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탈북 학생들이 남한 언어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남북한어 번역앱 ‘글동무’를 만든 제일기획 직원들. 왼쪽부터 윤영덕, 정유나, 이미수, 정수영 씨. 주승현 박사는 신변 안전 때문에 촬영에 응하지 못했다.
박창규 동아일보 소비자경제부 기자
탈북 학생들이 느끼는 언어 장벽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들에게 잘 모르는 단어를 형광펜으로 칠해보라고 했더니 조사를 빼곤 거의 모든 단어에 칠을 했을 정도였다. 제일기획 직원들과 탈북자 출신의 주승현 박사가 함께 힘을 모아 남한 말을 북한 말로 전환해주는 스마트폰 앱을 개발한 이유다.
늦은 오후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면 중·고등학생 여럿이 재잘거리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밝은 얼굴로 ‘까르르’ 웃음 짓는 모습이 보기 좋아 흐뭇하다가도 이내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에 등장하는 ‘버카충’이나 ‘점약’ 같은 알 수 없는 표현 때문이다. 버카충은 ‘버스카드 충전’, 점약은 ‘점심약속’의 줄임말이다.
같은 대한민국 영토 안에 사는 사람들도 이처럼 낯선 표현을 들을 때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휴전선 북쪽에서 탈출한 탈북자들이 느끼는 당혹감은 어떨까. 같은 한글을 쓰지만 70년 가까이 떨어져 지내는 바람에 남과 북의 언어는 떨어진 시간 이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언어 장벽을 깨고자 힘을 보탠 사람들이 있다. 바로 제일기획 직원들과 탈북자인 주승현(33) 박사다.
지난해 여름, 광고대행사 제일기획의 윤영덕(40) 프로(‘프로’는 제일기획 직원의 사내 호칭)는 탈북 학생들과 함께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만난 탈북 학생들은 의외로 말이 적었다. 질문을 던지는 친구도 많지 않았다.
의문은 다소 시간이 지난 뒤에야 풀렸다. 남과 북의 언어가 많이 다른 탓에 탈북 학생들은 단어의 정확한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말뜻을 몰라도 질문하기가 창피해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윤 프로가 보기에 탈북 학생들이 느끼는 언어 장벽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예컨대 남에서 종종 쓰는 단어인 개구쟁이, 누룽지, 서비스, 치킨 등은 북에서 각각 발개돌이, 가마치, 삯발이, 닭유찜 등으로 부른다. 윤 프로는 “한 학생은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목숨 걸어도 안 되는 게 있다’며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가는 자신을 한탄했고, 어떤 친구는 이를 비관해 자살 시도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목숨 걸어도 극복하지 못 하는 언어 장벽
실제 남과 북의 언어 차이는 어느 정도나 될까. 전문가들은 생활언어의 30~40%, 전문용어의 60% 이상이 차이 나는 것으로 본다. 국립국어원이 2012년 내놓은 ‘북한이탈주민 한국어 사용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탈북자들은 남에서 쓰는 단어의 절반가량만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성인보다 문화적인 차이에 더 예민할 수밖에 없는 탈북 청소년들의 언어 장벽 문제는 이들의 원활한 정착과 성장을 위해서라도 꼭 해결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인 셈이다.
윤 프로는 회사로 돌아와 탈북 학생들의 언어 장벽을 낮추는 데 동참할 사람을 모았다. 정수영(40), 정유나(39·여), 이미수(36·여) 프로가 힘을 보태기로 했다. 이들은 우선 탈북 학생들이 얼마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지를 알아봤다.
제일기획 직원들이 주승현 박사를 만난 건 이 무렵이다. 주 박사는 군 생활을 하던 22세 때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뒤 연세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은 탈북자 최초의 통일학 박사다. 현재는 명지대에 강의를 나가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과 통일교육원 강사 등을 맡고 있다.
주 박사는 “예전에 대학에서 공부할 때 전문용어의 뜻을 몰라 헤맸던 기억도 있어 흔쾌히 작업에 참여했다”며 “남한에서는 워낙 많은 외래어와 줄임말을 쓰다 보니 탈북 학생들은 실수할까봐 입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펴놓고 탈북 학생들이 잘 모를 만한 단어들을 정리했다. 정수영 프로는 “탈북 학생에게 잘 모르는 단어를 형광펜으로 칠해보라고 했더니 조사를 빼곤 거의 모든 단어에 칠을 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예컨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한 문장인 ‘인터넷이 주는 익명성을 이용하여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누리기도 한다’에서 대다수 단어에 형광펜을 칠했다는 것이다.
제일기획 직원들은 탈북 학생들과의 추가 면담, 전문가와의 상담 등을 통해 사전 형식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적어도 언어 차이 때문에 남한 학생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탈북 학생들이 최소한 교과서 내용은 이해할 수 있어야 남한 생활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봤다”고 말했다.
주된 사용자가 10대라는 점을 감안해 재미있는 요소도 더하기로 했다. 딱딱한 용어 대신 그림을 쓰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단어를 찍으면 바로 북한말로 번역해주는 간편함도 갖췄다. 이렇게 만들어진 앱 ‘글동무’에는 고교 국어교과서 3종에서 뽑은 단어 3300개의 뜻과 예문 등이 담겨 있다. 피자 주문 방법 같은 생활상식도 들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앱 형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단어를 보충하거나 의미를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제일기획 직원들의 바람은 글동무 앱이 통일에 기여하는 하나의 작은 도구가 됐으면 하는 것이다. 주 박사의 바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통일이라고 하면 경제나 정치적인 의미의 통합을 주로 떠올리지만 언어 같은 기본적인 소통 수단의 이해도 매우 중요합니다. 글동무 앱이 남과 북의 차이를 극복하고 좀 더 많은 동질성을 찾을 수 있는 길라잡이가 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