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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2016년 2월 중단된 후 1년이 지났다. 사진은 개성공단 출입구. 개성공단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2016년 2월 중단된 후 1년이 지났다. 사진은 개성공단 출입구. 개성공단 사업을 북핵과
분리할 수는 없을까?

대표적인 남북 경제협력 공간이었던 개성공단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전면 중단된 지 1년이 됐다.
개성공단은 재개될 수 있을까.

고구려시대에 개성은 ‘동비홀’이라고 불렸다. 열린(동비=도비) 성(홀=구루)이라는 뜻이다. 즉, 개성은 열린 곳에 있는 도시인 것이다. 개방성을 표방한 도시인 개성이 분단 이후 다시금 남과 북의 경제협력 공간으로 열렸다. 어렵게 열린 개성공단이 2013년 166일간의 잠정 중단에 이어, 2016년 2월 10일부터 전면 중단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개성공단 개발사업 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 개성지사장으로 근무하다 2016년 2월 철수했다. 어쩌면 마지막 개성지사장이 될지도 모른다.

개성공단이 열리기 전에도 남북 간에 교류협력을 위한 노력은 있었다. 1995년 대우의 남포공단 사업, 1996년 LH의 나선 유현공단 사업, 1998년 현대가 금강호 출항으로 시작한 금강산 관광사업 등이 그것이다. 개성공단 개발은 남북 경협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북측은 개성공단을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만든 옥동자라고 표현하며 높은 기대감을 보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북핵과 연관된 개성공단 사업

사실 개성공단과 북한 핵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북한 핵 개발이 촉발한 긴장된 남북관계, 국제관계 속에서도 개성공단만큼은 느리지만 조금씩 진전을 이뤄왔다. 개성공단은 북한의 핵 개발 속도를 조절하는 역할도 했고, 역으로 그 여파가 공단 개발의 진행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개성공단 개발은 1998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에서 출발됐다. 17세 때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 부친의 소 판 돈 70원을 가지고 가출한 정 명예회장은 83세가 되어 고향을 찾았다. 그해 6월에 500마리, 10월에 501마리를 몰고 방북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의 물꼬를 텄다. 당시 북한은 홍수와 가뭄으로 촉발된 고난의 행군 시기였으며, 대미 협상력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북한은 1998년 8월 대포동 미사일 1호를 발사했다. 미국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 관여정책을 추진했다. 햇볕정책을 추진한 김대중 정부는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민간 차원에서 시작된 경협사업을 공식화했다.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6·15 공동선언 제4항에 따라 개성공단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급진전됐던 클린턴 행정부의 북·미관계 개선 노력은 2001년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 급선회했다. 2002년 초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뒤집었다. 2002년 3월 미국은 북한을 핵 위협국으로 지목했고, 북한은 미국의 선제 타격 위협에 대응해 억지력 확보 차원에서 ‘자위적 방어능력’ 구축이 필요하다고 맞서면서 한반도에 다시 긴장이 고조됐다.

결정적으로 2002년 10월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보유 확인차 방북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에게 강석주 북한 제1부상은 북한이 핵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다. 이로써 북한과 미국 간에 협상을 통한 북한 핵문제 해결의 길이 더욱 요원해졌다.

북한이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만든 옥동자라고 표현하며 높은 기대감을 보이기도 했던 개성공단 전경.북한이 남과 북이 힘을 합쳐 만든 옥동자라고 표현하며 높은 기대감을 보이기도 했던 개성공단 전경.

이 시기 LH는 개성 지역에서 개성공단 사업 후보지를 조사해 사업 대상지를 확정하고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이와 병행해 개성공단 운영을 위해 북측과 협의해 2002년 11월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토록 했다. 그러나 북한 핵과 연계된 북·미관계, 남북관계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착공식 일정이 계속 지연됐다.

강석주 제1부상의 발언으로 미국과 충돌한 후, 북한은 2002년 12월 핵 동결을 해제하고 2003년 1월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199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 관련 1차 북핵 위기 이후 9년 만에 또다시 2차 북핵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중국이 6자회담 카드로 중재에 나섰다. 북한 핵과 관련한 외부적 요인이 급변하는 가운데 2003년 6월 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정작 부지 조성공사는 다음 해에 가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2003년 8월 베이징에서 6자회담이 시작됐고, 이후 수차례에 걸친 회의 끝에 2005년 9월 19일 이른바 ‘9·19 공동성명’이 최종 합의됐다. 주요 내용은 첫째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평화적 핵 이용 권리, 둘째 북·미와 북·일관계 정상화, 셋째 5개국의 대북 에너지 지원과 경제협력, 넷째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다섯째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여섯째 상호 공약들을 단계적으로 ‘행동 대 행동’으로 옮기는 원칙이다.

북핵에 대한 강력한 카드

길고 긴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가 마련됐다. 6자회담이 진전되는 시기는 개성공단 개발사업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와 중복된다. 2004년 6월 시범단지 준공식과 함께 분양을 실시했고, 12월에는 드디어 시범단지 입주업체에서 첫 제품을 생산했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에는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냄비 1000세트가 전시도 되기 전에 매진됐다.

9·19 공동성명 바로 다음 날인 9월 20일, 미국은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를 돈세탁 우려은행으로 지정해 대북 금융 제재를 시작했다. 북한은 즉시 외교부 성명을 통해 “경수로를 제공받는 즉시 NPT에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NPT 복귀 후 핵 폐기가 이뤄져야 경수로 제공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어렵사리 도출한 9·19 공동성명은 또다시 표류할 수밖에 없게 됐다.

미국은 금융 제재를 북한 핵 협상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법 집행으로 보았다. 그러나 북한은 9·19 공동성명 채택을 통해 북·미관계가 정상화 궤도에 어렵게 접어들자마자 바로 미국이 대북 제재를 강화하는 것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인식했다. 북한은 핵 문제를 협상 수단이 아닌 실질적인 해결책으로 삼아보려고 시도했다.

2006년 10월 3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핵실험을 예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도 즉시 외교부 성명을 통해 북한 핵실험에 대한 결과는 전적으로 북한이 책임져야 한다고 발표했다. 미국도 우려를 표명하고 추가 금융 제재를 포함한 강력한 대북 제재를 예고하면서 한국의 동참을 요청했다. 북한은 남한과 경제협력을 위한 개성공단 건설을 진행하는 한편, 핵 개발과 관련한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강력한 카드를 내밀었다. 결국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가 현실이 됐다.

이후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에 이어 2016년에는 1월 6일 4차, 9월 9일 5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회를 거듭한 북한의 핵실험에 대응해 국제사회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의 강도를 높여가며 제재를 강화했다. 그러나 북한의 태도는 크게 변화한 것 같지 않다. 2016년 1월 6일의 핵실험에 이어 2월 7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남북관계가 급랭하자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북한 핵과 무관하게 진행시켜왔던 개성공단 사업을 전면 중단하는 강력한 카드를 내밀었다. 2000년부터 ‘열린 도시 개성’에서 추진해오던 남북 협력사업이 전면 중단된 것이다.

단기간 내에 쉽지 않은 개성공단 재개

개성공단을 재개할 수 있을까? 단기간 내엔 쉽지 않을 것 같다. 개성공단이 잘 돌아갈 때, 당연히 그런 상황이 계속되리라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던 기억이 난다. 2012년 개성공단에서 개성 시내로 연결된 북측 근로자 출퇴근도로가 파손돼 시작한 출퇴근도로 포장과 버스정류장 확장공사를 할 때의 기억이 새롭다.

월고저수지 도수터널 공사를 위해 눈 내리는 개성시를 지나 저수지로 향하면서 목격한 북측 주민들의 부지런한 삶의 일상 등에 대한 기억이 아득한 옛날 일이 됐다. 도수터널 공사를 중단하고 나왔는데 저수지 물은 잘 흐르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이미 모두 지나간 일이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돌이킬 수만 있다면 다른 길은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순간들이 있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와 2002년 2차 북핵 위기 때 좀 더 슬기로운 해법은 없었을까? 2006년 10월 1차 북한 핵실험 이후 2016년 9월 6차 핵실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과연 제재만이 최선이었을까? ‘협상이 결렬됐을 때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BATNA,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에 대한 냉정한 고민이 더 필요하진 않았을까? 열린 도시에서 애써 만들었던 개성공단이 멈춰 섰다. 북핵 정국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인양 그저 방향성 없이 굴러만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북한 핵에 대한 디테일한 디지털 원격 브레이크 장치를 만들기 위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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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철
한국토지주택공사 전 개성지사장
북한대학원대학교 민족공동체지도자과정 수료. 남북협력처 협력사업부장, 북한센터장을 역임하며 개성공단 개발과 투자 유치, 대북 신규 사업 발굴 업무 수행. 현 한국토지주택공사 부천권주거복지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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