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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말하다 | 통일자문회의 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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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정부는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전술에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인식해 1981년 범국민적인통일기구인 평화통일정책 자문기구를 창설했다. 이후 평화통일정책자문 회의 법 및 동시 행령을 제정해 평화통일정책자문기구가 법적 기구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오늘의 사무처인 장충동 청사를 마련해 8,919명의 제1기 자문위원을 위촉, 활동에 들어 갔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는 정부의 평화통일 실천 노력을 전국의 각 협의회단위로 지속적으로 홍보 나갔고, 이는 통일 정책 대국민홍보활동에 본격 적인 첫 불꽃이 되었다.
통일자문회의의 자문위원들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981년 6~7월 서울 일부 지역과 전남지역 등 2천195명의 자문위원 을 대상으로 ‘통일연수’를 시작했으며 이 이후에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연수교육을 통해 자문위원들은 정부의 대북 정책을 국민들에게 홍보해 통일에 대한 이해를 확산 시켰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또한 1982년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의 이념을 정립하고 확산하기 위한 각종 행사를 진행해 나갔다. 그리고 정부의 통일방안과 대북정책에 대해 알리기 위해 대학생들을 대상 으로 체험활동과 토론회, 강연 등을 기획하여 전후세대 대학생들에게 확고한 안보의식과 국가관을 세워주는데 총력 을 쏟았다.
여성, 종교, 해외교포 등을 대상으로도 활동반경을 확대해 나갔다. 통일자문회의는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여성위원의 활동방향을 모색하고 여성들의 통일의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방안에 관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갔다. 그리고 1981년 11월에 종교인들의 뜻을 모아 평화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과 방안을 연구·개발하기 위해 개신교, 불교, 천주교를 포함한 7개 종단의 종교계 인사들로 종교분과위원회를 구성해 활동에 들어갔다. 또한 해외지역협의회 설치를 1982년부터 본격화 시작했다. 일본지역협의회, 유럽지역협의회, 미주지역협의회, 중남미지역협의회, 동남아지역협의회를 각각 설치함으로써 해외 에서의 통일지지 기반 확산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창설 초기에는 미국·일본·서독·프랑스·캐나다·남미 등 세계 40여 개 국가에서 821명의 해외 자문위원들이 구성되었다. 1984년 6월 국내 13개 시·도와 북미주·구주·일본·동남아·중남미 등 해외 11개 지역에서 제1차 지역회의를 개최해 그동안 범국민적 차원에서 다져온 통일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고 앞으로 통일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통일자문회의는 남북한 정치 사상전에 대비하여 통일의지를 키워나가는 한편, 대국민 홍보활동을 통해 북한이 통일방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연방제의 허구성을 밝혀 나갔다. 자문 위원들은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회담’의 개최를 위한 여건 조성에도 앞장섰다. 통일자문회의 사무처는 자문위원들의 통일홍보활동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북한의 연방제와 3자회담의 허구성을 파헤친 홍보자료를 배부하여 활용케 함으로써 자문위원들은 북한 측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에 맞서 자신감과 함께 이론적 무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84년 우리나라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남한에게 수해물자를 지원하겠다는 제의를 했고, 우리 정부가 이를 수용함에 따라 버마 폭발사건 이후 냉각된 남북관계는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겉으로는 남북대화에 진전이 있는 듯 보였지만 북한은 체육회담, 적십자회담 등 남한과의 대화에서 일방적인 연기와 통보를 반복해 나갔다. 이 같은 상황에서 통일자문회의는 즉각 성명을 내고 북한은 민족적 양심으로 돌아와 경제회담과 적십자회담은 물론 남북간의 대화와 교류에 조건 없이 응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결국 이와 같은 노력으로 성사된 적십자회담은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역사적 성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1986년 10월, 정부는 북한에서 중부권을 삽시간에 물바다로 만들 ‘금강산댐’을 건설한다고 하자 즉각 ‘대북한 성명문’을 발표해 금강산댐의 건설 계획 중단을 북한 측에 강력히 요구했으며, ‘평화의 댐’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온 국민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평화의 댐 건설 성금 모금운동을 통해 6개월 동안 640억 원의 성금이 모였는데, 자문위원들의 적극적인 모금활동이 크게 일조했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는 1985년 12월 열린 8차 상임위원회 에서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상임위원들이 앞장서서 노력해 나가자고 결의했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국내외 1만 여 자문위원들은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되는 86아시안게임을 맞이하여 대회의 성공적 완수를 위해 범국민적인 참여와 지원활동을 다각도로 전개해 나갔다.

당시 88올림픽의 공식표어처럼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한국을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급성장시킨 계기를 마련했으며 ‘중국과 일본 근처에 있는 조그만 나라’ 정도로만 알려졌던 한국의 이미지를 대외적으로 향상시켰다.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를 출범시킨 5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자 1988년 2월 헌법 개정을 통해 ‘민주평화 통일자문회의’로 명칭을 변경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이념적 조직체로서, 또 북한의 어떠한 정치·사상·심리전도 단호히 제압할 수 있는 기구로서, 그리고 국내외 동포의 강렬한 통일의지를 결집하는 구심체로서, 민주발전의 새 시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밝혔다. 또한 초당적·범국민적인 참여를 제도화하고 민주적인 운영과 통일에 대한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수렴하고 이를 정책화하여 자문건의 활동을 추진키로 했다.

‘7.7선언’을 발표된 직후인 7월 16일부터 8월 11일까지 북미주·구주·일본·동남아·중남미 지역 등 해외 13개 협의회별로 제3차 해외지역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와 더불어 교민간담회 중심으로 진행된 이 회의에서는 새 정부의 통일정책 기조와 추진방향에 대해 기탄없는 의견이 교환되었다. 특히 해외 자문위원들은 ‘7.7선언’의 구현을 위한 해외지지기반 확산, 통일논의 활성화와 해외동포의 통일의지 결집, 대화와 교류를 통한 남북관계의 실질적 개선을 위한 국제 여론 환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분위기 조성,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해외 위원 활동의 활성화 등에 대해 논의했다.

‘7.7선언’은 1991년 서울에서 열린 제5차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한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을 핵심으로 하는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원동력이 됐으며, 2000년 6월의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밑거름이 됐다.

<정리. 박순모>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