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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 성공시대

성공시대

깊은 계곡에서 금의환향의 꿈을 이루어가는 김승철 씨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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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명 국제펜클럽 망명북한펜센터 부이사장

강원도 횡성군 마옥리 계곡에 가면 큰 고사리 밭이 있다. 얼핏 현 시가로 계산해봐도 3000여 평에 달하는 이 고사리 밭의 수익은 만만찮은 액수로 보는 사람을 부럽게 만든다. 그런데 놀랍게도 밭의 주인은 본토민도 아닌 북에서 들어온 사람이다.

2003년에 입국해 올해 10년째 대한민국 밥을 먹는다며 넉넉한 웃음을 짓는 김승철 씨가 바로 이 밭의 주인이다. 벌써 50대 중반을 넘은 나이지만 땀에 젖은 얼굴엔 이루어가는 꿈이 부른 젊음이 넘쳐났다. 그는 이곳뿐이 아니라 충청북도 청원 땅에 2000여 평, 강원도 원주에 3000평, 횡성읍 길풍리에 2000평의 고사리 밭을 더 가지고 있다고 한다.

통틀어 1만 평에 달하는 넓은 밭에서 내다보는 그의 앞날은 참으로 꿈에 부풀 만하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벌써 밭 작황을 보고 내년도 주문이 쇄도한다고 한다. 2년간 수익으로 그간 써버린 빚을 말끔히 청산했고, 네 귀 번듯하게 지어놓은 새 주택 마당엔 새로 마련한 경운기 한 대, 1톤 화물트럭 1대가 당당하게 서 있다.

고사리 주문 가격은 1kg당 1만 원, 평당 수확량이 7~12kg이라 하니 벌써부터 돈방석 위에 올라앉은 김승철 씨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 고사리를 키울 생각을 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한민국에 첫발을 디디는 그 순간부터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이 많습니다. 생산 공장, 그리고 현장 일까지 많이 부딪쳐 보았지만 50대에 접어든 나를 진심으로 반겨준 데는 한 곳도 없었죠. 이곳 남쪽은 풍요로우면서도 능력 없는 자에겐 한없이 차디찬 세상이었죠. 그래서 나중에 몇 년 모아둔 돈으로 노래방을 시작했답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것 역시 이곳에서 흔히 말하는 ‘지역주의’의 표본이더라고요. 뭐 바깥에서 굴러들어온 놈이 제법 가게까지 차린 것이 샘이 나는지 괜히 술 먹고 들어와서는 시비를 걸고 기물을 들부수며 난리를 치고, 그래서 몇 번 파출소 출입까지 했는데 그러고 나니 맛이 싹 가더라고요. 일 년 만에 적자를 안고 그만두긴 했습니다만 그렇다고 당장 오라고 반겨주는 직장도 없어 갈팡질팡했죠. 사실 아직 건장한 육체가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어디 갈 데도 없고 돈 쓸 일은 많은데 해종일 빈둥거리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강원도 춘천에 올라가 건강원 가게도 한번 맡아보았습니다만 그것 역시 나 같은 탈북자가 할 일이 아니었어요. 문제는 무엇을 차리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이거든요. 밀어넣은 돈이 있어 그 걱정에 가슴을 조이는 그때 두 눈이 번쩍 뜨이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건 바로 빈곤층을 농촌에 정착시켜준다는 소식이었다. 담당자와 장시간 담화를 나눈 끝에 그는 드디어 결심을 했다.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작은 날개나마 펼칠 수 있는 곳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이다’ 싶었다.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렇게 결심을 하니 앞이 환해졌다.

고사리 옮겨 심으며 희망도 함께 심다

그는 다음 날 필요한 서류를 접수시키고 급히 춘천으로 달려가 가게를 정리했다. 어인 일인지 가게를 넘기겠다고 부동산에 알리자마자 금방 가게가 팔렸다. 하늘이 돕는구나 하고 만족한 미소를 짓는데 따르릉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는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한국농촌진흥연구소에서 온, 농촌 정착에 필요한 실무 강습을 알리는 전화였다. 그는 망설일 필요도 없이 맨 먼저 달려가 열심히 공부했고 그때까지 다소나마 나약한 마음으로 저울질하던 농촌 정착의 결심을 굳혔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내보니 무엇이든 결심이 먼저였고 한번 결심하면 사활을 거는 것이 중요했어요. 여기서 내가 흔들리면 그것으로 내 생명은 끝장이다, 북한과 달리 무엇하나 부족한 것 없는 풍족한 세상이니 무슨 일을 하든 열과 성을 바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은 마냥 부풀었고 힘들었지만 하는 일마다 신이 났어요.”

사실 밭일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그는 북한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도 아니었다. 청년시절에는 수도건설돌격대에서 일했고 그 이후에는 함흥에서 채소 도매업을 했다. 러시아 벌목에도 참여했다. 직접 쟁기를 들고 땅을 파본 경험은 없었다. 그런 그가 농사에 다소나마 재미를 본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고난의 행군’ 시절 고향인 함흥 반룡산 자락에서 뙈기밭을 가꿔본 거였다.

배급이 없어 굶는 식구를 살리기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옥수수 농사를 지었는데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작물을 보는 재미가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땅을 일구던 그때가 마치 그림처럼 선하게 떠올랐다. 삽과 괭이로 생땅을 일궈 밭을 만들면서도 그 수확물을 그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때와는 달리 이곳에서의 농사는 말 그대로 사업이었고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시험장이었다. 시작한 이상 패자가 되기는 싫었다.

임대한 밭에 무엇을 심을까 하는 문제는 많은 고민을 불러왔다. 시장을 조사하고 관계자들을 만나고 연구원의 조언도 듣고 하면서 눈이 쑥 들어가도록 심사숙고한 끝에 그가 도달한 것이 바로 고사리 밭 조성이었다.

고사리, 지금은 무성하게 자랐지만 사실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오죽했으면 한 마을에 이웃하고 사는 농민들도 혀를 찼다. 북에서 온 사람이 어떻게 고사리 농사를 지을 생각을 했냐는 것이었다. 자기들은 해마다 자연 고사리를 뜯어 말리면서도 그걸 밭에 옮겨 재배할 생각은 못 했다는 거였다. 처음 밭에 고사리 뿌리를 옮겨 심을 때 모두 그걸 보고 고생을 사서 한다며 냉소를 보낸 것도 사실이다. 뭐든 처음 시작할 때는 누구나 주저하며 남이 하면 기웃거린다. 그러면서 어디 좀 두고 보자는 심리에 잠긴다. 그러노라면 그만큼 세월은 흐르고 결국은 한 수 뒤로 밀리는 현실이 바로 오늘의 경쟁사회의 모습이다. 세월을 잡는 것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용기였고 끈질긴 노력이었다. 억대의 생산물 기지를 열정과 노력으로 만든 사람, 그가 한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산이 많은 대한민국의 영토엔 쉬고 있는 땅이 너무 많습니다. 고사리뿐이 아니라 더덕, 황기, 인삼 등 빈 땅에 심을 좋은 작물도 많고요. 땅을 놀리면 안 되지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려져 있는 산과 들, 척박하지만 가꾸는 손에 따라 기름져질 이 땅에 천연 작물이 넘쳐나도록 심어 가꾸는 것도 애국이 아닐까요? 이걸 애국으로 보고 시작한다면 부자 되는 길은 너무 가까이에 있습니다. 난 그걸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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