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

링컨 책임과 소통의 리더십으로
최강 미국 건설 초석 다져

링컨은 전쟁까지 치르며 노예해방을 이뤄냈고, 강력한 국민군대를 창설해 세계 최강 미국 건설의 초석을 다졌다. 링컨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의 리더십을 조명해본다.

미합중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44명의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힘든 임기를 보냈다. 우선 미국사에서 유일하게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남북전쟁을 치렀다.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이 시작된 이후 1865년 4월 9일 종전될 때까지 4년 동안 온갖 내우외환을 겪었다. 전쟁과 정치·사회·경제적 갈등, 노예제와 문화적인 문제들로 고통을 당했고, 내각 각료들의 질시와 불복종, 많은 장군들의 무능과 불충성, 연방의회 의원들의 이해관계 등으로 빚어진 많은 어려움에 시달렸다.

1863년 1월 1일 시행된 노예해방령은 미국사에서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미국 남북전쟁은 사실상 노예제도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당시 노예제도는 미 남부지역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북부는 시대착오적인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남부지역이 눈에 거슬렸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들이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한 마당에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전근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다목적 포석의 노예해방령 발표

링컨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연방이 유지된다면 그리할 것이고,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고도 연방을 구하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라 했다. 그의 노예해방에 대한 생각은 유동적이었다. 공화당 급진파들과 달리 보상금 없이 노예들을 해방시킬 마음은 없었다. 그는 노예를 소유한 적도 없고 노예를 가질 생각도 없었지만, 노예를 당장 해방시켜 접경주(남북전쟁 기간 남부에 속하면서 북부에 남아 있던 4개주) 노예 소유주들의 분노를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부의 노예가 해방되면 북부의 자유 흑인들과 함께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려보내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여러 정황상 노예해방 선언은 아주 어려운 과제였다. 혼자서 거의 2개월 이상 원고를 준비하던 링컨은 1862년 7월 22일 각료들에게 역사적인 노예해방령의 초안을 낭독했다. 이때 윌리엄 시워드 국무장관은 군사적 승리가 확정될 때까지 이것을 선포하지 말자고 제의했다. 그해 9월 앤터텀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리하자 링컨은 이때를 노예해방령의 기회로 잡았다. 그리하여 9월 22일 링컨은 제2 초안을 각료들에게 낭독했고, 해방령으로 발표했다. 그중에 중요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현재 미국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주나 주 일부의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해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켜줄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1863년 1월 1일 이후 미합중국에 대해 반란 상태에 있는 남부 지역의 모든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것이므로 선포 당시에는 단 한 명의 노예도 해방되지 못했다. 단지 이 해방령으로 남부에서 북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는 데 따라 북군 사령관이 그 지역 내의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합중국에 잔류한 주의 노예는 이 해방령의 대상 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기 전인 1865년 1월 31일 링컨 주도로 북부의 연방의회는 노예제도를 미국 전역에서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킨다.

링컨의 리더십은 현대의 리더십 유형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링컨의 리더십은 현대의 리더십 유형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노예해방령은 다목적 포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령이 발표됐어도 실제로는 한 명의 노예도 해방되지 않았다. 링컨도 이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했다. 왜 그랬을까? 다른 뜻이 있다고 봐야 한다. 그것은 북부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윤리적 ‘정의’를 전 세계에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노예제를 유지하면서 남부가 도덕성을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링컨은 북부가 노예제 문제에서만큼은 도덕적인 정통성을 가지면 유럽 열강들이 남부를 국가로 인정해 외교적 혹은 경제적인 지원을 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1862년 여름 남부로 갈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접경주들을 달래야 했다. 즉 노예해방은 오직 남부의 반란주들에만 해당하고, 접경 4개주는 노예해방을 할 필요가 없어서 북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임기 동안 다른 여러 위대한 정치 행위가 있었지만, 노예해방령만 살펴봐도 링컨은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링컨의 리더십은 현대의 리더십 유형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다. 현대의 리더십 유형에서 먼저 카리스마 리더십이 있다. 추종자들이 리더의 이념을 옳다고 생각하고 그가 내세우는 조직의 사명에 감성적으로 몰입하면, 리더는 카리스마를 가지게 된다. 둘째, 윤리적 리더십이 있다. 의사결정을 비롯한 리더의 모든 행동이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리더의 결정이 자신이나 공동체에 유리하거나 이익이 되려면 리더의 행위가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섬김(Servant)의 리더십이 있다. 리더가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욕구를 해결해주고 섬김으로써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책임과 소통의 리더십이 있다. 리더가 책임을 확실하게 지고 서로 소통하는 리더십이다.

책임과 소통의 리더십 몸소 실천

링컨은 이 네 가지를 모두 가진 드문 정치인이다. 먼저 링컨의 카리스마는 잘 알려져 있다. 두 달간 노예해방령을 준비한 링컨은 내각 회의에서 그것을 발표한다. 그는 이전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이념의 변화) 정치적, 윤리적인 카리스마로 무장한 채 노예해방령을 발표했다. 이유는 이것이 누구에게 물어서 해답을 구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카리스마로 이것을 돌파했다.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라도, 링컨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면 지도자의 카리스마로 돌파했던 것이다.

둘째, 주지하다시피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Honest Abe)’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정직했다. 대통령 본인이 비윤리적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윤리적이 돼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다. 그는 금전 문제에서는 편집증적인 윤리성이 있었다. 그에게는 관직 임명을 위시한 여러 가지 정책에서 윤리관이 가장 중요한 측도였다. 전쟁 중에 많은 정치인들이 개인적인 치부를 하고 있었지만 링컨은 거의 순우유처럼 순수했다. 링컨이 깨끗했으므로 그의 언행은 다른 이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영화 ‘링컨’영화 ‘링컨’.

셋째, 링컨은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을 섬기는 봉사자의 자세를 취했다. 그는 임기 4년 동안 밤잠을 거의 자지 않고 전쟁과 전투, 남북통일과 노예 문제, 그리고 전비 문제로 골치를 앓는 와중에 국가의 미래를 고민했다.

그가 얼마나 미국의 미래상에 대해 고민했는지, 장차 미국이 강대국이 되는 데 필요한 입법을 얼마나 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거의 모른다. 1862년 제정된 자작농지법(미국에 사는 주민은 누구든지 5년 동안 거주하면 토지를 무료로 가질 수 있게 한 법)과 대륙횡단철도, 보호관세법, 지폐법(Greenback, 현재 미국에서 쓰이는 지폐에 대해 규정) 등은 미국이 강대국이 되는 초석이 되었다. 이런 법률들은 거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반대하던 것들이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865년 1월 중순, 그는 어느 공공건물 개관식에 참석해 단 한 문장의 연설을 했다. “이 건물의 깃발을 올리는 것은 제가 할 일이지만, 유지하는 것은 국민입니다.” 이 말은 링컨은 오직 깃발을 올리는 종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국민이라는 뜻이다. 대통령은 국민 아래 있고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마음이 링컨에게 있었다. 멸사봉공의 정신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던 것이다. 게티스버그 연설문의 유명한 구절도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링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노예제도를 다룬 영화 ‘프리덤’. 미국 노예제도를 다룬 영화 ‘프리덤’.

마지막으로 링컨은 책임과 소통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 링컨이 평생 실천한 언행일치는 바로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노예해방령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남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의원들과 심지어 내각의 장관들과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 쏟아진 그 모든 비난을 모두 받아들였고, 노예해방령을 실행하려는 마지막 책임의식으로 2년 후에 수정헌법 13조를 통과시켜 노예제도를 폐지시켰다.

소통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링컨은 백악관에서 거의 하루 종일 시민들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병원을 들르고, 또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워싱턴을 떠나는 군인들을 배웅했다. 미국 대통령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허물없이 만난 인물이 링컨이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혹은 어렵게 서로 소통을 다했다.

강력한 대통령제 확립하고 국민군대 만든 지도자

링컨은 남북전쟁 기간 강력한 대통령제를 확립하면서 국민군대를 만든 지도자였다. 징집령을 내려 국민군대의 전형을 만들었다. 미국 남북전쟁은 근대전쟁의 시작이었다. 과거 봉건적인 형태의 전쟁이 아니라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 당시 미국은 민족이 아닌 국민국가를 필요로 했고, 국민군대를 만들 위대한 인물이 필요했고, 링컨 대통령이 가장 적절한 시기에 거기에 있었다.

남북이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일까? 이 모든 조건을 가진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이 중에 몇 가지만 가지고 있어도 대통령이 갖춰야 할 필요충분조건이 될 것이다.

photo

양재열
영남대 역사학과 연구교수
경북대 대학원 사학과 석사. 미국 라번대 대학원에서 수학하며 미국 정치와 지역주의 연구. 저서 <한국인을 위한 미국사>, <에이브러햄 링컨>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