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더운 날엔 헨델의 수상음악(Water Music)도 좋고 트럼펫과 같은 브라스 곡, 그리고 목관악기 곡을 들으면 시원하죠.” 오후 1시, 시내에서 만난 바리톤 김동규(상명대학교 석좌교수) 씨는 바쁜 일정으로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지만, 특유의 중후한 목소리에 경쾌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가을공연을 앞두고 오케스트라 편곡작업을 하느라 하루 많은 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고 가끔 밤을 새우더라도, 직접 만든 노래가 무대에 올라가고 멋지게 연주될 때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는 그는 더없이 충만한 열정으로 ‘인생의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가을이면 어김없이 자주 듣게 되는 노래가 바로 이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다. ‘세계적인 바리톤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성악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니면서도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와 같은 대중적인 곡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그가 정통클래식을 넘어 가요, 팝, 재즈, 샹송까지 모든 음악을 아우르는 크로스오버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 한국에 크로스오버라는 개념을 알린, 김동규 씨는 어렵고 딱딱한 클래식을 대중들에게 보다 친숙하게 안겨줬다.
“똑같은 노래를 계속 부르는 것보다는 늘 변화무쌍한 음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바흐부터 비틀즈까지 다 좋아하고, 대중음악이라도 제 나름대로 편곡을 해서 부르죠. 현재 김정호의 하얀 나비를 편곡중인데 저의 목소리, 저만의 스타일로 대중음악을 클래식하게 부르는 걸 좋아합니다.”
바리톤 김동규 씨는 최근 TV 예능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서 소탈한 ‘인간 김동규’의 모습을 보여줘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베르디국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입학·졸업하고 ‘꿈의 무대’로 꼽히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을 비롯해 유럽 등 세계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세계적인 성악가다. 그동안 지나온 여정 가운데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는지 묻자 그는 3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순수한 열정으로 음악을 배워나가던 학창시절, 둘째는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의 오디션에서 합격통지문을 받았을 때, 그리고 마지막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인생이 어떻게 변할진 모르지만 지금 후회 없는 인생, 아름다운 한 때를 누리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해요. 500년 전 음악부터 동시대 음악까지 하고 싶은 음악을 다 할 수 있고, 다양한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지식에 대한 이야기는 꼭 하고 싶어요. 중년이 되는 동안 나이만 먹은 줄 알았는데, 많은 지식이 나에게 들어와 있다는 충만감이 들죠. 그 다양한 지식이 음악에 대한 판단력을 좋게 만들어요. 사람들은 한 가지를 깊게 파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노! 그렇지 않아요. 결국 수백 가지의 음악도 모두 ‘음악’ 한 가지로 통합니다.”
김동규 씨는 잘 알려진 대로 성악뿐만 아니라 피아노, 색소폰, 드럼과 같은 악기 연주에 능하고, 모터바이크와 승마, 골프, 사진까지 다양한 취미활동을 즐긴다. 게다가 요즘에는 서예에 푹 빠졌다며, 힘찬 필치로 ‘群鷄一鶴’이라고 내려 쓴글씨를 보여줬다. “끊임없이 끝까지 도전하는 에너지, 특히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큰 에너지가 생겨난다”는 그의 말에, ‘도전본능’이란 이름을 붙여봤다.
그의 가장 큰 도전은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오디션’이었다. 김동규 씨는 20대 초반 3천 달러를 쥐고 유학길에 올랐다가, 베르디국립음악원을 졸업하던 해인 1991년에 베르디 국제성악콩쿠르에서 우승했고, 한국 성악가로는 처음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오디션을 통과했다. 당시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도 오디션에 합격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는 황무지 같은 곳에 가서 도전을 했고, 평생 준비한 것을 펼쳐 보이며 내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아 내가 이 정도 실력은 되는구나, 그걸 사회가 알아주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감이 넘쳤죠. 아주 큰 희열이자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어요. 그다음부터는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직업적인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 프로페셔널해진 거죠.”
이후 김동규 씨는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웨덴, 이스라엘 등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면서, 오페라의 본고장인 유럽 무대의 유명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했으며, 세계 유수의 지휘자, 성악가 등과 공연하는 등 10년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하지만 워낙 이른 나이에 데뷔를 했던 김동규 씨는 공연을 위해 유럽의 호텔방을 전전하는 생활에 회의를 느꼈고 이혼이라는 아픔까지 겪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심신이 지쳐 무대에 서는 것조차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때,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건 바로 한국 관객들이었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명해지고 음악을 하는 것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개인적으로 이혼이라는 삶의 무게도 너무 무겁게 느껴졌죠. 하지만 한국에 와 보니 나를 인간 그 자체로 사랑해주시는 관객들을 만나게 됐어요. 서양 무대에선 저를 음악인으로 보기 때문에, 공연이 끝난 뒤에야 박수를 보내곤 했지만, 한국에선 무대에 오르기 전부터 열렬히 환영해주시거든요.”
김동규 씨는 관객들이 자신에 거는 기대와 사랑이 큰 만큼, 매일 음악적인 노력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공부를 중요시하는 그는 ‘수업을 받다가도 어떤 음악이 떠오르면 당장 그 악보를 구하고, 기어이 가사를 찾아 외웠던 학창시절’ 그대로의 호기심과 배움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사실 어릴 땐 음악에만 빠져있었지 공부가 재미있는지 몰랐거든요. 편협된 지식만 익혔으니까요. 하지만 공부를 하다 보니 모든 게 연관이 있더라고요. 근본은 다 인간으로 통하죠. 음악가라고 악보만 보고 살 게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하나씩 채워나가다 보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요. 사는 게 재미있어져요.”
바리톤 김동규 씨는 매년 많은 무대를 선보이고 있으며, 평화 통일을 기원하는 음악회에서도 자주 관객들과 만났다. 2003년 평양농구대회 기념, 2004년 남북정상회담 기념 통일음악회에서부터 지난해 광복70주년 평화통일 콘서트까지, 다양한 무대에서 통일염원을 담아 노래했으며, 올해는 민주평통 평화통일홍보대사를 맡기도 했다. 김동규 씨가 생각하는 통일은 어떤 것일까?
“남과 북이 합치면 큰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텐데 참 안타깝죠. 제가 유럽에서 활동할 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활동을 마칠 때쯤 유럽이 EU로 하나가 됐어요. 모든 지역이 ‘자국’이 된 거죠. 그러자 행정이 아예 달라져 버렸어요. 일례로 유럽의 몇몇 특정 극장에는 법적으로 외국인이 설 수 없었는데, EU가 되면서 유럽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다 이용할 수 있게 허용됐어요.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된 거죠.”
김동규 씨는 통합 전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비자 등 서류 준비하는 일이 90%를 차지할 만큼 복잡했지만, 유럽연합이 되면서 비즈니스나 취업이 매우 쉬워졌다고 소개하며, “물론 단점도 있겠지만 통합으로 인해 그런 장점들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동서독을 가로막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던 날엔 바로 ‘아랫동네’인 이탈리아에 있었단다.
“난리가 났었죠. 무작정 망치를 들고 올라가서 담을 깨더니 차와 사람들이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거예요. 정말 신기했어요. 우리나라는 섬나라잖아요. 엄연한 반도인데, 북한을 통해 대륙으로 갈 수 없다는 게 말이 돼요? 고속도로가 뚫리고 철길이 열리면 얼마나 세상이 달라 보이겠어요. 단순히 교통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폭 자체가 넓어지는 거죠. 우린 지금 부부싸움 하는 거예요. 같은 언어, 같은 혼을 가진, 같은 나라 사람이잖아요. 생각만 바꾸면 금방인데, 그게 안 되는 현실이 정말 안타까워요.
김동규 씨는 보다 빨리 통일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북한 주민들이 바깥세상이 소식을 자주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부 정보를 자꾸 알려주다 보면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분명 변화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김동규 씨에게 음악가로서 통일이 되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은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외람된 얘기일지 모르지만, 제가 북한주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류 한류 그러는데, 한류 말고 북류를 타는 거죠. 북한주민들이 제 노래를 듣고 좋아해주면 통일 전후라도 제가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아요.(웃음)”
<글.기자희 / 사진.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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