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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지난 11월 박근혜 대통령이 제안한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일본은 환영, 미국은 지지, 중국은 유보의 태도를 나타냈다. 당장은 어렵더라도 우리는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와 정례화를 위해 중국과 일본을 끝까지 설득하는 한편, 다자외교와 중진국 외교를 병행함으로써 변동기의 동북아 정세 속에서 우리의 안보와 번영을 확고히 지킬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11월 11일과 13일 중국 베이징과 미얀마 네피도에서 연이어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와 동남아국가연합(ASEAN) 10개국과 동북아의 한국, 중국, 일본의 정상들이 함께 만나는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가하는 동안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했다.
박 대통령의 이 제안에 대해 일본은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고,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중국은 외교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일본이 성의를 가지고 인근 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기 바라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제시하며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즉, 한·중·일 정상회담 재개를 위한 분위기가 아직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의 반응이다.
이에 따라 3국 외무장관 회담의 사전 개최도 어려워졌고, 2015년 초로 예상됐던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도 불투명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한국 정부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러한 상황이 초래됐으며, 조만간 이 상황이 바뀔 가능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한·중·일 정상회담 조기 개최 불투명
동북아 3국 정상들이 자리를 함께하는 한·중·일 정상회담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연례적으로 일본, 중국, 한국 순서로 돌아가며 개최됐다. 정상회의에 앞서 한·중·일 외무장관 회의도 연례적으로 열렸다. 정상회담을 위한 의제 조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고, 일본의 아베 정권 등장과 더불어 한국, 중국과 일본 사이의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면서 2013년 우리나라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한·중·일 정상회담과 외무장관 회담이 모두 무산됐고, 2014년에도 역시 개최되지 못했다. 차기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를 담당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책임감이 박 대통령으로 하여금 3국 정상회담 개최를 제의하도록 만든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베이징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일 간의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북한이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해 북·러 관계 개선을 도모하고 미국 인질들을 석방하는 화해 제스처를 취하는 등의 한반도 주변 정세의 변화도 우리 정부가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 카드를 꺼낸 이유라고 분석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 및 북한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며 이들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 오히려 우리의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우려가 우리 언론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것도 한몫했다.
여기에 한일관계 회복을 원하는 미국의 입김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미국은 한일관계의 악화가 미국 중심으로 한·미·일 동맹관계를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전략에 차질을 빚고 있고, 심지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 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2014년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3차 핵안보정상회의 때 오바마 대통령이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3국 정상회담 형식을 빌려 같은 자리에 앉게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통해서라도 한일 정상이 자리를 함께하고, 한국·중국 대 일본 사이에 형성된 현재의 갈등 구도가 완화되는 것이 미국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중·일의 각각 다른 셈법
이 시점에서 왜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가 불투명한지 중국, 일본, 한국의 순서로 각국의 입장을 검토해보자.
우선 한·중·일 정상회담에 가장 소극적인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표면적으로 중국은 영토 및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일본의 침략과 식민 지배의 과거를 들추어내며 일본을 압박해왔다. 일본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한·중·일 정상회담을 개최해도 3국의 관계 개선은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중국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계산해보면 지금과 같은 대립 구도가 불가피하기도 하고 오히려 이로부터 중국이 이득을 본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동지나해와 남지나해로 뻗어가고 있는 중국의 국력 팽창은 불가피하게 일본 및 동남아 주변국들 그리고 결국 미국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어차피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일본과의 마찰을 불사하고 일본을 압박함으로써 중국은 자국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계산할 수 있다.
사실 중국은 하나하나 실익을 챙기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ADIZ)을 동지나해의 대부분을 포괄하는 영역으로 확대했는데, 확대된 영역의 대부분이 일본의 방공식별구역과 중첩된다.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일본의 실효적 지배를 훼손하는 행동을 계속해온 중국은 이번 베이징 중·일 정상회담 때 합의한 4개항에서 센카쿠 열도가 중·일 간의 분쟁지역이라는 일본의 인정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이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에 적극적으로 임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설사 개최에 동의하더라도 일본을 더욱 압박하는 자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박 대통령의 제안을 즉각적으로 환영했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있는 지금의 갈등 구도를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되면 최소한 일본 국내 정치적으로라도 아베 총리의 외교정책이 낭패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아베 총리도 과거사나 영토 문제와 관련해 양보할 뜻이 없음이 분명하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 그러하다. 오히려 아베 총리는 평화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정상적인 군대를 가지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일본도 어차피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 및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돼 아베 총리에게 외교적 부담이 되는 것만 차단하려 한다고 볼 수 있다. 중·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4개항에 대한 해석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크게 차이 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은 한·중·일 정상회담을 환영하지만, 인근 국가들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실질적 내용보다 3국 정상들이 만난다는 외교적 효과에만 더 관심이 있다.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한 우리나라의 처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일본과의 냉랭한 관계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중국에 어부지리를 안겨주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 회복에 나서기도 어렵다. 박 대통령도 언급했듯이, 과거사 문제나 독도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한일 정상이 만나봤자 곧바로 역풍이 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일관계 악화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도 없다. 일본이 워싱턴에서 한국의 친중적 태도를 거론하며 반한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 사이의 마찰이 점점 고조될 가능성이 높은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외교적 진로가 미·중·일과 같은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타율적으로 결정되는 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도 없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나라의 주체적이고 주도적인 외교가 필요하다.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지금의 동북아 정세가 우리의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자칫 잘못하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주변국 벗어난 다자외교와 중진국 외교 필요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되도록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제안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북아의 평화협력을 바라고 주변국들과 모두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선 한·중·일 정상회담은 유용한 도구이기도 하다.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되려면 중국과 일본을 설득해야 하는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두 강대국은 양국 사이에 그리고 동북아 지역에 갈등이 고조되더라도 자국의 이익을 취하려 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되고 동북아에 평화협력이 진척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우리나라의 외교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일본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을 활용하고, 중국을 설득하기 위해 강화된 한중관계의 자산도 활용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개최되는 한·중·일 정상회담은 다분히 형식적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개최돼야 한다. 민감한 이슈들은 피해가더라도 한·중·일 사이에 협력을 위해 논의할 사항은 매우 많다. 이렇게 해서라도 한·중·일 정상회담의 정례화가 회복되는 것이 우리나라에 유리하다.
둘째, 우리나라도 이제 우리 외교의 목표와 원칙을 분명히 하고 우리의 국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쳐나가야 한다. 점증하는 미·중 갈등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주장하고 우리의 노선을 정해서 한국 외교를 추진해나가야 한다. 예컨대, 우리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미국과의 동맹관계 강화에 도움이 되는 일은 중국의 반대가 있더라도 추진해야 하고, 우리의 경제적 이익이 증대되는 일이라면 미국의 반대가 있더라도 중국의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
물론 안보든 경제든 우리가 생각하는 원칙과 방법에 합당할 때에 받아들여야 한다. 예컨대,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는 중국 견제가 아니라 대북 억지력을 증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돼야 하고,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 가입은 이것이 중국의 대외정책 수단이 아니라 역내의 다자적 기구로 발전하도록 유도하면서 추진해야 한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이 결실을 보기 위해서도 우리는 원칙 있는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강대국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이익을 지켜나갈 수 있다.
최근 정부가 중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다자외교나 MIKTA(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오스트레일리아의 영문 명칭 약자)와 같은 중진국 외교는 우리 외교가 나아갈 좋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외교도 이제 한반도와 주변 지역의 틀을 벗어나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변동기의 동북아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안보와 번영을 모두 확고히 지킬 수 있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