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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말하다 | Today 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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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7년 추석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는 정부의 대북식량 차관이 진행되던 시기로 나는 남한을 대표하여 일행과 함께 5박 6일 일정으로 국내산 쌀 1만1천여 톤을 싣고 북한의 남포항으로 출장길에 올랐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해 9월 17일에 출발하여 9월 23일 즉, 추석 이틀 전에 돌아오는 일정이었다(2007년 추석은 9월 25일). 그러나 태풍의 영향으로 바람과 비가 연일 계속된 데다가 북한의 전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싣고 간 쌀을 하역하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면서 북한에서의 일정은 지연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우리 일행은 생각지도 못하게 북한에서의 추석을 맞게 되었다.

그때 나의 메모는 북한의 추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추석날 아침 북측은 차례상을 준비해 주지 않았고 우리 일행을 위해 아침상을 준비해 주었다. 남한이라면 송편에 토란국이 올라왔을 것이다. 어제 아침상과 다름이 없고 다만 떡 한 접시가 평소와 다른 날임을 알려주었다. 이 떡을 준비하기 위해 아침이 늦어졌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묶는 숙소에서 떨어진 곳에서 해오느라 늦어졌다는 것이다. 준비된 떡이 한 접시뿐이어서 우리 일행이 나누어 먹기에도 부족했다.

북한에서의 추석은 생경했다. 남포라면 직선거리로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거늘 추석이라는 상징적인 날의 느낌은 아주 먼 곳에서 낯선 하루 같았다. 그저 지금 기억에도 ‘집(남한, 서울)에 가고 싶다, 가족이 보고 싶다. 오늘 모든 가족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겠지......’ 하는 마음뿐이었던 것 같다.

추석은 민족의 명절이다. 남한에서야 줄곧 추석명절이 이어져 왔으나 북한에서는 최근 다시 부활하였다. 1967년 북한은 민속명절 중 양력설만 남기고 ‘봉건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추석, 한식, 단오 등을 없앴다. 1972년 남북대화가 진행되고 이산가족들이 북한에 남겨둔 조상묘의 안부를 물어오면서부터 성묘를 허용하기 시작하였고, 1989년에는 음력설, 한식 등도 민속명절로 지정하였다. 2003년 김정일은 양력설 대신 음력설을 기본명절로 하고, 단오와 추석은 예전의 명칭인 수리날과 한가위로 부르라는 지시에 따라 다시 생겨났다. 상황이 이러하니 북한에서의 추석은 남한과 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남한에서는 추석을 3일간의 연휴로 지정하고 있지만, 북한은 추석 당일 하루를 휴일로 지정한다. 추석에는 누구나 고향 생각을 한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은 고향을 찾아가고 조상의 묘에 성묘하고 예를 갖춘다. 그 길이 멀어도 마다 않고 찾아가는 것이 추석 명절의 풍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일간의 연휴가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고향 가는 풍경은 흔치 않다. 하루 휴일로 먼 길을 가기도 어렵고, 교통수단이 좋은 편도 아닌 이유도 있겠다. 북한은 거주 이동이 보편화된 사회가 아니다 보니 주로 친인척이 인근에 산다고 한다. 따라서 조상의 묘도 자연스레 집에서 가까운 곳에 두고 있다.

남한은 추석 당일 집에서 정식으로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성묘를 가서 약식으로 예를 올리는 것이 보편적이다. 반면 북한은 집에서 차례를 따로 지내지 않고 바로 성묘하는 것이 특징이다.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기 때문에 주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한다. 가족이나 친척들은 묘지에서 모여 차례를 지내고 전날부터 정성스레 마련한 음식을 나눈다. 주로 그 해 난 과일과 곡식을 쓰는 것이 원칙이다.

남한은 추석 차례를 종가집에서 지내지만, 북한에는 종가문화가 없다. 그러니 일가친척이 모여서 추석을 보내는 일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가족 단위로 조상의 묘가 있는 산을 찾아가는 정도이다.



추석의 대표 음식은 송편이다. 북에서도 송편을 먹는지 궁금하다. 내가 북한에서 추석을 맞았을 때 북측 대표단에 “추석 음식과 추석 차례 상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북측 대표단은 “(북에서는) 개인집에서(개인별로)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차례상을 준비해 줄 수는 없고 떡을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그 떡을 송편이라고 하지는 않았다(위 사진). 남한의 절편에 가까운 모양의 떡이다. 쫄깃함은 덜하고, 안에 소가 없다. 반달모양으로 동글납작하게 빚고 겉은 빗살무늬 문양을 내어 만들었다. 하나하나 손길이 느껴졌다.

북한에서도 추석이 되면 씨름, 그네뛰기, 달맞이, 소놀이, 강강수월래 등을 남한과 같이 즐긴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이탈주민에 의하면, 대다수 북한주민들은 민속명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주민들은 민속명절을 진정한 명절로 생각한 적이 없고, 명절이라고 특별한 놀이를 했던 기억이 없다고 한다.

우리 민족에게 추석은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친다. 행복한 마음으로 과일과 곡식을 거두고 정성스레 조상께 감사를 표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추석이라는 민속 명절이다. 시대가 바뀐 오늘날에도 추석은 여전히 고향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 풍습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하루 휴일로 간소화된 추석, 오전에 산에 올라가 성묘를 하는 정도이다. 허례허식을 타파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내면에는 북한의 악화된 경제상황의 영향도 크다 할 것이다.

추석이 다가온다. 내가 북한에서 추석을 날 때(한 번에 불과했지만) 고향과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쌀 하역작업이 늦어져 단 며칠 귀경행이 늦어질 뿐인데도 밤마다 눈물을 글썽이며 가족을 보고 싶어 했고, 보름달을 바라보면서는 또 얼마나 기도했던가......
북한이탈주민에게도 추석은 그럴 것이다. 북한의 추석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는 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곳에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족과 친지와 함께 추석을 보내고 싶을 것이다. 2007년 내가 북한에서 추석을 보낼 때 고향에서 가족과 같이 추석을 보내고 싶었던 그 간절하고 절실했던 마음과 같이......

<사진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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