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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 바래봉과 산 아래 비전마을

핏빛 띤 꽃불 활활 환상의 철쭉 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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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훈 여행작가

해마다 5월이 되면 지리산 서북릉의 바래봉(1165m) 일대에는 꽃불이 활활 타오른다. 만개한 철쭉꽃이 온 산자락을 붉게 물들인 광경은 요원의 불길처럼 섬뜩하고 맹렬하다.

바래봉은 해발 1000m가 넘는 고봉(高峰)이다. 그런데도 정상에 오르기가 수월하다. 산행의 기점이 되는 전북 남원시 운봉읍내의 평균고도가 해발 400여m나 된다. 등산로의 경사도 비교적 완만하다. 아름다운 철쭉 꽃밭도 구경하고, 꽃밭에 앉아서 무르익은 봄날의 정취를 느긋하게 즐겨도 네댓 시간이면 충분하다. 온 가족과 함께 봄나들이를 겸한 산행 코스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바래봉 산행은 대체로 남원시 운봉읍 동천리의 지리산허브밸리(063-620-4891)에서 시작된다. 주차장, 허브테마파크, 허브체험농원, 지리산자생식물환경공원 등의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곳이다. 지리산허브밸리를 지나 조금만 오르면 ‘운지사’라는 절 입구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든다. 이미 길가 곳곳에 무리 지어 핀 철쭉이 사람들의 마음을 달뜨게 한다. 차가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등산로는 산비탈의 경사를 극복하기 위해 ‘갈 지(之)’ 자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약 1시간 30분쯤 오르면 마침내 능선에 들어선다.

능선의 조망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지리산 100리 주능선의 웅장한 자태와 제법 너른 운봉고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래봉 정상을 코앞에 둔 등성이에 올라서면 바래봉, 팔랑치, 세걸산(1198m) 등의 지리산 서북릉을 붉게 물들인 철쭉 꽃밭이 환상처럼 펼쳐진다. 특히 바래봉 삼거리에서 팔랑치 사이의 0.9km쯤 되는 능선에 피어난 철쭉은 붉은빛이 지나쳐서 숫제 핏빛을 띤다. 이곳은 원래 운봉목장의 면양 방목장이었다. 호주에서 들여온 양들이 자유롭게 풀을 뜯던 곳이다. 식성 좋은 양들은 풀과 작은 나무를 닥치는 대로 뜯어먹었다. 하지만 독성이 있는 철쭉만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뒀다. 그 덕택에 오늘날과 같은 철쭉 꽃밭이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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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높은 산에서만 자라는 산철쭉은 다른 나무와 섞여서 제멋대로 자란다. 키가 크고 꽃도 듬성듬성 달려 있는 데다 꽃 빛깔은 엷은 분홍색이다. 하지만 바래봉의 철쭉은 사람의 키를 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편이다. 철쭉끼리만 둥그렇게 군락을 이루고, 꽃 빛깔이 아주 정열적으로 붉다는 것이 일반적인 산철쭉과 다른 점이다. 더욱이 철쭉 군락지에는 푹신한 초원이 형성돼 있다. 붉은 철쭉과 초록빛 잔디가 절묘하게 조화된 풍경은 마치 정성스레 다듬어놓은 인공정원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바래봉 일대의 철쭉 절정기는 해마다 날씨에 따라서 약간씩 달라진다. 대체로 등산로가 시작되는 산기슭은 4월 하순~5월 초순, 산 중턱은 5월 5일 전후, 그리고 바래봉 철쭉의 백미로 꼽히는 능선길 주변의 철쭉 군락은 5월 10~20일 사이에 절정을 누린다. 매년 4월 중순~5월 중순 사이에는 ‘바래봉 철쭉제(문의 운봉읍사무소 063-620-6601)’도 열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4월 25일~5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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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운봉읍 서천리 동구의 당산에 세워진 돌장승.

토속신앙, 판소리 두루 얽힌 바래봉 아래 마을

바래봉 아래의 운봉고원 일대에는 옛사람들의 공동체의식과 토속신앙을 엿보게 하는 돌장승(돌벅수)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국가중요민속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된 서천리 당산의 장승 한 쌍이 눈여겨볼 만하다. 마을 동구의 당산을 지키는 장승이다. 몸통에는 각각 ‘방어대장군’과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세모꼴의 벙거지를 쓴 머리에 왕방울만한 눈, 그리고 뭉뚝한 주먹코, 꼭 다문 합죽이 모양의 입 등에서 과장된 위엄보다는 절로 미소 짓게 하는 해학이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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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파괴한 황산대첩비.
2. 남원시 운봉읍 남천 냇가의 피바위.

바래봉 아래의 지리산허브밸리 주차장에서 약 5km 거리에는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이 있다. 비전(碑殿, 비각)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마을에 조선 선조 10년(1577)에 세운 황산대첩비(사적 제104호)가 있다. 고려 말인 1380년(우왕 8)에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하지만 이 비는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되었다. 조선총독부는 황산대첩비를 동강낸 것도 모자라서 비문까지 긁어내 읽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참으로 옹졸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만행이다.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약 2km 떨어진 남천 냇가에는 붉은 빛깔을 띠는 ‘피바위’가 있다. 황산대첩 당시에 이성계가 쏜 화살을 맞고 죽은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의 피가 이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비전마을은 동편제 판소리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동편제의 창시자인 ‘가왕(歌王)’ 송흥록과 그의 아우 송광록, 여류 명창 박초월 등이 모두 이곳에서 나거나 자랐다. 그중 송흥록은 조선 순조 때의 8명창 중 으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역대 판소리 명창 중에서도 가장 기량이 뛰어나다는 그는 ‘독보건곤(獨步乾坤)’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더욱이 판소리에 진양장단을 처음으로 도입해 판소리의 중시조로도 추앙받고 있다. 현재 비전마을의 송흥록, 박초월 생가 터에는 ‘판소리공원’이 조성돼 있어 동편제 소리의 원류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간간이 이어진다.

내친걸음에 지리산 둘레길도 한두 구간쯤 걸어볼 만하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지리산 둘레길을 가장 걷기 좋은 때가 계절의 여왕 5월과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10월이다. 비전마을은 지리산 둘레길의 2코스(운봉~인월) 중간쯤에 위치하고, 바래봉 초입의 운봉읍내는 지리산 둘레길 1코스의 종점이자 2코스의 시점이다.

TIP

▶바래봉 등산 코스
바래봉 철쭉의 하이라이트 구간은 바래봉 삼거리~팔랑치 사이다. 지리산허브밸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한 사람들은 대개 바래봉 삼거리를 거쳐서 팔랑치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왕복 10.2km 코스이다. 하지만 같은 길을 되돌아오는 것보다는 바래봉 삼거리, 팔랑치, 부운치, 세동치를 두루 거쳐서 운봉읍 공안리의 전북학생교육원으로 하산하는 코스가 권할 만하다. 이 코스의 총 길이는 10.5km이다. 전북학생교육원에서 지리산허브밸리 주차장으로 돌아갈 때에는 택시를 이용한다. 택시비는 승차 정원(4명) 내에서 인원에 상관없이 1만1000~1만3000원쯤 나온다.

▶숙박
지리산허브밸리 내에는 캠핑캐러밴과 오토캠핑장을 갖춘 잼핑홀리데이 남원점(jamping.co.kr, ***)이 조성돼 있다. 운봉읍내에는 그럴듯한 숙박시설이 별로 없다. 남원시 어현동 춘향테마파크 내의 춘향가(063-636-4500)는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 숙박업소이다. 그 밖에 주천면 용담리의 스위트호텔남원(063-630-7100)과 주천면 호경리의 남원호텔(063-626-8551), 남원시내의 윈저호텔(063-625-1801), 인월면 소재지의 자라게스트하우스(063-626-2129) 등이 권할 만하다.

▶맛집
운봉읍내의 황산토종정육식당(063-634-7293)에서는 비계가 얇아서 담백하고 쫄깃한 지리산 흑돼지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동원식당(063-634-0142)은 짬뽕이 맛있기로 소문난 중화요리집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남원 추어탕과 추어숙회의 원조는 새집(063-625-2443)이다. 남원읍내 광한루 근처에는 새집뿐만 아니라 부산집(063-632-7823), 현식당(063-626-5153), 합리추어탕(063-625-3356) 등의 추어탕 전문점에서 본고장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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