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IB와 사드는 우리 외교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상징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 가입은 동맹국인 미국이 불편해하는 사안이었고, 미국이 원하는 사드의 한국 배치는 우리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이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이런 미묘한 갈등 국면에서 AIIB 가입과 사드 배치가 과연 우리에게 난처한 선택의 문제이기만 한지, 우리의 외교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점검해본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Asia Infrastructure Investment Bank)과 사드(THAAD·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고고도 미사일 방어). 이 두 가지는 우리나라 외교의 곤궁한 처지를 대표하는 것처럼 논란의 대상이 됐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에 한국이 가입하는 문제는 동맹국인 미국이 불편해했고, 미국이 원하는 사드의 한국 배치는 우리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이 노골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사이에 선택을 강요받아온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질곡, 곧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격이 되는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는 당연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것은 오히려 축복”이라고 했다가 안이한 상황 인식이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큰 일 났네’라고 할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논란을 잠재우진 못하고 있다.
도대체 AIIB와 사드의 무엇이 문제인가.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외교적 난제인가.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4월 15일 중국 재정부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34개국, 유럽 20개국, 미주 1개국, 아프리카 2개국으로 구성된 AIIB 창립 멤버를 확정해 발표했다. 아세안 10개국, 브릭스(BRICS) 5개국(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모두 포함됐다. 미국, 일본, 캐나다를 제외한 G7 국가, 그리고 미국을 추종하는 호주도 포함된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미국 외교의 대실패라는 평가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막지 못한 ‘실패’가 아니라 애초에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실수’에 있다. 그리고 그 장기적 결과는 미국에 크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AIIB에 가입했다고 해서 미국에 미안해할 일은 전혀 아니다.
21세기 미국의 국가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부상에 어떻게 대처할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국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충돌할 경우 단호히 대처하지만 냉전과 같은 전면적 봉쇄와 대결은 대안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중국을 포용하되 중국의 국력이 국제정치적 영향력으로 전환되는 것은 되도록이면 지연시키는 게 좋다는 것이 대체적 견해다.
미국의 AIIB 설립 저지는 ‘실패’가 아니라 ‘실수’
<사진> 대니얼 러셀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오른쪽)가 지난 3월 17일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러셀 차관보는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우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중국이 영향력 확대를 시도할 때, 미국은 두 가지를 따진다. 첫째는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 직접적이고 중대한 위협이 되는지, 둘째는 중국의 시도가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다. 미국의 이익에 직접적이고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성공 확률과 무관하게 반대해야 한다. 완전히 저지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가급적 그 효과를 약화시켜야 한다. 위협의 정도가 크지 않다면, 위협 시도의 성공 확률을 따진다. 성공 확률이 높지 않다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성공 확률이 높은 경우 차라리 그것을 다독여 장기적이고 대국적인 견지에서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이끄는 것이 낫다.
AIIB는 바로 이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즉 AIIB의 설립은 미국의 이익에 직접적이거나 중대한 위협이 아니다. 또 그 명분과 현실을 고려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그것을 저지하려고 했던 미국의 전술적 선택은 ‘대실수’였다.
우선 명분 측면을 보자. AIIB는 고도성장을 하는 아시아 경제를 뒷받침할 인프라의 부족, 그리고 그것을 충당할 재원 부족이라는 현실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개발원조라는 명분이 있다. 또 지금의 세계 3대 금융기관, 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의 지배구조가 불공평하다는 측면도 있다. 세계은행은 미국, IMF는 유럽, ADB는 일본이 총재직을 독점해왔고, 경제력에 비례해 지분과 의사결정권을 분배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과소 지분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미국도 인정하는 문제다.
현실적 측면에서, 중국은 약 4조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가 있다. 돈이란 유통되는 것, 외환보유액을 금고에 쌓아두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중국은 쌓아놓은 외환을 활용해 독자적인 투자은행을 설립하고 그것을 통해 좀 더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영향력 확대를 기할 수도 있었다. 미국이 가장 우려해야 하는 바, 또 가장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냉전 시대 당시 소련의 행태가 바로 그랬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마땅히 AIIB를 포용했어야 했다. 체면상 직접 참가하지 못하면 동맹국들의 참가를 반대할 게 아니라 독려해야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영향력을 희석하고, 그 운영을 다자주의적 금융 질서, 경제 질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도록 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으니 이것은 미국 외교의 실수일망정 실패는 아니다.
우리의 처지를 보자. AIIB 참여는 저개발국 개발 지원이라는 명분이 있다. 저금리 시대의 현명한 투자이자, 크게는 세계 건설시장 활성화를 통해, 작게는 인프라 사업 참여를 통해 우리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는 실리도 있다. 또 그것을 북한의 인프라 구축에 활용할 수 있으니 일종의 국제적인 통일 재원인 것이다. 우리 외교부가 이 점을 미국에 설득하지 못하면 그때 가서 외교부를 질책할 일이다.
사드, 한국 ‘배치’와 ‘구매’는 다른 문제
<사진> 지난 4월 15일 중국이 발표한 AIIB 참여국가에는 브릭스 5개국이 모두 포함되었다. 사진은 지난해 브릭스 정상회담에 참여한 러시아, 인도, 브라질,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 정상들(왼쪽부터).
사드의 한국 배치에 대해 우리 정부는 미국이 요청한 바도 없고, 미국과 협의한 바도 없으며, 아직 결정된 바도 없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또 4월 10일 한국을 방문한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도 사드는 아직 생산 단계이지 배치를 협의할 단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초래된 이유는 중국이 한반도 사드 배치를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사드란 무엇이며 어떤 점이 문제인가.
우선 사드를 ‘고고도(高高度) 미사일방어’ 체계라고 번역하는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라는 이름에서 ‘High’만 읽을 게 아니라 ‘Terminal High’라고 붙여 읽어야 한다. ‘Terminal’이란 추진→비행→진입으로 구성되는 탄도미사일의 궤도 중 마지막 단계를 의미하니 ‘진입고도’라고 번역하는 게 옳다. 그래도 150km가 넘는 고도에서 작동하니 ‘고고도’가 맞기는 하다.
그리고 이것이 이 체계의 장점이다. 사드는 적의 미사일을 추진 단계에서부터 추적해 그 궤적을 정확하게 계산하고 가속도가 붙기 전인 진입 초기 단계에서 요격함으로써 높은 명중률을 자랑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광역 레이더가 필요한데 그 레이더의 반경이 중국에 미치니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부터 미국이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미사일 방어(Missile Defense) 체계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의 불만과 불안이 있다. 미사일 방어는 그야말로 방어체계이기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한다. 다만 미국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같은 공격무기로 선제 공격할 경우 그들의 제2차 가격 능력, 즉 보복공격 능력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반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 배치된 사드를 MD의 연장선에서 접근하는 것은 지나치다. 그것은 한반도에 진입하는 미사일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국이 반격의 대상으로 한반도를 설정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지금 논의되는 것은 미군이 보유한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는 것이지 한국이 구매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주한미군의 보호를 위해 자국의 비용으로 배치하는 것을 굳이 반대할 명분이 없다. 또 그로써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억지하고, 나아가 유사시 요격한다면 그 혜택을 누리는 우리로서는 고마운 노릇이니 반대할 이유도 없다. 다만 8억 달러, 약 9000억 원에 달하는 사드를 ‘구매’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로, 비용과 효과를 신중히 따져봐야 할 일이다.
사드 배치가 북한의 대화 의사 유도할 수도
일부에서는 사드 배치가 군비 경쟁을 초래할지 모른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 요격미사일의 개발과 배치를 금지하는 ABM조약을 맺은 것이 그 때문이었다. 즉 상호 핵 억지 상황에서 일방이 MD를 구축하면 타방은 제2차 가격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 MD를 무색하게 할 공격 능력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처지에서 사드 배치로 북한이 보유한 미사일이 무력화된다면 그것을 상회하는 미사일 능력을 구축하고, 그에 따라 한국도 사드를 더욱 강화하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북한이 오히려 대화에 임하는 유인이 될 수도 있다. 1980년대 중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전략방위구상’이라는 이름으로 MD를 추진하겠다고 하자 그로써 초래될 추가적 군비 증강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상호 군축을 추진함으로써 냉전이 종식됐던 역사도 있다.
결국 우리로서는 미국의 사드 배치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중국의 우려와 반대도 근거가 약하다. 그럼에도 논란이 그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정부가 소위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AIIB의 경우는 미국이, 사드의 경우는 중국이 ‘오버’했다. 그들이 ‘오버’한 이유는 모든 문제를 전략적 경쟁의 시각에서 보는 ‘강대국식 사고방식’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이 아닌 우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갈팡질팡할 것이 아니라 우리 처지에서 우리 식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확고하게 처신해야 한다.
‘강대국식 사고방식’은 미·중관계를 전략적 측면에서만 접근해 상대의 득이 곧 자국의 실이라고 보는 제로섬 사고이며, 달리 보면 냉전적 사고와 다르지 않다. 미국의 ‘오버’가 자충수가 되듯이 중국의 ‘오버’도 자충수로 끝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자충수가 된 것은 바로 이를 낳은 냉전적 사고가 시대착오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견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외교는 그 같은 시대적 상황을 빨리 읽고 강대국식 사고, 냉전적 사고에서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AIIB와 사드 문제는 그 같은 사고를 탈피해 우리의 외교력을 다듬고 외교적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이다.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
오하이오 주립대 정치학 박사.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및 외교안보연구실장, 민주평통 상임위원 역임. 현재 외교부 · 통일부 정책자문위원이자 중앙대 국가대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