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아(가명)는 7~8년 전 함께 남한에 도착한 동갑내기 상희(가명)와 오랜 친구가 됐다. 하지만 남한에서 생활하면서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두 친구. 영아는 엄마를 모시고 온 뒤부터 학업에 전념했고, 상희는 북한에 계신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사채를 썼다가 ‘돌아오기 쉽지 않은 길’로 가버렸다. 남한에 정착하기까지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을 헤아려보던 영아는 ‘남한에 와서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가 탈북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
여름방학은 학생들에게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어학연수나 대외활동, 여행 등 학기 중에는 엄두도 못 냈던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성형’도 그중 하나다. 영아는 대학교 1학년 2학기 첫 등교 날, 모르는 사람이 ‘언니’라고 부르며 말을 걸어와 깜짝 놀랐다고 했다.
“제가 나이가 많으니까 학교에서 ‘왕언니’라고 불리는데, 누가 ‘언니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누군지 못 알아보겠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성형을 한 거더라고요. 정말 의학의 힘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죠. 한편으로 한국은 성형수술을 너무 쉽게 한단 생각도 했고요.(웃음)”
미용도구 때문에 기겁을 했던 적도 있다. 신입생 때 선배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함께 모여 저녁을 먹던 날, 술이 몇 잔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맞은 편 친구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세상에. 눈썹이 하나 떨어져서 얼굴에 붙어있는 거예요. 너무 무서워서 ‘나 빨리 집에 가봐야겠다’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죠. 놀라서 심장이 활랑활랑 하더라고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남한에선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인조 눈썹 같은 게 있더라고요. 지금도 그 친구 볼 때마다 그때 이야길 하며 웃곤 해요.”
영아는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매일매일 학교와 병원을 왕복하다 보니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어 ‘언제 마지막으로 옷을 샀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겉으로만 화려한 삶’이 그다지 부럽지는 않단다.
“상희라는 친구와 남한 적응 교육을 받으면서 친해졌는데, 지금 걔는 정말 많이 변했어요. 탈북민은 남한에 와서 어떤 사람과 만나고 어울리는지에 따라 그 삶이 많이 바뀌는 것 같아요. 저는 확실히 인복이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루트를 통해서 안전하게 남한으로 올 수 있었고, 좋은 사람들만 만났으니까요. 하지만 상희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영아는 얼마 전에 상희를 만났다. 상희는 차를 새로 뽑았다며 자랑을 하더니 대뜸 영아에게 물었다.
“한국에 온 지 7~8년이나 됐는데 넌 (돈을) 얼마나 모았니?”
영아는 피식 웃었고, 그 웃음에 상희는 기분이 상했는지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좋다고 웃냐? (가진 것 하나 없는) 네가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러자 영아도 여기에 지지 않고, 뼈있는 말로 되받아쳤다.
“상희야. 솔직히 말해서 난 네가 부럽지 않은 것 같아. ‘가방끈’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네가 그동안 그만큼 돈을 모았다면, 나는 이만큼의 지식을 쌓았잖니. 우리 서로 좋게 보자.”
영아는 이상하게도 상희에게는 ‘나쁜 사람만 꼬인다’고 말했다. 아마도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 같단다.
“북한에서 나왔을 때, 상희가 도망친 걸 알고 안전원들이 순식간에 집에 들이닥쳐서 엄마 아빠를 다 잡아갔대요. 상희와 부모님이 통화한 걸 녹음해서 들이대니까 빠져나갈 수도 없이 걸려든 거죠. 엄마 아빠를 구해내기 위해 급하게 돈이 필요했던 상희는 사채를 쓰게 됐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쪽(유흥업소)으로 빠졌어요.”
덕분에 상희의 부모님은 풀려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북한에 계시고 상희는 돈을 갚기 위해 유흥업소에서 일하게 됐다. 처음에는 ‘빚만 갚으면 그만 둘 거야’라고 말했지만 쉽지 않은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무래도 그쪽 계통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도박, 술과 같이 안 좋은 것들을 가깝게 하는 것 같아요. 올바른 길로 가도록 충고해주고 싶었는데 잘 안 받아들여져요. ‘너 변했어’라고 말하면 자기는 ‘안 변했다’고 하지만, 뭔가 허황된 꿈만 꾸고 있는 것 같아 슬퍼져요.”
사실 영아는 많은 탈북민들이 그러하듯, 남한에 오기 전 중국 농촌 마을에서 엄마와 숨어 살면서 노동을 해야 했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었다.
“중국에서 살려면 농가에 얹혀살면서 일을 하거나 ‘시집’을 가야 돼요. 엄마는 제가 팔려가게 생겼으니까 ‘이제 겨우 열일곱인데 어떻게 보내느냐’며 사정사정해서 3년간 농사일을 했어요.”
하지만 경찰들이 닥칠 때마다 도망가기를 수차례, 두 발을 뻗고 잠들었던 날이 거의 없었단다. 설상가상으로 도망 생활 3년째 엄마에게 뇌경색이 발병했지만, 신분증이 없어 큰 병원에는 갈 수가 없었다.
“너무 시골이어서 의료시설이 안 좋았어요. 주사기를 꽂았는데 엄마는 깨어나지 못하셨고 공교롭게도 그 무렵 저만 남한으로 오게 됐죠. 하지만 엄마가 눈 뜨는 걸 못 봤는데 어떻게 제가 남한에서 편하게 있겠어요.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빨리 돈을 모을 생각밖에 없었죠.”
이 과정에서 영아는 종교의 힘을 빌리기도 했단다. 무연고학생이다 보니 특정 종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에서 생활했는데(42호 참조), 성가를 부르고 기도하는 일련의 종교의식들이 무섭게 느껴졌고, 북한에서 선교사가 ‘나쁜 사람’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종교를 갖지 않았던 영아였다.
“그런데 확실히 인간은 나약한 존재인 것 같아요(웃음). 알바를 하면서도 24시간 엄마 걱정밖에 안 드니까 저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되더라고요. 6개월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예배당에 나가 무릎 꿇으면서 기도를 했어요. 엄마를 무사히 데리고 오게 해달라고요. 지금은 안 다니지만 당시엔 매우 간절했기 때문에 큰 위안을 받은 것 같아요.”
이후 영아가 모아 보낸 돈으로 엄마는 남한에 올 수 있었고, 엄마는 비록 지금까지 병원생활을 하고 있지만 병도 많이 호전됐다. 예전엔 영아의 간병 없이 거동도 제대로 못 하셨지만, 작년 가을부터는 통원치료를 받으러 다니실 정도가 돼서 이젠 학업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게 됐다며 좋아하는 영아. 한창 꾸미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을 20대인데 병원과 알바, 학교 사이에서 쳇바퀴 도는 생활이 싫지 않았을까?
“제가 남한에서 공부 대신 일을 했다면, 지금보단 훨씬 여유 있게 살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엄마도 공부를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고, 저 역시 남한사회에서 영양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국가가 탈북민에게 대학등록금을 면제해주는 것도 투자인 거잖아요.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도 제 미래를 위한 투자였다고 생각해요.”
사실 영아는 법학 공부에 관심이 많고 적성도 맞아서 로스쿨에 진학한 뒤 법조인의 길을 가고 싶지만, 학비를 마련할 자신이 없어 그 꿈은 한쪽으로 미뤄놨다고 했다. 대신 공무원시험과 취업을 함께 준비 중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시야를 넓혀서 이것저것 많이 하고 있어요. 탈북민이 3만 명이나 되잖아요. 어차피 ‘탈북민’이라는 단어는 항상 제게 따라다닐 거고, 이왕이면 북한이나 탈북민과 연관된 의미 있는 직업을 갖고 싶어요.”
어린 나이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주어진 조건 안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힘찬 걸음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는 영아. 그녀가 바라는 것처럼 ‘가치 있는 일을 하는 멋진 사회인’이 되어 꼭 다시 만나보고 싶다.
<글.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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