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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나누다 | 통일과 나(공모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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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동석


아버지는 전투경찰로, 6.25에 참전한 용사로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각종 훈장이 그를 대변해주고 있으며 당시 사진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휴전과 동시에 아버지는 경찰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 나이 겨우 20대 후반에 불과하여 전쟁 후유증인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며 하루도 편할 날 없이 오로지 알코올에 의지하여 폐인처럼 생활하였다.

결국 직장 적응은 물론 일상생활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인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경찰공무원자격을 박탈당하는 아픔을 겪게 되었다고 했다. 6.25 전쟁당시 참전했던 대부분의 군.경 전사.상자들은 일찍이 보훈대상자로 국가로 부터 혜택 을 받아왔지만 참전용사인 아버지는 경찰공무원 에서 강제 퇴직 당한 상태로 무심한 세월만 보냈다.
참전후유증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입은 상처는 우리가족 모두의 피해로 전이되어 아무 의미 없이 고스란히 묻혀버린 것이다. 평생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가장능력 상실, 가정생활 파기 등과 관련 하여 아버지를 원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파 유규무언일 따름이다. 1997년 아버지가 작고하던 날도 서운함보다 시원섭섭함이 앞섰던 것은 불효의 극치였다는 사실을 현재까지 후회하고 있다. 아버지의 무능력으로 인해 장남인 내가 부모봉양과 동생들 뒷바라지 등 소년가장이었다는 이유가 컸다.

악전고투 끝에 피난처인 경남에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모 도움 한번 받아본 적 없이 천애고아처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 살기위해 발버둥 쳤던 과거의 모든 난관이 아버지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없었다. 국가유공자에 관한 법률개정으로 주변의 몇몇 지인들의 고인이 된 가족들 명예회복과정을 우연히 지켜보면서 2012년 말에서야 나도 아버지 명예회복에 눈을 뜨게 되었다. 60여년이 지난 고인의 명예회복절차와 과정 등에 대하여 관계부처에 질의응답과 각고의 노력 끝에 아버지의 최종 근무지가 경남지방경찰청 진해경찰서라는 것과 퇴직사유가 규율문란에 따른 파면으로 확인되었다. 아버지의 퇴직사유를 확인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고 가슴이 찡하며 비애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찌하여 규율문란이 파면사유가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증거서류 확보를 위해 동분서주한 끝에 아버지의 당시 행적 등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 후유증으로 나라가 혼란스럽고 법제도가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경고에 불과한 규율위반이 지나 치게 무거운 형벌로 다루어져 과잉처벌에 해당된다는 법원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2013년 2월 15일 비록 고인이 되었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국가유공자증서를 60대 중반에 받아든 불효아들이 참회하면서 고인이 못다 피운 꿈을 반드시 이루 겠다는 각오를 다짐했다. 제2의 6.25전쟁 같은 전철을 더 이상 밟지 않도록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아버지 국가 유공자증서 앞에 고개 숙여 약속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분단국인 한반도를 우리세대에서 반드시 행복한 통일을 이루어 세계만방에 자랑스러운 통일한국의 위상을 드높일 것이라고 국가유공자가족의 일성으로 힘차게 외쳐본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