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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지난해 11월 27일 김정은이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김정일 동상 앞에 섰다. 3년 전 김정은은 이곳에서 측근 8명과 회합을 가진 뒤 평양에 돌아가자마자 장성택을 처형했다. 이번엔 무슨 결단을 내렸을까. 지난해 11월 27일 김정은이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김정일 동상 앞에 섰다. 3년 전 김정은은 이곳에서 측근 8명과 회합을 가진 뒤 평양에 돌아가자마자 장성택을 처형했다. 이번엔 무슨 결단을 내렸을까. 트럼프 시대 김정은의 선택은 모처럼 찾아온 개방 기회…
한미 관계 개선에 최선 다하길

핵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북한은 이제 미국으로부터 이를 인정받는 노력을 할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은 ‘예측 불확실한’ 트럼프에 맞서 어떤 전략으로 나갈 것인가.

지난해 11월 27일 김정은이 북한 양강도 삼지연군에 있는 김정일 동상 앞에 섰다. 꼭 3년 만이다. 김정은은 2013년 11월 29일 이곳에서 측근 8명과 회합을 가진 뒤 평양에 돌아가자마자 전광석화처럼 고모부 장성택을 처형했다.

이번엔 무슨 중대 결정을 하기 위해 찾은 것일까. 숙청을 결심하러 간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엔 장성택에 버금갈 정도로 결단이 필요한 숙청 대상은 남아 있지 않다. 한국의 국방장관 격인 인민무력부장도 졸았다는 이유로 대수롭지 않게 죽이는 김정은이 굳이 삼지연까지 가서 처형을 결심할 인물은 없다.

하지만 김정은이 삼지연에 나타난 시점이 미국에서 트럼프 당선이 발표되고, 남쪽에선 박근혜 대통령이 하야 직전에 몰려 있던 때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내부적으론 김정일 사망 5주년이 20일도 채 안 남은 시점이었다. 중대한 정책적 결단을 내릴 시점인 것이다. 북한 노동신문에 따르면 김정은은 이날 김정일 동상 앞에서 “천지풍파가 몰아치고 세상이 천만 번 변한다고 해도 우리 장군님께서 한평생 높이 추켜드셨던 혁명의 붉은 기를 절대로 놓지 말고 장군님의 염원대로 이 땅에 부강·번영하는 인민의 낙원, 사회주의 강대국을 반드시 일떠세우자”고 말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붉은 기를 놓지 않겠다는 발언은 김정일의 유훈인 핵무기 개발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길로 들어서는 순간 부강·번영하는 인민의 낙원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둘은 절대 함께 가질 수는 없는 것들이다.

김정은에게 찾아온 기회

김정은은 2017년 핵무기를 선택할 것인가, 민심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북한은 최고의 시절을 맞을 수도, 체제의 명운이 걸린 최악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희망의 봄이 올 수도, 절망의 겨울이 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김정은에게 찾아온 대외 환경은 분명 절호의 기회다.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 정권이 출범했다. 북한을 훨씬 더 강하게 옥죄겠다고 공약했던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낙마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다.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 대통령은 흥정이 가능한 상대다.

남쪽에선 ‘북한 붕괴’를 외치던 보수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크게 위축됐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다음 번 한국 정부가 김정은에게 손을 내밀 가능성은 훨씬 커졌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던 대북 압박정책에 균열을 낼 기회가 온 것이다.

김정은에게 찾아온 또 하나의 행운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거의 1년이란 시간을 공짜로 벌게 된 것이다. 한국 대선이 6월경에 진행된다면 김정은은 올해 상반기 중으로 미국과 한국 정부의 대외 정책을 판단해 하반기부터 확실한 대미·대남 전략을 한꺼번에 펼 수 있게 된다. 탄핵 사태가 없었다면 2018년 한국에서 새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1년 동안 미국의 눈치를 보며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기다림의 시간을 가질 뻔했다.

김정은의 신년사를 게재한 북한 노동신문.김정은의 신년사를 게재한 북한 노동신문.

하지만 김정은에게 좋은 소식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나쁜 소식은 자신의 최대 무기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확실성’은 김정은이 지금까지 대외 협상에서 휘둘러온 최고의 무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위험한 무기가 트럼프의 손에 가버렸다. 트럼프가 어느 순간 화를 터뜨릴지, 그리고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김정은도, 그를 보좌하는 북한의 최고 전략가들도 현재로선 도저히 가늠하기 어렵다.

이제 김정은은 핵 무장화의 마지막 직선주로를 계속 뛰어갈지, 아니면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가다듬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올해 하반기쯤이면 향후 최소 5년간 평양의 표정이 정해지게 될 것이다.

수상쩍은 북한의 민심

만약 김정은이 핵무기를 선택했다면 사상 최대의 경제 제재 속에서 불만이 급속히 고조될 민심은 무시해도 괜찮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북한의 민심은 전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정은 집권 3년과 5년은 새로운 민심의 변곡점이 된다. 초기 3년은 기대만 심어주면 됐다. 김정은이 갑자기 잘살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도 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면 사람들은 ‘과연 김정은이 우리를 잘살게 만들 수 있을까’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5년째를 맞는 시점에도 변화가 없다면 ‘이젠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해 김정은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지금 바로 그런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김정은은 집권 직후인 2012년 6월 28일 경제개혁 조치를 발표했고, 몇 달 뒤 특구전략도 내놓았다. 이설주를 데리고 나타나 북한 주민들에게 변화의 기대감도 심어주었다.

트럼프 정부 출범은 김정은에게 핵 무장화를 계속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했다. 사진은 북한이 2014년 공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트럼프 정부 출범은 김정은에게 핵 무장화를 계속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했다. 사진은 북한이 2014년 공개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문제는 그뿐이라는 것이다. 3년이 지났지만 북한의 경제 상황은 북한 주민들의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경제개혁도 지지부진했고, 특구도 제대로 굴러가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2년이 더 지났지만 ‘독재자’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되고 경제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올해 들어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자아반성을 한 것도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은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올해에는 인민의 참된 충복, 충실한 심부름꾼이 될 것을 새해의 이 아침에 엄숙히 맹약한다”고 하면서 머리까지 숙였다.

이런 행동은 민심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쇼’는 이제 더는 통하지 않는다. 이젠 정말로 민생을 돌보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김정은이 문을 열 때가 왔다

김정은에게 최대 관심사는 핵무기 보유가 아닌 체제 유지다. 핵무기 때문에 자기가 죽게 된다면 얼마든지 핵은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체제 유지에 민심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핵실험은 얼마든지 유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계속 이어왔던 것은 핵무기가 꼭 필요했던 것도 있었지만 외부에 문을 열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컸다. 북한은 문을 닫고 싶으면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하면 된다. 그러면 외부에서 알아서 봉쇄라는 빗장을 걸어준다.

북한이 문을 닫아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은 2008년부터였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김정일에게 제일 절실했던 것은 남북 화해나 대외관계 개선이 아닌 내부 후계구도 정립이었다. 김정일 사후 권좌에 오른 김정은도 문을 꽉 닫고 안방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또 남쪽엔 북한에 퍼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보수 정권이 연이어 집권했다. 지난 8년간 남북관계가 악화된 것은 남과 북 모두 서로 문을 열고 악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 크다.

하지만 지금 김정은은 내부 권력 정리를 거의 끝냈다. 다음 행보는 민심을 돌보는 것이다. 민심을 무시하면 체제는 급속히 허약해진다. 게다가 안하무인의 핵 도발을 계속하다간 예측 불허의 미국 트럼프 정권에 의해 제거될 수도 있다. 핵 도발의 위험 부담이 너무 커진 것이다.

문을 열려고 생각하면 지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 남북의 ‘궁합’은 정상회담이 최초로 열렸던 2000년과 비교할 만하다. 당시 북한은 경제를 회복해 고난의 행군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성과를 거두고 싶어 했다. 2017년은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김정은은 민심을 의식해 경제를 회생시켜야 하며, 남쪽에도 남북관계 개선으로 업적을 쌓고 싶어 하는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아졌다. 김정은이 핵실험 동결을 약속하면 트럼프 정부도 협상에 응할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다시 오기 힘들다. 김정은이 무모하지 않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올해의 기회를 잡을지는 향후 행보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미국과 핵협상을 시작하고, 내부적으론 경제개혁을 단행해 외부에 ‘우리도 이제 변하려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면 남북관계도 급격히 화해 무드를 타게 될 것이다.

반면 김정은이 올해 상반기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이어간다면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는 어리석은 선택이 될 것이다. 지난 5년간 지켜본 김정은은 그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2017년은 김정은이 한미와의 관계 개선에 최선을 다하는 해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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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북한 김일성대 졸업. 동아일보 북한 전문기자. 대한변협 북한인권특별위원회 위원. 제20회 삼성언론상 전문기자상 수상. 저서 <서울에서 쓰는 평양 이야기>, <김정은의 북한 어디로 가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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