 있어 중국 정부 내부의 기류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 학자들은 북중관계를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전통적 우호관계가 아니라 한중관계보다 결코 가깝지 않은 국가관계’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역할을 ‘남북 사이의 균형자’로 제시했다. 예전처럼 중국이 무조건 북한 편을 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1세션 ‘한반도 정세 변화와 중국’ 세션 사회를 맡은 김흥규 아주대 교수는 “중국 측이 중국판 한반도 균형자론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공 부주임은 “(중국과 남북한 간의) 등거리 외교라고 할 수 있다”며 “북한이 한 것은 다 잘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일(현안) 자체의 시비곡직에 따라 판단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주임도 “(중국이) 과거에 지나치게 (북한의) 안정 유지에만 집중했으나 중국의 외교 철학이 변했다”며 “북한 문제에서 감정이 상할까 봐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수세에 몰리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
류밍 상하이 사회과학원 국제관계연구소 상무부소장은 “(중국은) 그간 모든 문제에서 북한을 우선시했지만 최근 중요한 변화가 생겼다”고 강조했다. 그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북한이 먼저 취해야 할 것이 있고 그걸 하지 않으면 6자회담 자체가 의미가 없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방문한 것도(6자회담 재개를 위해 북한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런샤오 푸단대 국제문제연구원 교수도 “(중국이) 한반도에서 핵개발을 반대하는 입장이 더욱 명확해지고 단호해졌다. 북한에 대해 더 이상 모호하게 표현하지 않고 비난할 것은 비난할 것”이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한·중·러가 합동 군사훈련을 하자는 얘기까지 나왔다.
공 부주임은 “한국과 중국, 러시아 간에 안보 대화를 추진해야 한다. 중러 합동 군사훈련에 한국을 옵서버로 초청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류 상무부소장은 “한중 양국이 동지나해에서 합동 군사훈련을 할 수 있고, 러시아와 함께 한·중·러 3자 군사훈련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주임도 “한·중·러 안보협력을 매우 바라고 있다”며 비슷한 제안을 내놨다.
이는 중국이 한국을 한·미·일 군사안보동맹에서 이탈시켜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한다는 점에서 미국에 불편할 수 있는 제안이다. 한국 학자들은 “북한이 안보 위협을 느낄 수 있는 놀라운 제안”이라고도 평가했다. 중국 내부에서 북한은 이미 안보와 관련해 ‘눈치 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중국의 국익을 위해서는 ‘고려하지 않아도 될 변수’가 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 측은 중국 측이 설명한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에 공감하면서도 한중이 통일과 북한 문제에 대해 좀 더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대북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다”(한석희 연세대 교수), “시 주석의 방한 등 북한에 주는 메시지가 강렬했지만 중국의 대북정책이 실질적인 변화가 없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방형남 동아일보 논설위원)는 의견이 나왔다.
황지환 서울시립대 교수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중국은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국가’라고 보고, 중국 사람들은 ‘한국은 흡수통일을 원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간극을 줄이기 위해) 한중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는 “한중이 서로 상대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인식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줄여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포럼은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한 중국 전문가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중국 학자들의 표면적 평가는 “북한 권력은 안정돼 있다”였다.
정지융 주임은 북한 내부 상황에 대해 “굉장히 안정적이다. 내부적 리스크(위기)가 있지만 외부 침입이나 특별한 변고가 없다면 단기적으로 붕괴 가능성은 거의 없고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도 큰 혼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권력에서) 집단지도체제 개념이 좀 더 많아지고 (김정은) 일인독재체제보다 집단영도체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말한 점이 주목된다. 북한 권력구도가 김정은 혼자 결정하는 유일독재가 아니라 노동당 조직지도부 등의 집단적 결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는 최근의 한국 내 분석을 뒷받침하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정 주임은 “주민들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면서 주민들 사이에 종교와 무속신앙이 만연될 조짐이 있고 일부 비정부기구(NGO)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공커위 부주임은 “북한에서 내란이나 군사정변이 발생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면서도 “문제는 장성택 처형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중국이 매우 놀랐고 중국이 놀랄 정도라면 매우 우려할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에 가서 (북한 붕괴 등 여러 가능성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한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미중 간에 북한 붕괴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공 부주임은 “(북한 붕괴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중국이 군사력을 동원하는 상황은 없을 것이다. 유엔의 평화유지부대 등이 북한을 관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도 밝혔다.
중국과의 협력, 한미동맹 사이의 균형외교와 과제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임명된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북한군 총참모장으로 있던 2012년 7월~2013년 7월 장거리미사일 발사와 3차 핵실험이 있었다”며 “현영철이 득세할 때마다 남북한 간의 긴장이 격화된 만큼 올해에도 북한의 대대적 군사공세가 진행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북한이 내년에 동창리 로켓 발사장 기지의 확대 건설이 끝난 이후 장거리로켓 발사와 4차 핵실험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번 포럼에선 박근혜정부가 표방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의 균형외교론에 대해 중국 학자들이 부정적 인식을 드러내며 한중 간 인식 차가 도드라지기도 했다.
션딩리 푸단대 특임교수는 “한국이 추구하는 안보는 미국과 연계돼 있어 한국은 반드시 미군에 안보를 의존하게 됐다”며 “한국은 외교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한국도 조금씩 미국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한미 안보동맹이 중국의 국익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한국의 생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이 한미 안보동맹의 우산 안에 있는 한 중국이 보기에 한국의 균형외교는 실현되기 어렵다며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
중국에서 새로운 리더십이 등장한 이후 부쩍 한국에 신경을 쓰는 속내가 ‘한국을 미국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한 것’에 있음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된 것이다. 북핵 해결을 위해 중국의 협력이 절실한 한국 정부로서는 중국의 이런 속내와 한미동맹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아나갈지 큰 숙제를 떠안은 셈이기도 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중국도 민족주의적 발상으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질서를 (다른 나라에) 강요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런 20세기식 냉전적 사고,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말미암아 동북아에서 불협화음이 나타나고 갈등이 증폭되는 걸 한국 정부가 우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