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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전하다│또 다른 시선

“나의 소원도 통일” 독일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56년 전 부산에 와서 빈민구제와 학교·조산원 설립 등 한국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달동네의 성자’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안톤 트라우넬 92). 건강이 많이 쇄약해진 상황에서도 통일에 대한 인터뷰만큼은 꼭 하겠다고 해서 허락된 시간, 그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우리말로 직접 불러주었다(음성듣기). 북한주민들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통일에 이르는 ‘천 개의 길’이 있다고 말하는 안토니오 신부의 마지막 소원은 한반도의 통일이었다.

'가난한 모든 이들의 아버지' 하 안토니오 몬시뇰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과 울타리를 같이하고 있는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한국본부 사제관. 안내를 받고 들어가자 독일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이 의자에 앉아 편안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건강이 염려되었다.
“나는 92살 할아버지니까 여러 가지 좋지 않은 건강상의 일이 있어요. 기관지가 좀 나쁘고, 한 세 달 전부터 신경통 때문에 병원 치료를 받고 있어요.”
안토니오 몬시뇰은 ‘파티마의 세계사도직’인 일명 푸른군대의 한국본부장이며, 지난 2005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명예 고위 성직자인 ‘몬시뇰’에 임명됐다. 2011년에는 제1회 협성봉사상 대상을 수상했고, 부산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신부로 재직할 당시 마을 방문 모습. 안토니오 신부는 36살 때 독일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1958년 부산으로 왔다. 당시 부산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굶주린 피란민들이 많았다. 그는 원조 물자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우암동 일대의 판자촌을 돌아다니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당시 ‘이 지역의 피난민 5만여 명 중 몬시뇰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라 불렀다.

1965년에는 독일에서 후원받은 재봉틀 10대를 밑천으로 한독여자실업학교(2009년 부산문화여자 고등학교로 개명)를 세워 봉제기술을 가르쳤고, 이 학교 졸업생 중 매년 100여 명이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했다. 또한 길거리를 배회하던 장애 아동 7명을 사제관으로 데려와 직접 키우기도 했다. 안토니오 몬시뇰의 어머니인 카롤리나(1971년 7월 타계) 여사의 일화도 유명하다. 1963년 전재산을 처분해 아들에게 3억여 원을 지원해주었고, 당신은 시립 양로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안토니오 몬시뇰은 이 돈으로 행려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걸인들을 모아 돌보는 ‘사랑의 집’을 건립했다. 그밖에 1977년에는 교회조산원을 설립해 1993년 문을 닫을 때까지 신생아 2만6천여 명의 출산을 도왔다.

적기라 불렀던 부산 남구 우암동. 한복입은 신자들과 찍은 단체사진.

우리의 소워은 통일, 나의 소원도 통일

안토니오 몬시뇰에게 통일에 대한 생각을 묻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기관지가 좋지 않아 저음부분은 들리지 않았고 중간중간에 잔기침을 참아가며 노래해야 했지만 수녀의 도움을 받아 끝까지 불렀다.
“처음에는 그 노래를 몰랐는데 너무 좋아요. 아이고, 이 좋은 내용을 미국에 가서도 전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디서건 모이면 항상 이 노래를 불러요. 얼마나 아름답고 중대한 노래인가요.”

그는 애국가도 매우 좋아한다고 말했다. 3년 전 협성봉사상 대상 수상소감에서 난데없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를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축하객들도 처음에는 의아해 하다 애국가를 조용히 따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가사에 ‘우리나라’라는 말이 나와요. 독일에서 ‘우리나라(unser Land)’라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매우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남한뿐이라는 것이지요. 북한도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1974년 임진각에서 열린 평화통일 기원미사. 안토니오 몬시뇰은 반드시 한반도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주민들의 인권 탄압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현재도 월요일마다 250여 명의 신자와 함께 묵주기도를 한다. 또한 1974년 이래 매년 5월 임진각을 찾아 북한 주민의 구원과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미사를 열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성모님의 마지막 발현일인 10월 13일을 전후하여 전국의 뜻있는 신자들이 모여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미사를 하는데 이때에는 각 교구별로 돌아가며 실시한다. 특히 1974년에 처음 열린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한 미사’는 임진각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교황대사 등 1만2천여 명이 참석한 바 있다.
현재 임진각에는 파티마 성모 순례성당을 건립 중이다. 인근 대지 1,000평에 성당을 신축해 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장소로 만든다는 계획.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한 여성이 평화통일을 위해 임진각 성당 건립에 보태라며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 이기심 버리고 통일 위해 노력해야

안토니오 몬시뇰이 이처럼 북한주민들의 인권에 관심이 많은 것은 자신도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4년간 참혹한 전쟁을 겪었고, 종전 후 소련군 포로로 3년 7개월간 수용소 생활을 하다 석방된 경험이 있기 때문. “그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이(북한) 사람들 무슨 고통을 당할까 안타까워요. 난 유고슬라바이아에서 그렇게 심하게 당하진 않았는데, 북한은 박해가 아주 심하다고 들었습니다.”
안토니오 몬시뇰은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한다. 북한은 절대 우리의 적이 아니고 북한주민 자체를 미워해서는 안 되며, 도와줘야 할 상대라고 강조했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 젊은 사람들이 요즘 통일에 무관심해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기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6.25 전쟁 당시 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유엔군으로 참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 결과 남한은 자유를 갖게 되었고, 지금 젊은 학생들은 맘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기심을 버리고 북한 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서, 통일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안토니오 몬시뇰은 대학생과 청소년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 매스컴을 통해서 통일운동의 붐이 일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북한 주민을 우리가 도와줘야 해요. 한국 사람들, 서로 잘 도와줍니다. 북한에 대한 오해도 있고 또 북한 지도자들이 문제인 것이지, 모른척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이 많고 신앙 깊어

안토니오 몬시뇰은 “한국에서 가장 힘든 것이 한국말이고, 가장 좋은 것은 한국사람”이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이 따뜻한 마음씨를 갖고 있고 늘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 감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성급함도 보인다며 웃었다.
또 한 가지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특정 종교와 관계없이 ‘신앙심’이 깊은 것 같다고 말한다.
“옛날부터 임금이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산에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어서 믿지 않아도 이해해주는 사람들 많아요.”
하 안토니오 몬시뇰 그는 처음 부산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많은 한국인이 굶주리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자신에게 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기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행이 식료품을 나눠주거나 병원에 보내거나 학교에 보낼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며 한국인들과 처음 만났던 오랜 과거를 회상했다.
“한 번은 청소년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서성거리고 있었어요. 학비가 없어 쫓겨났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도와줬어요.”
20여년 뒤 안토니오 몬시뇰은 이들 중 한 명을 1980년대에 미국 뉴욕에서 만났다.
“내 손목을 잡아끌더니 몬시뇰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미국에서 자리를 잡았다면서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1천 달러를 주면서 당시의 학비를 돌려드린다고 하더라고요.”

사랑이 있으면 통일로 가는 천 개의 길이 있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 안토니오 몬시뇰에게 앞으로의 바람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이젠 나이가 많아서 돌아다니기 힘들어요. 통일을 위해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일깨워주고 싶은데 못하니까 안타깝습니다.”
환절기 때문에 기관지가 좋지 않은 그는 말하는 동안 계속 기침을 했고 식은땀을 흘렸다. 성당 관계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무기예요. 기도의 힘으로 피 흘리지 않고 통일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안토니오 몬시뇰은 현재 종교 잡지 발행, 강연, 기도회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통일의 중요성을 인식시켜주고 있다. 또한 지난 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 내 소원도 통일(아베마리아)’이라는 책을 출간한데 이어, 회고록도 준비 중이다. ‘불에 뛰어든 사람’이라는 자서전이 30년 전에 출판됐는데, 그 사이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보충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 달동네의 성자’로 60여 년 간 한국인 곁에 머물며 빈민구제와 통일을 위해 헌신한 노(老)신부는 끝으로 그는 이런 말을 전했다.
“독일 속담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고, 사랑이 있으면 천 개의 길이 있다. 사랑이 있으면 돼요. 같은 민족이고 본래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많은 길이 생길 것입니다. 통일은 꼭 이뤄질 것입니다.”
독일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

파티마의 세계사도직은? 1917년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메시지를 실천하며 기도하는 평신도 단체이다. 죄인의 회개와 세계 평화, 그리고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와 희생과 보속을 실천하며 특별히 묵주기도를 많이 한다. 1948년에 미국에서 창설되었으며 사제와 평신도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무신론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소련의 회개와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마리아의 푸른색 망토를 본 따서 '푸른 군대(Blue Army)'라고 불렀는데 1987년에 ‘파티마의 세계사도직(World Apostolate of Fatima)’로 명칭을 바꾸었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은 1964년 파티마의 세계사도직을 한국에 도입했다.

<글. 기자희 / 사진. 기자희,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한국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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