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호 > 특집 Ⅰ
특집 Ⅰ
3월 하순 박근혜 대통령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핵안보정상회의에 참가해 핵안보에 관한 연설과 한·미·일 및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했다. 이어진 독일 방문에서 ‘드레스덴 선언’으로 불리는 대북 3대 제안을 발표했다. 북한은 공식적으로 이 제안을 거부했으나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까지 거부한 것은 아니다. 드레스덴 선언의 실천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살펴보았다.
드레스덴 선언은 올해 초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을 구체화한 실천 구상이 담긴 것으로서 ‘남북 주민의 인도적 문제 우선 해결’,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구축’, ‘남북 주민 간 동질성 회복’ 등 현 정부의 대북·통일 구상을 압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국방위원회는 공식적으로 드레스덴 선언을 거부했다. 북한 당국이 밝힌 거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독일에서 그러한 제안을 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하는 접근이 흡수통일의 의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도주의 및 사회·경제 협력보다 정치·군사적 사안이 남북관계에서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정치·군사 문제에 관한 협상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부 이유의 이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속돼온 북한 정권의 ‘체제 생존’에 대한 불안이 내재해 있다. 북한 정권은 독일의 통일 과정을 지켜보면서 남북 주민들 간의 교류·협력을 통해 점진적 통일을 지향하는 기능주의적 접근이 북한 사회에 미칠 파장을 분명히 확인했다.
또한 냉전 종식으로 직면했던 대외적 고립과 안보 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고 선군정치를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방어적 성격의 한미 군사훈련에 대해 매번 거칠게 대응해온 것도 바로 체제 생존 문제에 기인한다.
동맥경화 상태의 한반도, 6자회담에서 풀어야
북한 정권의 체제 생존 전략은 단순하지 않다. 이는 국제사회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 제재라는 제약을 무릅쓰고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통해 미국과 대화 및 관계 정상화를 꾀한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 북한은 남북관계에서 강온전술을 구사하는 한편, 미중 간 경쟁관계를 십분 활용하려고 한다.
어쨌든 현재 김정은의 북한은 대외전략 차원이든 대내 경제 발전 목표 달성을 위해서든 그동안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다. 올해 초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1월 16일 국방위원회 중대 제안을 통해 “우리 민족끼리 단합된 힘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활로를 열자”고 강조하고, 박 대통령이 제안한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한 것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북한 정권은 남북 교류·협력 과정에서 남한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이 북한에 파급되지 못하도록 ‘모기장’을 설치하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교류·협력에 대해서는 부정적 태도를 보인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은 애초 그러한 현실에 대한 충분한 고려하에 탄생했다. 그렇지만 현재의 한반도 내외 정세에서 신뢰 프로세스가 지향하는 목표가 단기적으로 달성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올해 초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론’에 이어 통일 준비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이러한 현실에 주목해 우리 정부와 국민들 모두는, 북한 당국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통일 준비의 맥락에 닿아 있는 드레스덴 선언이 실천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깊이 고민하고 적절한 대안을 마련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통일부의 해설서에는 ‘신뢰’에 대해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평화 정착, 통일 기반 구축을 가능케 하는 토대인 동시에, 국민적 지지와 국제사회와의 협력하에 대북·외교정책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자 인프라’로 설명돼 있다.
대북정책의 측면에서 이 정책은 남북 간의 교류·협력을 높이기 위해 남북한이 이미 합의한 약속을 점검하고 실천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형성된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 교류·협력을 증진시켜나가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삼고 있지만, 단순히 분단 관리를 위한 대북정책에 머물지 않고 포용과 원칙 사이의 균형, 그리고 안보와 교류·협력의 균형을 중시하는 한편, 관계 개선을 위한 남북대화도 국제 협력과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론을 강조한다.
이처럼 통일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신뢰 프로세스 정책은 일회성이나 이벤트식 교류가 아니라 남북한 주민이 서로 이해하고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향의 남북관계 개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긴 호흡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 문제는 국내 환경, 남북관계, 국제 환경이라는 세 차원이 서로 밀접하게 연계된 형태(순환적 연계구조)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느 한 차원에서라도 침체 내지 정체가 발생하면 다른 차원에도 영향이 곧 파급된다. 실제로 북한의 핵개발은 단지 동북아 안보질서를 혼란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국내 정치적 갈등을 유발하고 남북관계의 진전을 방해하는 등 악순환을 초래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위한 유관국 사이의 모든 대화 통로를 막고 있다. 즉, 한반도 문제는 동맥경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아무리 긴 호흡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드레스덴 선언의 실천을 위해 필수적인 신뢰 형성이 남북 간에 조금씩이나마 축적되려면, 현재 막혀 있는 연계 구조에 피돌기가 일단 시작돼야 한다.
체제 생존에 집착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태도를 감안하면 북한 정권이 동맥경화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결정적인 변화, 즉 자발적으로 핵개발을 포기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6자회담의 재개이든 남북대화 및 관계 개선이든 피돌기를 위한 시작은 오로지 우리의 용단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 및 중국과의 협조를 기반으로 북한과 대화 및 협상의 물꼬를 여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한·미·일 사이, 그리고 미·중 사이에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더욱 적극적인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만약 6자회담이 재개된다면 우리는 신뢰 축적을 위한 남북대화에 좀 더 유연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작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남북 당국 간 대화 넘어 주민 간 교류로 확산돼야
남북한 차원이든 국제 차원이든 대화 및 협상의 장이 마련되면 신뢰 프로세스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 몇 가지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먼저 사안의 성격에 따라 상이한 접근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안보 문제는 기본적으로 상호 신뢰의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협력을 강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남북한 사이에 합의되기란 매우 힘들다.
북핵 문제를 비롯해 군비통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등과 같은 이슈들은 현실적으로 동북아지역의 문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 정권의 체제 생존에 관한 우려도 우리의 힘만으로 결코 해소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 안보와 관련한 제도는 국제적 차원에서 풀어가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다.
이처럼 국제정치적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는 접근은 ‘한반도 평화통일과 동북아 평화협력의 선순환 모색’이라는 과제로 상징화된다. 과거부터 항상 강조됐던 이 과제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세 차원의 연계가 선순환돼야 한다. 당장 우리가 할 일은 선순환의 모멘텀을 확보하고 증대시키는 것이다.
만약 국제 환경이 부과하는 제약 속에서 강대국의 시각으로만 한반도 문제를 바라본다면, 강대국이 주도하는 동북아 질서에 갇혀서 우리가 생각하는 당면 과제의 추진조차 스스로 제약하거나 심지어 포기하는 상황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차적 태도는 남북관계의 질적 개선을 위한 대화와 협상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은 기본적으로 민족 문제 해결의 정당성 때문에 어떤 강대국도 반대하기 어려우며, 결국에 가서는 한반도 문제와 직결된 동북아 질서의 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거듭되면, 강대국들의 적극적 대응이 불가피하며, 자연스럽게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의 실현 가능성이 제고될 것이다. 이는 과거 독일의 ‘동서독 기본조약’의 체결이 ‘헬싱키 프로세스’의 시동을 걸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남북 당국 간 대화를 넘어 남북 주민들 간의 교류로 확산되는 남북관계의 질적 개선을 위해서는 상호 호혜적 이익을 기대할 수 있는 사안을 중심으로 대화와 협상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 당국이 추구하는 경제적 이익과 우리가 원하는 인도적 문제, 북한의 노동력과 우리의 자본 및 기술력을 통한 경제적 이익 추구 등 개성공단 사례처럼 상호 이익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업을 발굴하거나 확대해야 한다.
예를 들면 농업 분야 개발 협력, 북한 자원 개발, 새로운 자유무역지역 개발 등의 사업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업을 위한 협상 과정에서 누가 먼저, 그리고 누가 더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계산 방식을 둘러싸고 협력의 최대 걸림돌이 발생할 것이라는 점이다. 남북한 교류·협력 사업의 특성상 객관적이고 산술적인 대차대조표를 만드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남북관계의 개선 과정에서 이익 계산 문제는 기본적으로 우리 내부의 통일 기반, 즉 통일 지향적 정치·사회문화 기반의 확립 정도에 달려 있다. 소위 남남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대북·통일정책이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왔다. 민주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어떠한 대북·통일정책도 실질적 추진력을 얻기 힘들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올바른 민주시민교육이나 통일교육을 정착시킴으로써 내적 통일 기반을 다지는 것이 선결돼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장차 국민들은 단순히 이념 논쟁이나 정치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각자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한반도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발판으로 통일 문제와 관련된 각종의 대내외적 어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한반도 문제의 복잡성 탓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정책이 단기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 쉽지 않다. 그러한 만큼 현 정부는 중·장기적 구상을 바탕으로 임기 내 그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한편, 통일의 주춧돌을 놓는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