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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을 만나다│느낌있는 여행

푸르른 봄이 내린 날 전북 부안

툭툭, 겨우내 꽁꽁 숨겨뒀던 꽃봉오리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밀 때면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었던 듯 바람이 불었다. 막 태어난 어린 생명의 몸을 핥아주는 어미의 본능처럼. 봄바람은 생채기 하나 없이 보송한 꽃잎을 격려하듯 쓰다듬는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휘청거리는 꽃송이를 기대했던 여행길. 아직은 흐드러진 꽃송이 대신 채 만개(滿開)하지 못한 꽃봉오리가 대부분이었지만 섣불리 실망은 하지 않는다. 우리의 봄은 이제 시작이니까. 푸르른 봄이 내리던 날, ‘바람의 땅’ 전라도 부안의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봄을 품은 천 년의 미학, ‘내소사’

봄에 잉태된 모든 것들은 어째서 그리도 여린 걸까? 부슬부슬 떨어지는 비마저, 봄이란 이름을 앞세우자 금세 청순하게 느껴진다. 부안에서 가장 푸르른 봄을 만날 수 있다는 천년사찰, 내소사를 찾은 날에도 여리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오시는 분은 모든 일이 소생되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는 사찰은 길게 뻗은 전나무 숲길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내리던 봄비가 조신하게 소리를 낮추는 동안 숲길을 걷는다. 꾹꾹 발자국을 내어 걷게 되는 150년 수령의 숲길은 향기롭다. 나무와 흙, 어디선가 실려 온 꽃내음까지. 자연의 내음이 가득한 숲과 야트막한 돌다리, 어느 봄날, 바람결에 꽃잎 흩날릴 벚나무 길까지 지나자 알록달록 연등을 단 사찰이 보인다. 1300년간 자리를 지켰다는 사찰은 담담하게 객을 맞이한다.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 대웅전의 꽃살문은 세월에 흐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더 오래 시선을 잡는다. 누군가 손끝으로 문질러 뭉개진 듯 보이는 꽃잎들을 뒤로 한 채 비죽비죽 사찰 안을 구경한다. 온 세상의 봄을 모아놓은 듯 벚꽃을 시작으로 목련과 산수유, 개나리까지 구석구석 봄꽃들이 자리해 보물찾기하듯 둘러보기 좋다. 내소사

‘심심한’ 염전의 뜬 구름이야기, ‘곰소염전’과 ‘곰소젓갈단지’

곰소염전, 곰소젓갈단지소풍 나온 아이마냥 사찰 앞마당을 휘젓고 다니는 동안 비도 그쳤으니, 슬슬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려본다. 천일염으로 유명한 곰소염전과 깨끗한 소금으로 담근 젓갈로 유명한 곰소항이 인근이다.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소금밭을 보고 싶다면 한 여름이 좋고, 텅 빈 염전 위 눈발이 흩날리는 낭만을 기대했다면 겨울에 찾았어야 할 여행지다. 얕게 채워진 소금물위로 간혹 작은 파장이 번지는 것 외에는 지루할 만큼 평온한 봄날의 염전은 조금 심심하다. 염전 옆 소금창고를 기웃대다 그 마저 재미없어 투덜대는 사이 느릿하게 구름이 흘러간다. 하늘 위에도 그 하늘이 거울처럼 비친 염전에도, 하릴없이 구름이 흐른다. 조금 심심했던 염전을 뒤로한 채 이번에는 짠 내 가득한 곰소젓갈단지로 향한다. 서해에서 건저 올려 천일염으로 익힌 곰소의 젓갈은 감칠맛이 좋아 밥도둑이 따로 없다. 직판장과 젓갈정식을 파는 식당도 여럿이니 이쯤에서 배를 든든히 채워도 좋다.

곰소항

몽돌해변이 들려주는 자장가, ‘전라좌수영세트장’

게 눈 감추듯 젓갈 한 젓가락에 쌀밥 한 공기를 비워냈더니 등을 다독이는 봄 햇살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이왕이면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 낮의 오수를 즐기고 싶어,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 해안도로를 달린다. 시인 안도현이 ‘마른 코딱지 같은 생활 따위 떼어내고 떠나고 싶다’고 말했던 모항과 사진 촬영 명소로 유명한 솔섬 등이 차 창밖 풍경 속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급할 것 없이 달리다 도착한 곳은 채석강과 인접한 궁항. 이곳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등을 촬영한 전라좌수영세트장이 있다. 여타 드라마세트장과 달리 바닷가 앞, 외딴 곳에 위치한 덕에 더 없이 한적한 것이 최고의 장점. 무료개방에 관리인이 따로 상주하는 것도 아니어서 남들 눈치 없이 넓은 대청마루를 차지하고 누워 뒹굴거리는 호사도 누릴 수 있다. 고운 모래해변으로 이루어 진 동해와 달리, 갯벌과 몽돌이 주를 이루는 서해는 파도소리부터 다르다. 사그락, 사그락. 마루에 대자로 누워 눈을 감자, 해변이라고 이름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아담한 몽돌해변으로 파도가 들이치는 소리가 꿈결처럼 번진다. 전라좌수영세트장

동네 마실하듯 걷는, ‘격포항’과 ‘해넘이 공원’

그렇게 한껏 게으름을 부리고 나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오후 해가 더 기울기 전에 지척의 채석강은 둘러봐야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에서다. 이왕 뗀 발걸음 채석강에 닿기 전 봄 조개와 주꾸미로 유명한 격포항부터 들렀다. ‘봄철 낙지’로 불리는 이맘때의 주꾸미는 노르스름한 알을 품고 있어 오독오독 씹는 맛이 일품. 그래서 일반적인 볶음보다 숙회나 회로 즐기기를 권한다. 어업용 배는 물론 요트와 유람선까지 오밀조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격포항에는 변산마실길 중 제 1코스 해안누리길인 해넘이 공원도 위치하고 있다. ‘격포항’과 ‘해넘이 공원’동네 ‘마실’가듯 편한 길이란 이름처럼 평탄한 길을 걷다보면 지천에 흐드러진 야생화와 봄꽃들을 구경할 수 있으며, 특히 해넘이 풍광이 아름답다. 또 공원 위까지 오르기 귀찮다면 아래쪽에 조성된 공군 군사시설 야외전시도 이색 볼거리를 제공한다.

세월과 정성이 쌓아올린 자연의 서고, ‘채석강’

그리고 격포항에서 해변 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그 유명한 채석강이 있다. 변산반도 서쪽 끝자락, 수 만권의 책을 층층이 쌓아올린 모습을 한 채석강은 약 7천만 년 전에 퇴적한 퇴적암의 성층이 바닷물 침식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중국 당나라의 이태백이 즐겨 찾았던 채석강과 흡사하다하여 이름 지어졌다. 좁은 초입을 지나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썰물이 빠져나간 바위 위를 걸어 채석강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사실 채석강은 멀리서 바다와 한 눈에 담았을 때 더 신비롭다. 하지만 그랬다면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무더기들 사이 둥지를 튼 바다생물과 속이 아득히 깊어 보이는 해식동굴 등을 만나기 어려웠을 터. 무엇보다 바다가 정성껏 닦아내 윤이 반들반들 나는 몽돌해변의 평온함을 만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채석강

이 땅의 모든 아들들을 위한 진혼가, ‘호국영렬탑’

호국영렬탑 바다가 아닌 부안의 전경을 한 눈에 담고 싶다면 성소산의 서림공원으로 향해보자. 조선시대 여류시인 매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매창의 시비는 물론 유난히 파란색 지붕이 많은 부안시내의 아기자기한 모습도 볼 수 있다. 또 전망대 뒤 넓은 공터에는 한국전쟁 당시 순국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호국영렬탑도 위치해 있다.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라져간 이 땅의 자식들의 뜻을 기리는 곳인 만큼 잠시 발길을 멈추고 묵념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호국영렬탑

제대로 ‘짠 맛’ 젓갈정식과 밥상위에 핀 백합 ‘백합탕’

백합탕개화간척지에서 재배한 계화 쌀로 지은 윤기 좌르르한 흰 쌀밥에 새우젓, 어리굴젓, 오징어, 꼴뚜기, 가리비, 통낙지, 창란, 명랑, 청어알, 토하젓 등 14가지의 젓갈과 견과류 볶음, 무말랭이, 묵은지와 깻잎, 지역 특산물인 부안 김까지. 가지런한 찬그릇이 밥상을 빼곡히 채운다. 한쪽에서는 백합탕이란 이름만큼 모양새도 고와보이는 탕이 보글보글 끓어올라 배고픈 객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데 주인장의 젓갈 설명은 길기만 하다. 씹는 맛도 있는 젓갈은 깊은 감칠맛에 입맛을 다시게 만들고 국물이 맑은 백합탕은 시원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이미지

<글. 권혜리 / 사진. 나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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