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국제시장’은 ‘12세 이상 관람가’ 가족 영화다.
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영화라 어설픈 정치 메시지를 넣고 싶지도 않았다.”
구가인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1월 14일 한국 영화사상 11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국제시장’의 윤제균(46·사진) 감독은 ‘해운대’(2009년·1145만 명)와 함께 최초로 1000만 영화 두 편을 낸, ‘쌍천만’ 감독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광복 전후에 태어나 산업역군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일군 세대는 이 영화를 자기들 얘기로 받아들인다. 지난해 말과 올해 초 두 차례 만난 윤 감독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로 만든 영화”라고 강조했다.
흥행을 예상했나.
“예상 못 했다. 손익분기점(600만 명)을 넘길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는데 개봉 첫 주 스코어가 낮아 출발이 불안했다. 그러다 정치 논쟁이 붙었다. 논란은 불편했지만 흥행 면에서만 보면 긍정적이었다고 본다.”
이념 논쟁으로 ‘보수의 기수’가 됐다.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국제시장’은 ‘12세 이상 관람가’ 가족 영화다. 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영화라 어설픈 정치 메시지를 넣고 싶지도 않았다. 도식적으로 섞을 순 있지만 그건 더 비겁하다고 봤다.”
수많은 현대사 중 흥남 철수, 파독 광부, 베트남전, 이산가족 찾기 4개를 주요 에피소드로 삼은 이유는 뭔가.
“가장 고민한 부분이다. 정치적으로 거세한 후 남은 선택지에서 가장 치열했던 배경을 정했다. 특히 1970년대 베트남전과 중동 파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어려웠다. 개인의 드라마를 그리기에 베트남이 낫다고 봤다.”
“힘든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게 참 다행”이란 대사가 산업화 세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깜짝 놀랐다. 각본을 맡은 박수진 작가가 쓴 대사였는데 시나리오를 읽을 때도 전혀 문제를 못 느꼈다. 그 대사는 특정 세대의 상징이 아니라 그저 부모의 마음을 대변하는 거다. 진보든 보수든 부모라면 자식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다. 부모 마음은 이념이나 세대를 초월해 똑같다.”
<사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윤제균 감독의 두 영화 ‘해운대’
비판이 서운하진 않았나.
“영화는 김춘수 시인의 ‘꽃’과 같다. 이름을 불러주면 받아들여야지(웃음). 다들 남진(정윤호)의 카메오 부분을 재미용으로만 본다. 그런데 거기엔 전라도 사람 남진이 경상도 사람 덕수의 목숨을 구한다는 함의도 있다. 영화 속 동남아 노동자 에피소드는 50년 전 독일로 떠나야 했던 우리 역사를 통해 역지사지하길 바라며 넣었던 거다. 내 나름의 소통과 화합을 말한 것이다.”
영화 주인공 덕수(황정민)와 영자(김윤진)는 윤 감독의 부모 이름에서 따왔다. 윤 감독에게 ‘국제시장’은 “10년 동안의 숙원사업”이었다. 아버지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2004년. 세 번째 영화 ‘낭만자객’ 실패 후 슬럼프를 겪을 당시, 첫아들이 태어나며 그는 아버지가 됐다.
다음 영화가 4년 후 나왔으니 공백이 컸다.
“사회생활에서 첫 실패를 겪을 때 가장 사랑하는 존재(아들)를 얻었다. 대학 2학년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처음으로 절실히 이해했다. 아버지가 퇴직 후 주식투자 실패로 가세가 기울었다. 돌아가실 때 유언이 ‘미안하다’였다. 임종 때는 그 의미를 잘 몰랐는데 돌이켜볼수록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때 ‘아버지 그래도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게 응어리가 됐다. 언젠가는 아버지 얘기를 해야 했고, 그만한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재기의 동력이 됐다.”
영화에서 가장 아끼는 장면은 뭔가.
“마지막 장면이다. 덕수의 독백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대사는 내가 썼다. 내가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윤 감독의 이력은 특이하다. 고려대 경제학과 출신인 그는 영화계 입문 전까지 5년간 광고회사(LG애드)에서 근무했다. 감독 데뷔작 ‘두사부일체’(2001년)를 포함해 총 여섯 편의 영화를 내놓으며 충무로의 대표 흥행 감독이 됐다. 2002년 제작사 JK필름을 차려 10여 편의 영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사진> ‘국제시장’의 한 장면.
영화판에 오기 전 광고회사를 다녔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한 달간 무급휴직을 했는데 그때 쓴 시나리오가 당선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 광고회사에서는 주로 예산과 결산 업무를 했다. 예전엔 영화에 늦게 입문한 게 아쉬웠는데 이젠 그 경험이 영화감독으로서, 제작자로서 많은 도움이 된다. ‘자존심을 버리면 인생이 즐겁다’는 걸 그때 배웠다.”
‘국제시장’ 후속편도 만들 건가.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배우나 투자자도 다 허락해야 하기에 쉽진 않다. 덕수 가족이 1980, 90년대를 어떻게 헤쳐 현재에 왔을지 궁금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