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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꿈꾸다 | 또 다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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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에 오기전까지만 해도 남북한의 문제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했어요. 가끔 타임지 등을 통해서 보기는 했지만 그냥 그게 전부였거든요. 그런데 전공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이제 조금씩 남북한의 문제에 대해 배우고 있다는 에스더가 바라 본 남북한의 분단 현실은 ‘슬프고 이상한 이야기’다.
"한국은 한 나라이고 한 민족이며,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가족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탈북자들이 한 민족인 나라에 마음대로 갈 수 없어, 그곳에 가기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고모나 삼촌네 집에 못 간다고 생각해보세요. 슬프고 말도 안 되고 그래서 이상한 이야기 같아요."

물론 국제사회 전반에 대해 전공하는 학생답게 통일 이 단순히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님은 알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남한과 북한, 그러니까 한국만의 전쟁이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지금도 중국 등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도 있으니까 한국의 통일이나 전쟁 역시 그냥 쉽게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또 북한은 핵문제라던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구요”
때문에 올 초 북한의 전쟁 도발상황에서도 동요하는 친구들을 다독이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지난해까지 한국에서 함께 생활하다 최근 귀국한 부모님 역시 "밥은 잘 먹고 있냐?"고만 물었을 뿐 전쟁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의 언급도 없었단다.
"우리는 KDI 국제정책대학원을 ‘작은 미국’이라고 불러요. 그만큼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많거든요.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자기네 나라 방송에서 전쟁난다고 하니까 한국에 처음 온 학생들은 당장 떠나야 한다고 난리가 났죠." 한국어만큼이나 한국생활에도 익숙한 에스더는 그때 그냥 점잖게 한 마디만 했단다. "공부나 해. 그냥 다 미디어에서 하는 소리야" 어렵게 기회를 얻어 공부를 시작한 만큼 전쟁에 대한 위협보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버리는게 더 걱정이었단다.
사실 에스더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김정은 정권이 미디어를 통해 주변국들을 상대로 ‘파워’를 보여주기 위해 벌인 전쟁도발보다 개성공단 폐쇄 등 경제적인 부분의 단절이었다. 오랜 군사독재 정권의 지배, 일본에 의한 식민지화, 내전으로 인한 상처 등 역사적으로 지금의 북한은 ‘과거’의 미얀마는 많이 닮아있다. 또한 미얀마 역시 오랜 기간 폐쇄적인 외교정책을 펼치다 지난 2011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방정책을 선언하고 ‘한국을 롤모델’로 경제 살리기 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 국내에서도 신개념 새마을 운동(농촌 개발 프로젝트)을 전수해 ‘양곤강의 기적’이 재현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신개념 새마을 운동이란 농촌개발에 필요한 가공공장과 정미소, 병원, 학교, 도로, 교량 등 포괄적인 인프라를 대외경제 협력기금 (EDCF) 등을 활용해 일괄 지원하는 것으로 우리 정부는 시범 지역을 대상으로 집중적인 지원을 벌여 미얀마가 단기간에 성과 를 직접 체험하게 할 계획이다. 더욱이 에스더는 미얀마에서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없어 한국 기업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장학생이다. 때문에 국가의 빈곤이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북한은 예전의 미얀마와 닮았어요. 우리도 군사정권을 시작하고 폐쇄적인 외교를 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많은 신뢰를 잃었어요. 그리고 그 때문에 경제가 매우 어려웠죠. 저도 한국에 오지 못했다면 공부를 계속하지 못했을거예요. 그런 미얀마도 변하고 있잖아요.
외국 투자를 받기위해서 법도 바꾸고 그러는데 북한은 미얀마 만큼이나 어려운 상황인데 투자를 받기위한 신뢰를 잃었다는 건 정말 큰 실수인 것 같아요."


인터뷰 내내 자국의 상황을(미얀마는 1962년 군사 쿠데타 이후 수십 년 간 군부독재체제 였으며 최근 新정부 출범과 함께 개혁의 과도기를 겪고 있다.) 의식한 듯 정치적 발언에 조심스러웠던 에스더는 이제 북한도 주변국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태도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갑작스레 정치적 이념이나 체제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비슷한 체제를 가진 다른 국가들처럼 일정부분은 개방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녀의 의견이다.

에스더는 또한 전쟁은 무조건 ‘돈 낭비’라고 강하게 못 박는다. “솔직히 먹고 살기 힘들잖아요? 미얀마도 그렇고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다 힘든 시기인 것 같아요. 미얀마처럼 경제적인 발전이 안 된 나라는 돈이 없어서 힘들고 한국처럼 발전이 되도 그걸 유지하기 위해 경쟁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크잖아요. 전쟁할 돈도 통일하는데 쓰는 게 낫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국 친구들한테 물어보면 다들 통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고 걱정해요. 물론 돈 문제는 중요하죠. 그리고 독일만 봐도 통일하면 아무래도 돈은 많이 들 것 같긴해요. 그런데 제가 외국인이고 학생이라 그런지 모르지만 전쟁하겠다고 하는 돈을 모으면 통일하는데 필요한 돈이 나오지 않을까요? 이론적인 이야기인건 알아요. 하지만 한국은 원래 한 나라잖아요? 한 민족이었다면 어떤 경우라도 통일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가족모두가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 제도가 일반적이며, 장유유서(長幼有序)등 한국과 정서적으로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미얀마 출신의 그녀가 강하게 통일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조금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민족이 함께 살 수 없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란 것.

미얀마는 지난 1983년 10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공식 순방길에 올랐 다가, 북한에 의해 자행된 테러로 인해 수행원 17명이 사망한 ‘아웅산 테러사건’의 아픈 역사 를 공유한 국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아직도 한국에서 만난 나이 드신 어른들은 에스더에게 곧잘 그 사건에 대해 묻고 한다고. 1991년 생. 우리나라로 겨우 22살 인 에스더가 알 수 있는 역사는 아니지만 자신의 나라 가 한국과 많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단다. 젊은 친구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미얀마의 현재 정치상황과 아웅산 수치 여사에 관해 서란다.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수치 여사는 자유와 민주주의 상징으로 한국은 물론 전 세계 많은 젊은이들의 멘토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아웅산 수치 여사의 한국 방문은 미얀마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알다시피 아웅산 수치 여사는 정말 오랜기간 가택연금 상태였거든요. 정치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미얀마에 개발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제가 공부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요. 언젠가 미얀마로 돌아가서 더 개발될 수 있도록 잘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이 미얀마에 관심을 표하는 만큼 미얀마의 친구들 역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가장 큰 이유는 ‘한류’다.
"미얀마는 이제 막 인터넷이라던가 휴대전화 등이 도입되고 있어요. 그렇다보니 남북한의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요. 그래도 한국이 어디에 있고 어떤 나라인지는 알아요. 한류 덕분이죠. 미얀마에서는 매일 밤 7시부터 한국드라마가 나오는데 어른, 어린이, 스님들 까지 정말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 같아요. 그런걸 보면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K-POP도 인기가 많아져서 아마 친구들이 저보다 한국 연예인에 대해 더 많이 알걸요?" 지난 1월에는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참석차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아웅산 수치 여사 역시 바쁜 일정을 쪼개 평소 팬을 자청했던 배우 안재욱과의 만남을 따로 가졌을 정도라니 미얀마 내 한류열풍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배움의 기회를 준 한국이 고맙고 좋아서 미얀마로 돌아갈 때 ‘한국을 통째로 가져가고 싶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에스더에게 한국과 미얀마의 또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더 많이 웃기’와 ‘꿈을 가질 것’이다.
"미얀마 사람들에게 미소란 식사만큼 당연한 일상이에요. 그런데 처음 한국에 와서 깜짝 놀랐던 것 중 하나가 미소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어요. 시간이 지나고 친구들도 생기고 한국생활도 익숙해지면서 정에 대해서 알게됐죠. 미얀마 사람들은 미소는 보여주지만 속마음은 잘 보여주지 않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좀 무뚝뚝한 대신에 한번 정들면 더 솔직하죠. 화내고 웃고 울고.. 감정표현도 더 솔직하고요. 그런데 가끔은 정말 웃는 여유조차 없이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면 괜히 속상했어요. 전 한국 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저에게 행복을 준 나라니까. 그래서 친구들이 많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현실이 쉽지 않다는 건 정말 잘 알아요. 한국의 도움이 없었으면 저 역시 꿈을 잃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미래에 대한 꿈을 꿨으면 좋겠어요. 정말 작은 것이라도 하나쯤은 가슴에 꿈을 품고 그 꿈을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우린 아직 어리니까요." 물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에스더 역시 도움을 얻어서 하는 공부인 만큼 정말 매시간 최선을 다하지만 가끔은 지치고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 단순히 지식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과 만날 수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고. 에스더는 앞으로 6개월 남은 대학원 과정 중 ‘새로 시행된 미얀마의 개방정책 법’과 관련해 논문을 마무리 한 후 메콩 강에서 자원봉사활동에도 도전해 볼 계획이다. 사실 미얀마에 있을 때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에만 급급해 주변에 관심이 없었지만 한국에 와서 많은 것을 배우고 꿈꾸면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어졌다.

<글_권혜리 / 사진_나병필, 청와대, 연합뉴스>
본명은 에스더 바우 싼찡으로 미얀마의 ‘제2의 도시’ 양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의사 를 꿈꾸던 중 목사로 활동하는 아버지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한국 유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후 삼성꿈장학재단의 글로벌 희망 장학생으로 선발돼 이화여자대학 교 국제학부에서 국제정세에 대해 공부했고 현재는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개발 정책학 (MDP)을 전공하고 있다. 향후 국제개발협력분야에서 일하기를 목표로 하고 있는 당찬 여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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