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국가’, ‘강한 지도자’가 경쟁하는 오늘날 세계질서는 불확실한 것만이 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하고 미국 워싱턴 정가의 아웃사이더였던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세계질서는 동아시아 세력판도를 크게 흔들고 있다. 미·중관계를 보면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에 ‘강자의 협상력’을 통한 양보를 요구하고 필요하다면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를 관철하고자 할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일종의 성역이었던 ‘하나의 중국’ 원칙도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밝힌 바 있고, 필요하다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간주하거나 무역 보복을 할 수 있다는 엄포를 놓고 있다. 이는 중국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술적 고려라 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동아시아 세력 판도를 주도하고자 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가 깔려 있다.
그러나 중국도 과거와 같이 미국이 만드는 질서에 순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을 설립하는 등 미국과의 경쟁을 불사하기 시작했고, 주변 지역에서 힘의 우위를 관철하기 위해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매력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앞두고 출범할 시진핑 2기 체제는 ‘강한 중국’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대외전략을 구사하는 한편 중국식 외교 담론을 강화할 것이다. 이미 ‘신형대국관계’라는 강대국 외교를 선보인 데 이어 지난 1월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시진핑발 ‘핵 없는 세상’을 선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중국도 현재의 판짜기에서 밀리면 전체 동아시아 판을 잃게 된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이처럼 미·중관계에서 협력이든 갈등이든 위상 정립 전까지는 기싸움이 지속될 것이다. 이미 지난해 12월 중국은 자국의 시장경제지위(MES) 인정을 거부하고 농산물 수입량을 부당하게 제한했다는 이유로 미국을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했다. 이러한 무역전쟁은 브레튼우즈 체제 이후 합의된 통화질서가 없는 상태에서 통화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유동성이 강한 대외 안보 환경은 한반도에도 깊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미 북한은 새로운 도발과 ‘탐색적 대화’를 놓고 손익 계산을 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전략적 인내’를 넘어 ‘선제공격’까지도 고려하는 상황에서 ‘도발을 통한 협상’ 패턴으로 이 파고를 헤쳐나가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대외정책과 한반도 전략이 국내정치 변수로 말미암아 좀처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상 대선 국면에 접어든 상태에서 외교안보의 국내정치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고 인기 영합 정책이 속출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한국적 방안’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 과정에서 우리 외교의 전략적 지렛대도 지속적으로 잃고 있다.
한반도 문제가 미·중관계의 종속변수로 전락하지 않도록 한국 외교의 모든 주체들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주도권도 회복해야 한다. 이를 사회적, 초당적 합의로 만들어가면서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정책 ‘매몰비용(Sunk Cost)’를 줄여나가는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시간은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이희옥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외국어대 정치학 박사. 미국 워싱턴대 방문교수, 중국 베이징대 연구원, 일본 나고야대 특임교수, 현대중국학회 회장, 성균관대 중국대학원 원장 등 역임. 현재 성균중국연구소장과 민주평통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