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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중국 : 스탈린의 마오쩌둥 제압 전략>

6·25는 미·중 견제하려는
스탈린의 음모로 촉발

COVER STORY
<사진> 이세기 회장의 저서는 획기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다.

6·25전쟁은 그 결과와 영향만큼이나 큰 대가를 치른 전쟁이었다. 이토록 참담한 비극을 초래한 6·25전쟁은 누가, 무엇을 위해 일으켰는가를 분석한 책이 출간되어 눈길을 끈다.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이 쓴 <6·25전쟁과 중국 : 스탈린의 마오쩌둥 제압 전략>이 그것이다.

문대근 북한학 박사

1990년 이후 공개된 문서들을 치밀하게 교차·분석한 연구서들이 나오면서부터 6·25전쟁 연구의 새로운 진화와 전환이 이뤄졌다. 이로써 우선 그동안 가설이나 추론의 성격이 강했던 각종 이론과 주장들이 정리되었다. 실제로 북한을 제외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전쟁 당사국들은 6·25전쟁이 스탈린의 세계 전략의 일환이었고, 스탈린의 직접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중국의 동의하에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사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에 깊숙이 개입한 소련은 북한의 무력을 형성·강화시켜 6·25전쟁을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며, 휴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따라서 그동안 제기되었던 북침설과 남침유도설 등 수정주의적 입장은 설득력이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은 한반도 내의 좌우 갈등과는 별도로 ‘스탈린의 남침 승인과 중국의 소극적인 사후 동의 아래,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6·25전쟁 발발의 주체 문제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이후 문제는 스탈린이 무엇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6·25전쟁과 관련해 기존 상식과 지식을 뒤집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이 쓴 <6·25전쟁과 중국 : 스탈린의 마오쩌둥 제압 전략>이 그것이다. 35년 전 자신의 학문적 추론을 1990년 이후 공개된 많은 비밀문서와 자료들을 종합·정리해 그 논거를 더욱 새롭게 보강한 이 책은 한국에서 6·25전쟁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정도로 획기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누가 총을 먼저 쏘았는가’의 문제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고, 전쟁을 계획한 소련이 왜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켰고, 중국은 왜 참전했는가를 분석하며 6·25전쟁의 기원과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중·소 간의 국가 이익 충돌이 낳은 비극의 전쟁

저자는 6·25전쟁은 미·소 양 진영 간의 냉전적 대립구조가 아니라 중공혁명의 성공과 얄타체제의 붕괴 과정에서 불거진 중·소 간의 국가 이익 충돌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6·25전쟁의 ‘불씨’는 1950년 1월을 전후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모스크바 중·소 동맹조약 협상 과정에서 잉태한 것으로 본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마오쩌둥의 장시간 모스크바 여행이었다. 마오쩌둥은 신중국 수립(1949. 10. 1) 75일 후인 1949년 12월 16일부터 1950년 3월 4일까지 장장 70여 일 동안 베이징을 비우고 모스크바에 있었다. 새로운 중·소 동맹조약 체결이 쉽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국의 국가수반이 그토록 많은 시간을 타국에 체류한 것은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협상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는 것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 간의 험난한 협상 과정에서 나타난 장시간의 교착(1949. 12. 16~1950. 1. 5)과 협상의 재개(1. 6), 미국의 애치슨 선언(1. 12)과 소련의 신중국 유엔 가입 방해 및 유엔 안보리 보이콧 시작(1. 13), 스탈린의 김일성 남침 승인 청신호(1. 30) 등은 6·25전쟁의 기원과 관련해 주목되는 사건들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6·25전쟁을 결심하게 된 시점이 그가 마오쩌둥과 한창 협상 중일 때인 1950년 1월이었다는 점이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50년 4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승인하면서 조건을 다는데, 그것은 “마오쩌둥을 찾아가 전쟁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라. 그가 반대하면 남침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규명하는 것은 6·25전쟁 발발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관건이다. 한마디로 스탈린은 ‘평등하고 대등한 중·소관계’를 주장하며 만주 반환을 요구하는 마오쩌둥을 제어하고 압박해 자신의 예속하에 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는데 이런 스탈린의 고민이 6·25전쟁과 연결되었다고 본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은 마오쩌둥과의 험난한 협상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제2의 티토’가 될 가능성과 함께 애치슨 선언 등에서 미·중 협력 가능성을 확인하고 6·25전쟁을 구상했다고 본다. 스탈린은 미·중 양국을 동시에 제압하는 방법으로 김일성이 가져온 남침 계획을 이용해 한반도에서 미·중 전쟁을 유도함으로써 양국이 힘을 소진하도록 하고 상호 협력 가능성도 차단해 중국을 서방으로부터 고립시켜 자국의 종주권 체계 속에 묶어두려고 전쟁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전쟁 의도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스탈린은 북한군이 빨리 승리(적화 통일)하지 못하도록 했고, 미국의 한국전 개입이 용이하게 카펫을 깔아주었으며, 미군이 참전한 후에는 중국의 참전을 압박해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해 상호 적대감을 강화시키려 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 책은 1950년 6월 27일 소련 대표가 유엔군 참전을 결의한 안보리 회의에 불참한 이유를 고백한 스탈린의 비밀 외교문서, 소련의 도하장비 제공 지연, 소련 군사고문단의 전투 현장 지휘 회피, 통신장비의 사용 제한 등을 제시하고 있다. 또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에서 3일 동안이나 우왕좌왕한 이유, 중국과 북한이 전쟁 승리의 최적기로 본 7월과 8월에 중국군의 조기 투입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이 거부한 사실 등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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