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호 > 한·러 평화통일포럼
한·러 평화통일포럼
“한국과 러시아의 협력은 아시아의 남방과 북방의 경제권을 연결해 극동에서 그 번영의 꽃을 피우는 결정적 기제(機制)가 될 것입니다.”(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10월 25일(현지시간)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한·러 평화통일포럼’이 열려 양국의 협력 동반자 관계를 현실적으로 발전시키는 문제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 실현에 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이뤄졌다.
이날 포럼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했다.
김철중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9월에 개최된 한·러 정상회담과 10월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Initiative·계획 또는 발의)’ 발표 이후 양국의 협력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 특히 11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둔 시점에서 양국의 전문가들이 모여 한반도 통일과 한·러 경제협력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러시아’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날 포럼에는 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이 총출동했다. 한국 측에서 전성훈 통일연구원장, 고재남 국립외교원 교수, 홍완석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장 등 6명, 러시아에서 스베틀라나 수슬리나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 알렉산드르 페도롭스키 국제관계연구소(IMEMO) 센터장 등 6명, 총 12명이 발표와 토론자로 참여했다.
러시아 현지의 관심도 뜨거웠다. 포럼에는 고려인을 포함해 모스크바 대학 등 주요 7개 대학의 한국학과 학생 등 총 3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러시아의 소리’ 방송과 이타르타스통신 등 러시아 주요 언론들의 취재 경쟁도 뜨거웠다.
현경대 수석부의장은 이날 포럼 기조연설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의‘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신동방정책’이 만나는 접점이 바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 수석부의장은 한·러 협력이 한반도 통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에서 그동안 미국과 중국에 비해 후순위로 밀려 있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지녔다”며 “한·러 간의 경제 협력이 탄력을 받을수록 한반도 비핵화와 통일에 대한 러시아의 지지가 더욱 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위성락 주러시아 대사도 이석배 정무공사가 대독한 환영사에서 “한·러 양국 간 모든 레벨에서 전략적인 소통이 필요하고, 이번 포럼을 비롯해 양국의 협력과 소통의 공간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첫 번째 세션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 실현 과제’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러시아 현지 사회에 한반도 정세를 알리고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였다. 학계나 주요 인사가 러시아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반도 통일 문제에 대해 알리고 토론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세션 발표자로 나선 전성훈 통일연구원장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인도적 지원, 교류 증진, 경제공동체 건설 등으로 나눠지지만 이것이 순차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만 3단계에 대한 합의와 이행이 이뤄지려면 남과 북의 충분한 신뢰가 쌓여야 하고 북한 비핵화에도 의미 있는 진전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지 동포사회와 언론, 뜨거운 관심 보여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도 안에서 한·러 협력의 의미도 설명했다. 전 원장은 “박근혜정부는 동북아 평화협력을 도모하는 유라시아 외교를 전개하고자 한다”면서 “남·북·러 협력은 한국의 경제적 진출뿐 아니라 북한을 동참시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구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안드레이 이바노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선임연구원은 “박근혜정부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는 것에 대해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어 “다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칼의 양날’ 같은 성격이 있어 북한 체제를 압박하는 것보다는 평화 구축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바노프 선임연구원은 “과거 중국이 개방정책으로 전환할 때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좋았을 시점”이라며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에 의해 2000년대 이후 시작된 북한의 개혁이 중단되거나 지체되는 면도 있다”고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이날 행사장을 가득 메운 일반 참석자들은 포럼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평소 한국 정부의 통일정책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던 현지 대학생과 고려인에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러시아 고등경제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인 예차테리나 씨는 “한국 정부 관계자의 설명을 들으니 남북 분단의 현실을 실감하게 됐다”면서 “졸업 후에 한·러 경제 협력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 정착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양국 전문가들은 한·러 양국 사이의 경제 분야 등 양국 교류가 활발해질 수 있는 분위가 마련됐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특히 한반도와 시베리아를 잇는 철도 연결 등 과거부터 논의돼온 양국의 숙원 사업들을 현 정부가 해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이날 포럼에 참석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실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남북을 관통하는 가스관 대신에 동해 해저에 가스관을 묻는 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10월 18일 유라시아를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민주평통 측은 이날 포럼장에서 박 대통령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안한 연설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배포하기도 했다.
“본격적인 한·러 협력 분위기 조성돼”
두 번째 세션인 ‘20103년 한·러 정상회담 이후 양국의 협력 방안’이라는 주제로 발표에 나선 홍완석 소장은 “남·북·러 경제 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려는 한국과 극동 및 시베리아 개발에 의욕을 보이는 러시아의 생각은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말했다. 특히 태평양지역에서 영향력을 높이려는 러시아에게는 중국과 일본처럼 영토 분쟁 소지가 없는 한국이 최적의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러시아 학자들도 한·러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공감했다. 페도롭스키 센터장은 “한국과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 문제뿐 아니라 동북아 안정을 위해서 서로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한·러 협력에 대해 종합적인 분석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가 무르익었고, 여기에 양측의 정부, 기업, 전문가집단이 함께 참여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제빈 극동연구소 한국연구센터장은 “미국과 중국은 북한을 자신의 세력 밑에 두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일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며 “주변 강대국 중 러시아만이 남과 북과 함께 공통의 행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러가 공동 이익을 낼 수 있는 경제 협력 사업에 나서고 북한이 여기에 동참한다면 한반도 평화 정착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과 러시아가 1990년 수교한 이후 양국 관계는 꾸준히 발전해왔다. 특히 2008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을 계기로 양국은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외교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홍완석 소장은 “사실상 양국 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는 아직까지 ‘외교적 수사(修辭)’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서 “미·중·일·러 등 한반도 주변 4강 중 한·러 관계가 제일 취약하고 안정감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날 전문가들은 한·러 관계가 빠르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분석을 내놨다. 홍 소장은 “러시아는 남북한 분단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얻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하고, 한국은 미국 중심의 외교전략에서 탈피해 러시아와 중국을 고려한 외교적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북핵 문제, 냉전시대 사고방식 등 해결해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0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남북을 관통하는 가스관 대신에 동해 해저에 가스관을 묻는 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10월 18일 유라시아를 ‘하나의 대륙’, ‘창조의 대륙’, ‘평화의 대륙’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와 관련해 엄구호 한양대 러시아학과 교수는 “이제는 ‘미국·한국·일본’ 대 ‘중국·러시아·북한’의 대립에서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의 의견을 존중하고 공동의 이익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의 드미트리 라빈 교수가 ‘한국 주도의 통일이 러시아 국익에 맞다’고 주장한 것을 인용하며 “한국에게 러시아는 경제 발전과 통일 문제에 있어서 미래이며, 한국은 러시아가 아시아·태평양지역 핵심 국가로 재도약하는 데 가장 중요한 파트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러 관계를 가로막는 요인 중에 하나인 북핵 문제에 대한 언급도 많았다. 페도롭스키 센터장은 “한·러 협력을 추진하는 데는 한반도의 안정이 가장 중요한데 북한은 핵 개발에 몰두해 있다”면서 “구 소련 역시 핵폭탄과 미사일이 있었음에도 붕괴를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북한의 전략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 한국과 러시아가 우선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분야는 경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2부 세션의 사회를 맡은 수슬리나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는 “한·러 양국이 좀 더 확대된 상황에서 전략적인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면서 “한국이 중국, 일본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논의 중인데 러시아도 이 과정에서 밀려나 있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엄구호 교수는 남·북·러 3각 경제 협력에 대해 “핵에 몰두한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3국이 경제 분야에서 협력해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논의되는 철도, 가스관, 전력망 연결 등을 패키지로 묶어 진행해야 한다. 당장 북한의 협조가 어렵다면 한·러가 극동지역 개발부터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변화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현재 추진 가능한 사업부터 적극적으로 벌여나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루드밀라 자하로바 극동연구소 연구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말하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남북 협력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철도 연결도 현재 시범구간 성격인 러시아 하산∼북한 나진 구간(54km) 구간이 완성됐고 올해 말에는 나진 항구에 터미널도 개통될 예정”이라며 “가스관도 논의가 많이 돼온 만큼 3국이 조금만 의지를 보이면 이러한 사업들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