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호 > 한중 평화통일포럼
한중 평화통일포럼
지난 7월 24일 중국 베이징 쿤룬호텔에서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최한 ‘한중 평화통일포럼’이 열려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일보사의 후원으로 열린 이 포럼은 ‘6·25 전쟁 정전 60주년’을 계기로 베이징에서 열렸다는 점에서 적지않은 의미가 있었다. 정전체제가 60년 동안 지속돼온 상황에서 한중 양국이 6·25전쟁의 여파와 한반도의 평화 전망을 주제로 국제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었다. 60년 전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과 중국이 정전체제의 극복을 공개적으로 논의한 것은 한중관계가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하원 조선일보 정치부 외교안보팀장
안용현 조선일보 국제부 베이징 특파원
양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번 포럼은 △2013년에 돌아본 6·25전쟁과 그 함의△중·북관계와 정전체제 종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동북아 정세와 한중관계의 미래 분야로 나눠 진행됐다.
우리 측에선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박병석 국회 부의장,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 권영세 주중대사 등이, 중국 측에서는 장롄구이 공산당 중앙당교(黨校) 교수, 진찬룽 인민대 교수, 추수룽 칭화대 교수, 뉴쥔 베이징대 교수 등 모두 250명이 참가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이 회의는 저녁 6시에 ‘종료 선언’이 나올 때까지 대부분의 참석자가 자리를 지켜 눈길을 끌었다.
현경대 수석부의장은 개회사에서 “한반도의 불안정한 정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는 남북뿐 아니라 동북아, 세계 평화와 직결돼 있다”고 말했다. 진창룽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부원장도 개회사에서 “중한관계가 역사상 가장 좋다”며 “6·25 정전 60주년을 맞아 과거를 뒤돌아보고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박병석 국회 부의장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이 ‘중국의 꿈’과 함께 갈 수 있다”며 “북핵 불용에 대한 중·미 합의는 한반도 정세의 변화를 시사한다”고 밝혔다. 권영세 주중대사는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청중석에서는 “중국은 ‘한반도의 평화=남북통일’이라는 데 동의하느냐”, “북한 핵 문제가 결국 한중 간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중국이 반성해야 하지 않느냐”는 등의 날카로운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평화협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논쟁
이날 회의에서 가장 주목을 끈 것은 평화체제와 관련한 논쟁이었다. 이근관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체결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실상 전쟁이 종료된 상태에서 진정한 한반도 평화체제는 평화통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근관 교수는 “국제법상 평화협정은 전쟁으로 훼손된 국가 간 관계를 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며 “남북관계는 통상적인 국가 관계와 다르고, 평화협정을 맺는다면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특히 독일은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고 ‘독일 문제의 최종 해결에 관한 조약’을 통해 통일을 완성했다고 지적했다. 소련은 평화협정 체결 형식을 원했지만, 독일은 이럴 경우 2차 세계대전 관련국이 모두 개입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 체결은 주한미군 철수와 직결되는 것”이라며 “한반도 냉전 종식에 평화협정이 반드시 필요한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91년 남북이 체결한 기본합의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장롄구이 교수는 “현 상태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장 교수는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은 자기네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고 미국에 요구하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장 교수는 중국 공산당의 간부 양성기관인 당교에서 활동하는 원로 전문가로,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대북정책에 관해 조언하고 있다. 장 교수의 발언은 정전체제 60주년을 맞아 중국 정부 입장을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으로 우리 정부 관계자들은 이해하고 있다.
장 교수는 “미·북 간에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북한이 무엇을 하든지 막을 수 없게 된다”며 “북한의 평화협정 주장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반도 평화협정과 관련한 중국의 원칙은 두 가지라며 “평화협정은 반드시 한반도 관련 국가가 함께 서명해야 하며, 북한 핵 폐기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청샤오허 인민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평화체제와 통일, 북핵 문제를 분리하자”는 견해를 내놓았다. 청샤오허 교수는 “한반도 통일보다 평화체제는 더 쉬운 문제지만 통일과 평화체제를 연계하는 바람에 쉬운 문제(평화체제)가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미는 평화체제 문제를 북핵 포기를 위한 카드로 사용하고 있다”며 “평화체제 문제가 북핵 문제의 인질처럼 변해버렸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북한 비핵화 없이 한반도 평화체제는 없다”며 “한반도 정전체제 종결과 평화체제 구축에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핵개발로 (한반도) 긴장이 계속 고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을 용인한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통일 이후의 주한미군에 대한 경계감 나타낸 중국
중국은 이 회의에서 남북통일이 가져올 한반도 상황 변화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뉴쥔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는 “한반도 통일 후 중국 변경(邊境)에 대규모 외국군이 주둔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정전협정으로 휴전선이 그어진 경위를 설명하며 “중국 변경에는 중국에 우호적인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주한미군이 통일 이후 북한에 주둔해선 안 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으로 중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안홍준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이날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통일 후에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주한미군이 한 발짝도 북한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뉴쥔 교수는 “정전협정 이후 60년이 흐르는 동안 (전쟁 당사자인) 중·미 관계는 이미 변했고, 중·소 동맹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소련 역시 사라졌지만 한반도에는 여전히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왕이성 중국 군사과학원 교수는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의 의미에 대해 “남북한 주민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준 전쟁을 끝낸 것”이라며 “그 덕분에 60년의 평화가 가능했고, 한·중 간 평화와 협력의 토대가 마련됐다”고 밝혔다. 또 “정전협정으로 관련국 간에 제도화된 대화가 생겨서 서로 소통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며 중국이 참여한 정전협정이 한반도의 ‘오랜 평화’에 기여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현재 한반도 정세는 복잡하고, 정전체제는 다소 약화된 느낌”이라며 “관련 국가가 평화를 위한 강력한 믿음을 가진다면 남북한의 평화통일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청샤오허 교수는 이날 정전체제 종결을 위한 중국의 역할에 대해 “과거 중국은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 방관자였지만 지금은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은 남북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병광 연구위원은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한반도 정전체제 종결과 평화체제 이행은 북한의 체제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며 “현재 북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중국 지도부가 기존 대북정책에 대해 “새로운 결심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정종욱 전 주중대사도 “정전협정 체결 과정에 역할을 했던 중국은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흥규 성신여대 교수는 지난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訪中)을 통해 ‘한반도 평화통일’이 중국의 한반도 ‘제4원칙’의 지위로 부상했다고 말했다. 종전까지 중국의 한반도 정책 원칙은 비핵화, 혼란 방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등 세 가지였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박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 “중국 국민의 한반도에 대한 양대 희망은 비핵화와 평화통일”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평화통일에 대한 중국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한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김 교수는 “이는 한국에 의한 자주적 평화통일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북한에 대해선 대단히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청샤오허 교수는 “과거 중국은 한반도 원칙에서 ‘혼란 방지’를 가장 먼저 언급했지만 3차 핵실험 이후에는 ‘비핵화’를 우선순위에 올려놨다”고 밝혔다.
중국의 변하지 않는 3가지 대북정책
이번 회의에서 북한의 잇따른 도발로 중·북관계가 과연 얼마나 변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이에 대해 청샤오허 교수는 “북한의 3차 핵실험을 비롯한 북한의 최근 도발 이후 중국에는 세 가지 변화와 세 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했다. 청샤오허 교수는 중국의 변화로 ①중국 지도자의 공개적인 대북 경고 ②중국 매체의 잇따른 북한 비판 ③국제 협력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거론했다. 또 중국의 변하지 않는 세 가지로는 ①완충지대로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 ②‘북한을 버리지 않는다’는 레드라인(양보할 수 없는 선) ③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언급했다.
뉴쥔 교수는 북한의 핵 보유가 한미동맹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한반도와 관련해서 가장 큰 변화는 북한이 핵을 가진 것이다. 이는 중국에는 큰 안보 위협”이라며 “(북한이 핵을 가졌기에)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중국의 생각에 (긍정적인)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 인민대의 진찬룽 교수는 한중 정상회담 이후 한국에서 중국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 것과 관련해 “최근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는 전술적인 것이지 전략적인 것은 아니다”며 “북한의 도발적 행동에는 대응해야 하지만, 북한의 정권 교체를 바라는 것이 중국 입장은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 측 전문가들은 중국이 한반도 상황 변화를 위해 더 적극적으로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전성흥 서강대 교수는 “중국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가, 아니면 북한을 관리하려고 하는가. 이런 전략적 모호성에 대해서 중국이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는 “중국은 북한이 모든 카드를 다 보여줬기에 반드시 대화 국면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해서 정전 60주년을 맞아 (고위급 인사인) 리위안차오 부주석을 8월 25일 북한에 보낸다”며 “중국의 대북정책은 현재 진화하는 과정에 있으며 중국이 한반도 전체를 놓고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광 연구위원은 “중국은 미국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정작 북한엔 ‘No’라고 말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고, 북한을 향해 얼굴을 붉히기는 해도 등을 돌리지는 못한다”며 “이러한 중국의 모습이 대외 이미지를 손상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