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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역사 탐방

 동국대에서 본 장충단공원 전경. 동국대에서 본 장충단공원 전경. 장충단(忠壇)공원 장충단은 대한제국의 현충원
충혼의 얼은 오늘도 통곡한다

장충단은 1900년 고종 황제가 나라를 지키다 순국한 열사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충혼의 얼이 깃든 장소다.
국립현충원의 효시이기도 한 이곳을 재정비해 나라 사랑 정신을 후대에 일깨워야 하지 않을까.

김동주 향토사학자, 서울중구문화원 총무부장

“난리에 뛰어들어 나라를 위해 죽은 자에게 반드시 제사를 지내 보답하는 것은 귀신을 위안시키고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군사들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것이다. 갑오년(1894년) 이후로 전사한 사졸(士卒)들에게 미처 제사를 지내주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생각건대, 원한 맺힌 혼령들이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어 슬프게 통곡하는 소리가 구천에 떠돌지 않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짐(朕)의 가슴이 아프다. 제사 지내는 일을 원수부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고종실록> 40권

장충단은 명성황후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광무 4년(1900년) 5월 31일 고종 황제의 조칙에 따라 설립된 초혼단(招魂壇)이다. 처음엔 을미사변 때 순국한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창선(彰善), 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라는 육군법원장 백성기의 제청에 의해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을 비롯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당시 의를 좇다 죽은 문신들도 추가해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 제향신위에 포함됐다.

옛 장충단 모습.옛 장충단 모습.

제단 설치는 원수부에서 담당하고, 춘추제향의 일은 장례원에서 맡았다. 제단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짓고 부근을 정화해 그해 10월 27일에 완성했다. 고종은 단의 명칭을 장충(忠)이라 부르게 하고, 12월에 순국열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첫 제사를 올렸다.

장충단이 설치되던 날인 1900년 9월 19일자 황성신문은 순국열사들에 대한 경애심으로 장충단을 찬양하는 사설을 실었다. 경술국치를 전후해 불리던 ‘한양가(한양오백년가)’에는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뫼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네”와 같은 가사가 들어 있다. 또한 당시 불리던 민요에 “남산 밑에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일세”라는 가사가 들어 있기도 하다.

일제의 장충단 지우기

이렇듯 장충단이 건립된 이래 봄가을로 제사를 지낼 때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을 쏘며 엄숙·장엄하게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장충단이 대일 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구실로 제사를 금지하면서 순종 2년(1908년)에 폐사가 되고 만다.
이후의 모습을 우정(偶丁) 임규(林圭) 선생은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단 앞에 눈물 뿌려 돌에 이끼 돋았는데(壇前墮淚石生苔)
여러 번 매만지며 고달피 돈대에 올랐네(數回摩摩倦上臺)
밤마다 정령들은 밝은 달빛에 계시고(夜夜精靈明月在)
해마다 한식에는 접동새가 날아오네(年年寒食子規來)
마침내 이곳에서 천고의 객이 되었는데(遂令此地成千古)
다시금 어느 누가 술 한 잔 따르려나(更有何人一杯)
다 읊고 산기슭에 오래도록 앉았다가(吟罷麓些良久坐)
단풍나무 검푸른데 석양에 돌아오네(山楓靑黑夕陽廻)
-임규(1867~1948), <북산산고(北山散稿)> ‘장충단시’

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회가 융희 2년(1908년)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조희연과 김윤식이 보인다.갑신정변, 을미사변 관련 희생자 추도회가 융희 2년(1908년) 장충단에서 거행되었다. 가운데 좌우로 조희연과 김윤식이 보인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 장충단을 장충단공원이라 하고 벚나무를 심었다. 이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바꾸고, 환구단 옆에 조선철도호텔을 지어 대한제국의 혼을 훼손한 것과 다름없다. 일제는 나아가 장충단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에 대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1932년에 공원 동쪽에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한다는 명목으로 사찰 박문사를 짓는 만행을 저지른다. 사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철거됐고, 박문사 자리엔 현재 신라호텔이 세워져 있다.

장충단비. 장충단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황제께서 썼고, 비석 뒤의 비문은 당시 육군대장이었던 민영환이 썼다.장충단비. 장충단 글씨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황제께서 썼고, 비석 뒤의 비문은 당시 육군대장이었던 민영환이 썼다.

장충단은 국립현충원의 효시였다. 광복 후 육군본부 순국영령봉안소인 장충사(현재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가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전될 때까지 그 역할을 했다.

장충단은 원래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1972년 10월 설치)가 서 있는 자리로 전하고, 장충단비는 신라호텔 서쪽 큰길가(영빈관)에 있었다. 장충단이 폐사된 후에도 사당 건물은 남아 있다가 6·25전쟁 때 전소됐으며, 장충단비는 196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서울시는 1984년 근린공원인 장충단공원 전역을 자연공원인 남산공원의 일부로 흡수·합병했다.

이준 열사 동상.이준 열사 동상.

한편 서울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요 추모제는 용산구의 남이장군 대제, 관악구의 낙성대 인헌제, 동작구의 사육신 추모제향 등이 있다. 모두 사당에 신위를 모시고 추모제향을 지내고 있다. 장충단은 대한제국이 설치했다는 역사적 근거와 모셔진 신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있음에도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사당이 복원되지 않고 있다.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를 올리는 곳인 사직단이나 천제에게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처럼 일반 사당이 아니라 대한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모신 장충단을 복원하지 않고 방치하는 것은 역사의 단절이 아닐 없다. 더 늦기 전에 사진조차 희미한 옛 장충단을 복원하고, 장충단 추모문화제도 국가적으로 치르는 추모문화제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는 돌고 돌아 작금의 국제 정세가 구한말과 같다고 한다. 또다시 친일 부역배들이 발호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누가 외세로부터 이 나라를 지킬 것인가? 고종 황제의 영령이 장충단 허공에서 탄식한다.

장충동 족발과 태극당

장충단 인근엔 장충단비뿐 아니라 역사적 위인들의 동상과 비,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다. 유정 사명대사상, 한국 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수표교, 일성 이준 열사 동상, 이한응 열사상, 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비, 유관순 열사 동상, 3·1독립운동 기념탑, 리틀야구장, 건축가 김수근 초기작인 자유센터, 국립극장과 동국대, 한양도성 장충지구 등이 자연과 역사문화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다.

지금은 외식업소 모두가 원조라 하지만, 처음 족발찜을 개발한 전박숙(1991년 작고) 씨 따님에 의하면 평북 온산이 고향인 어머니가 피난 내려와 먹고살기 힘들 때 중국 사람들이 돼지 족에다 갖은 양념을 다해 오향족이라 부르고 파는 것을 배워보려 했지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개발한 것이 지금의 장충동 족발찜이라고 한다.

한양도성 장충지구 성벽.한양도성 장충지구 성벽.

당시 유일한 실내체육관이던 장충체육관에서 레슬링 경기가 열리면 인근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마땅한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에 선수와 관중들에게 족발찜은 싸면서 맛이 있어 최고의 영양식과 요깃거리가 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고 한번 온 손님이 또 다른 손님과 오게 되다 보니 한 집 두 집 족발찜 가게가 늘면서 지금의 장충동 족발거리가 형성되었다.

장충동 족발 맛의 비결은 족발 본래의 순수한 감칠맛을 온전히 살리는 데 있다. 맹물에 각 업소만의 비장의 양념을 넣어 삶고 또 삶아 연한 다갈색의 은은한 윤기가 돌게 한다. 거기에 삶는 시간과 주인의 정성이 들어가고, 또 평생 돼지 족만 삶아온 큰 가마솥의 연륜이 더해지면 연하면서 쫀득쫀득하고 입에서 살살 녹는 장충동 족발이 완성된다.

새롭게 복원된 수표교. 새롭게 복원된 수표교.

길 건너편에는 ‘과자 중의 과자’를 파는 태극당이 있다. 1946년에 문을 열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으로 7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추억의 명소다. 또한 한국현대문학관은 1997년에 설립된 문학 전문 박물관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 빛난 걸작들의 초판본, 육필 원고 등을 볼 수 있다. 명칭 그대로 한국 현대문학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

‘장충단’ 하면 가수 배호도 빼놓을 수 없다.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고음과 저음을 조화롭게 구사하는 독특한 음색과 창법으로 노래를 불러 온 국민의 심금을 울린 진정한 가인이었던 그의 대표작이 ‘안개 낀 장충단공원’이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 지난날 이 자리에 새긴 그 이름/ 뚜렷이 남은 이 글씨/ 다시 한 번 어루만지며/ 돌아서는 장충단공원.’

지난해 10월 7일 열린 제120주기 장충단 추모문화제.지난해 10월 7일 열린 제120주기 장충단 추모문화제.

지금도 배호의 기일이 돌아오면 전국의 팬클럽 회원들이 배호의 영정을 들고 장충단 일대를 돌며 그를 기린다. 이곳에 노래비를 건립해 그의 예술혼을 되새겨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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