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1월 1일 인민군 수뇌부와 함께 금수산태양궁전을 찾았다.
대개 국가 정상은 신년사를 통해 일 년 동안의 정부 정책 방향을 제시한다. 북한의 신년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1995년부터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취임 직전인 2011년까지는 당보, 군보, 청년보의 공동 사설 형식으로 신년사를 발표했다.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집권한 2013년부터 신년 사설은 휴일인 1월 1일 아침 일찍 최고지도자가 직접 낭독했다.
북한에서 신년사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년 휴일 매우 이른 아침부터 전체 주민은 신년사를 경청하도록 요구받는다. 2015년의 신년사 낭독은 2013년과 2014년에 비해 30분 늦은 9시 30분쯤부터 방영됐다. 북한에서 신년사는 전 주민이 의무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일부 주민은 신년사 전체를 암송하도록 요구받는다. 또한 평양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신년사 관철을 위한 궐기대회가 열리곤 한다.
대개의 신년사에서 내용 나열 순서는 동일하다. 신년사는 전군, 전당, 전 인민에 대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인사와 덕담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전년도 과업 성과가 총평에 이어 각 부분별로 과장돼 나열된다. 2014년도 평가에서는 경제 및 사회 부문의 성과에 대한 자랑이 전년도에 비해 줄었다. 이어서 금년도 핵심 정책 슬로건과 금년도 경제정책이 제시된다. 그 뒤를 이어 당, 군, 청년동맹, 사회에 관한 정책이 제시된다. 그다음에 오는 것이 대남·통일정책과 대외정책에 관한 입장 제시다.
사상 강화에 김정은의 불안감 담겨 있어
2015년도에는 이런 순서에 변화가 있었다. 과거 같으면 금년도 핵심 슬로건 다음에 경제정책이 등장한다. 그러나 올해에는 3대 정책 방향이 등장했다. 3대 정책 방향은 첫째, 사회주의 정치사상 강국의 강화, 둘째, 국방력 강화, 셋째, 과학기술 중시 정책의 추진이다.
정치사상 강국의 강화와 관련해서 제시된 것은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심화, 당 정책 관철, 인민생활 향상, 공세적 사상 사업을 통한 혁명의 진지 다지기다. 국방력 강화와 관련해서는 유일적 영군체계 세우기, 전투정치훈련 강화, 후방사업의 개선, 전 인민 항전 준비 갖추기, 국방공업에서의 최첨단 무장장비 개발 등이 제시됐다. 과학기술 발전과 관련해서는 과학기술을 통해 경제 발전과 국방력 강화, 인민생활 향상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3대 정책은 당면한 정세 조건에 대한 김정은식 대응을 보여준다. 정치사상 강국을 강조한 이유는 북한 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도 내부의 사상적 이완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이 사상적 이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유일 영도체계에 대한 10대 원칙을 제시하고서부터다. 그 후 2013년 8월경부터 외부 영상물에 대한 단속이 심화됐고, 이는 12월 장성택 숙청을 겪으면서 강화됐다.
북한 당국은 시장 단속은 완화했지만 외부 통화, 외부 영상물, 한국 물품 등에 대한 단속은 현저히 강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14년 12월 유엔총회에서 강화된 북한인권결의안이 통과되고, 김정은 제1위원장에 대한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는 소니픽처스엔터테인먼트의 영화 ‘인터뷰’가 공개된 것이 북한 당국의 우려를 특히 자극했을 것이다.
신년사는 위대성 교양, 김정일 애국주의 교양, 신념 교양, 반제계급 교양, 도덕 교양을 강화할 것을 제시했다. 이런 종류의 정책이 제시되면 대체로 정권의 주민에 대한 마녀사냥식 단속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다음으로 국방력 강화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12월 유엔총회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이 통과되었을 때 북한은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이에 대해 보복할 것을 공언했다. 그 공언의 내용에는 ‘새로운 핵실험’, ‘전쟁억제력의 무제한 강화’, ‘미증유의 초강경 대응전’과 같은 협박이 포함됐다. 신년사가 국방력 강화를 강조한 것은 북한이 이러한 협박을 실행할 준비를 진행시킬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또 과학기술을 중시할 것을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년사는 과학기술 중시 정책의 목적이 ‘사회주의 경제 강국, 문명국 건설’, 또는 ‘경제 발전, 국방력 강화, 인민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것인 것처럼 말했다. 과학기술 중시 정책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보인다. 첫째,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는 과학기술을 매우 강조한다.
물론 과학기술 발전은 중요하지만, 과학기술을 강조한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개혁을 하지 않고서도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마술적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과학기술 발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 강조는 일종의 반개혁 담론이다.
<사진> 김정은의 신년사에 대한 각계 반응을 보도한 노동신문 지면.
과학기술 중시, 핵 개발 집착 의도 보여
둘째, 북한 과학 연구에서 ‘최첨단 돌파전’을 할 수 있는 분야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과 같은 대량살상무기 분야 뿐이다. 이 부문에는 국가적 관심과 대량의 자본 및 특혜가 주어진다. 따라서 북한이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대량살상무기 개발 분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고 대규모 투자를 할 것이며, 이 분야 종사자에게 특혜를 베풀겠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여러 여건으로 볼 때, 북한에서 과학기술 발전이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에 이바지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볼 때 과학기술이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에 기여하는 수준은 그 사회에서 개인의 창의성을 얼마나 보장했는가에 비례한다. 북한은 2014년까지만 하더라도 이른바 지식경제 발전론을 내세웠다. 유일 영도와 사상 교양을 힘차게 강조하고 사고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지식경제가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북한의 올해 경제정책은 대체로 온건할 것으로 보이지만, 경제 상황을 개선하는 데 별 도움은 되지 않을 전망이다. 북한은 올해에도 예년과 다르지 않은 각종 정책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신년사는 각종 정책 목표를 단순 나열하지만, 그것을 과연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침묵해왔다. 또는 신년사는 수십 년 동안 반복해서 제시했지만 성과가 없던 방도를 내세우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는 2015년에도 마찬가지다. 나아가야 할 방향, 개선해야 할 것들은 힘주어 말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에 대한 실효적 대책은 내놓지 않는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좋게 해석한다면 경제정책을 책임진 내각의 정치적 영향력이 다른 특권기관보다 못하다는 것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내각이 국가경제 개선 차원에서 정책을 제시하더라도 내각에는 자원과 힘이 없기 때문에, 정책이 실제로 일관되게 실행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좀 더 냉소적으로 해석한다면, 인민생활 향상 등의 정책은 표면상으로만 내건 것이고 실제로는 더 중요한 다른 목표(군사비 지출 증가 또는 수령경제 강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북한 당국이 표리부동하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김정은 제1위원장이 말하는 인민생활 향상이라는 것은 실제 본인도 잘 인지하는 의도적 가식과 위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김정은 제1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이 대외 긴장을 강화하고 국방력 강화에 매진하면서, 동시에 인민생활 향상 정책을 추진한다는 식의 양립 불가능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을 감추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진> 북한도 남한처럼 신년을 맞는 마음이 설레긴 마찬가지다. 평양 주민들이 1월 1일 0시가 되자 김일성광장에 모여 새해맞이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북한 주도의 남북관계 가능할까
2015년 신년사에서는 대남 대외 분야에 이례적으로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이는 한국에서 통일준비위원회가 발족한 것에 대해 북한이 그 대응에 부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좀 더 좁게는 지난해 12월 29일 한국의 통일부와 통일준비위가 공동 제시한 남북대화에 대해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은 아마도 2015년이 남북한 사이에 통일 문제 및 남북관계 개선의 주도권을 놓고 상당한 수준의 선전전이 전개될 것을 예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년사는 통일 및 남북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사항을 추가하지는 않고, 과거에 주장하던 것을 다시 한 번 총정리해 제시했다. 그 내용을 보면, 대규모 전쟁연습 중단, 자기의 사상과 제도의 절대시를 통한 체제 대결 중단, 제도 통일 추구 중단, 7·4 공동성명 및 6·15 공동선언, 10·4 선언을 통일헌장, 통일대강으로 준수할 것 등이다.
북한은 또한 핵 억제력을 중추로 한 국방력 강화와 선군정치 및 (경제 건설과 핵 무력 건설의) 병진노선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것을 선언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이처럼 장황하게 남북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은 남북대화와 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어쨌든 신년사가 언급한 여러 사항은 북한이 생각하는 남북관계 개선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이 있는데, 자신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남북관계를 형성하겠으니 한국이 이를 받으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북한은 아마도 2014년 하반기에 공언한 대로, ‘새로운 핵실험,’ ‘전쟁억제력의 무제한 강화,’ ‘미증유의 초강경 대응전’으로 표변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독일 마르부르크대 정치학 박사. 민주평통 상임위원, 통일준비위원회 전문위원, 한독 통일외교정책자문위원, 브루킹스연구소 객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