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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호 > 통일 고리

통일 고리 / 이주 150년 고려인과 통일

이주 150년 고려인과 통일
고려인, 글로벌 코리안 사회의 기반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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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한 32명의 고려인 랠리 팀이 8월 16일 평양과 개성을 거쳐 경기 파주시 경의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러시아 국적 고려인들이 자동차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한반도를 관통한 것은 역사적인 일이다. 이들 고려인은 누구인가? 이주 150년이란 무엇인가? 통일 준비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에서 고려인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본다.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맞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한 고려인 32명이 8월 16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파주로 들어왔다. 역사적인 일이다. 7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해 한 달 넘게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고, 북한에 들어와서 한반도 종단을 시작한 통일 랠리 팀은 부산까지 이어지는 랠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통일을 이룰 희망과 의지를 한반도에 전파했다. 김 에르네스트 니콜라예비치 고려인 랠리 팀 단장은 “우리 팀이 역사상 처음으로 북에서 남으로 휴전선을 넘었다”면서 “우리의 이 조그마한 노력이 조금이나마 한반도의 통일과 동아시아의 평화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주 150년이 된 고려인들의 통일 생각은 이와 같다.

이들 고려인은 누구인가? 왜 고려인이라고 불리는가? 이주 150년이란 무엇인가? 한반도의 우리는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 중 한 그룹인 고려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1990년대 초 러시아와 수교하기 전까지 공산국가인 소련에 거주해 실질적으로 우리와 교류가 없었고, 1990년대 이후로는 소련 붕괴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그곳에 사는 고려인들이 또다시 이주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큰 장애는 대다수의 고려인들이 우리말과 글을 모른 채 러시아식 이름을 가지고 있고, 문화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서 한국인들에게 접근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번 광복절을 맞아 고려인 랠리 팀은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을 통해 우리에게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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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와 재이주, 고난으로 점철된 고려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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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월 16일 입경 직후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에 참가한 대원들이 내빈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는 공식적으로 150년 전에 시작된다. 1863년 지금의 연해주 지역의 우리 국경 근처 마을인 포시에트의 지신허 마을에 13가구가 이주했다는 러시아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우리 민족과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연관이 깊은 지역이다. 발해의 유적이 연해주에 널려 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만주처럼 우리 민족의 생활권에 속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만주에서 유지되던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중국(청나라)과 러시아의 국경이 현재와 같이 확정되면서 나뉘게 된다. 즉, 두만강 하구의 건너편이 훈춘과 포시에트로 중국령과 러시아령으로 나뉜 것이다. 그러니까 지신허의 우리 민족은 당시에 한반도의 함경도에서 이주했다기보다는, 새로 영토를 얻은 러시아의 국경수비대에 의해 ‘발견되어 기록된’ 것이다.

어찌되었든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들어오면서 새롭게 러시아 영토가 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조선 사람들은 러시아의 신민이 될 처지에 놓였다. 1860년대 말 한반도를 휩쓴 대기근으로 함경도에 살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했다. 당시 연해주에만 1만 명이 넘는 조선 사람들이 이주했다. 이들이 곧 현재의 조선족과 고려인의 조상이 된다.

갑자기 얻은 땅을 경작하는 데 노동력이 필요했던 러시아는 조선인들을 막지 않았다. 1894년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더욱 많은 조선인들이 러시아로 몰려갔다. 탄광의 노동자로, 농부로 그리고 어부로 이주한 사람들의 수는 1902년 이미 3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00년대 초반 연해주는 이들 러시아화한 사람들 외에 의병으로, 독립운동을 하러, 또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몰려든 신조선인 이민자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斷指)동맹을 한 곳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러 출발한 곳도 이곳이며,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많은 의병의 투쟁이 일어난 곳도 연해주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서울거리(세울스카야)에는 신한촌이 세워질 정도로 조선인들의 집거지로 발전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의 조선인 수는 6만4000명을 공식적으로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과 1차 세계대전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1918년 연해주에 진주하면서 4년여 점령 기간 동안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은 신한촌 학살과 우수리스크 학살로 이어졌다. 1923년 이곳을 점령한 소련은 25만 명의 고려인(고려사람)들을 사회주의화시키는 집단농장 작업을 시작하고, 고려인들은 여기에 적극 협력하게 된다. 러시아어에서 ‘카레이스키’로 칭해지면서 남자는 카레이츠, 여자는 카레얀카로 불리고, 그 결과 조선인들도 스스로를 ‘코레(코레)사람’이라 부르면서 드디어 고려인이 된 것이다.

고려인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30년대 초 이미 대다수의 지식인과 공산당 간부가 총살되거나 숙청되어 시베리아로 끌려갔고,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에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스파이가 될 것을 두려워한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수모를 겪었다. 19만여 명이 어느 날 갑자기 화물열차에 실려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에 내버려지게 된 것이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고려인들은 정치사회적 권리가 제한되는 범죄자 취급을 받으면서 민족교육의 금지는 물론 언어의 사용도 제한되는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하지만 이후 새로운 중앙아시아에서 특유의 근면성과 우수함으로 주류사회에 진출했다. 주류사회에의 진출은 곧 러시아화를 의미했지만 사실상 고려인들에게 선택권은 제한돼 있었다. 하지만 우수한 집단으로서 러시아화한 고려인은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의 각국이 독립하면서 민족주의 정책을 추진하자 다시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현지 언어를 모르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이 살길을 찾아 러시아로 우크라이나로 혹은 다른 도시 지역으로 재이주하면서 고려인 공동체는 급격하게 해체된다.

이런 위기의 순간에 대한민국이 이들 고려인과 새로운 접촉을 시작했다. 러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 각국과 수교를 맺은 한국은 55만 고려인들에게 동포애로써 관심을 기울였다. 1990년대 말 재외동포법을 통과시키면서 고려인들의 한국어 및 한국 문화 등 민족 정체성 부활을 위한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고려인 단체와 한국 내의 대학, 기업은 물론 시민단체까지 포함하는 민간 교류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특히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맞이한 지난 2004년에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이주 14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고 새로운 교류 방식을 모색했다.

고려인 네트워크 구축, 통일외교에 큰 의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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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8월 16일 입경 직후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에 참가한 대원들이 내빈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고려인들의 삶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러시아는 물론 중앙아시아 각국의 주류사회로 진출해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있는 차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층과 여전히 이주와 재이주를 통해 난민화돼가는 고려인이 그것이다. 한국은 엘리트층과의 교류를 외교통상부 산하 재외동포재단의 차세대 대회나 한상대회 등을 통해 확대하면서 동시에 난민화돼가는 고려인을 지원하는 정책을 함께 추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의 재정착을 지원하는 것은 물론, 한국으로 들어와 일할 수 있도록 방문취업제 등을 통한 입국의 기회를 열어놓은 것이다. 현재 경기 안산시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각각 수천 명씩 집단 거주하면서 새로운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 고려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3만 명에 이르는 이들 고려인에 대한 맞춤형 정책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55만 고려인들의 역할은 무시할 정도인가? 이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과 역할은 무엇인가? 먼저 지적할 것은 통일 과정에서 재외동포의 역할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 세계는 국경을 넘어 네트워크화하고 있고, 가능한 한 자신들의 모든 자산을 네트워크화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이다.

초강대국인 미국에서 인구의 3%에 불과한 유대인들은 미국 내 주요 산업의 40%를 장악하고, 글로벌 차원에서 모국인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화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외교와 관련해 재외동포의 역할을 부각시킨 역사적인 사건은 위안부 소녀상의 설치와 동해 병기 노력이다. 정부가 할 수 없는 일을 재미동포들이 해낸 것이다. 과거 식민지가 된 조국을 구원하려고 독립운동을 벌였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고려인 동포들이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는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우리 기업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의 투자, 무역, 통역이나 합작 등의 과정에서 고려인들이 노동력 제공 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특히 공공외교에서의 역할도 증대하고 있다. 한국에 호감을 가지고 한국의 브랜드를 높이는 역할을 현지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경제·문화 영토를 넓히고 글로벌 한민족 네트워크를 만드는 기반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은 통일준비위원회를 발족해 통일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통일 준비 과정에서 고려인 동포들의 역할은 통일 후 한국이 추구하는 비전인 글로벌 코리안 네트워크의 토대가 된다. 국내 문제가 국제 문제화하고, 국제 문제가 쉽게 국내 문제가 되는 글로컬(Glocal) 시대, 또한 국경을 넘어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일상화돼 있는 글로벌 시대인 지금 통일 문제를 남북한의 그리고 한반도만의 좁은 틀에서만 검토한다는 것은 기본은 될지언정 전체를 보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미래 비전으로서 통일된 글로벌 코리안 사회가 지구촌에서 역할을 하려면, 내외동포를 아우르는 새로운 국민과 민족의 개념을 모색하고 이에 근거한 진정한 통일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통일 준비 과정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역할은 지대하다. 이미 유라시아 자동차 대장정(랠리)을 통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실질적 실현을 위한 역할을 수행했다. 랠리 팀 단장의 말처럼 고려인의 조그마한 이런 노력이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photo 이진영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연세대 정외과 졸업. 런던 정경대(LSE)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재외동포재단 자문위원, 민주평통 자문위원, 재외한인학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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