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수해와 긴급구호, 그리고 국제사회의 반응
핵 개발은 한없이 밉지만,
주민 고통은 가슴을 저민다
큰 수해를 당한 북한 함경북도 지역에 대한 지원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일고 있다. 주민은 돌보지 않고 핵 개발에만 몰두하는 김정은 독재 탓이다
| 김호준 연합뉴스 통일외교부 기자 |
북한 함경북도 지역에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한 것은 지난 8월 말이었다. 북한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2270호)로 외교적 고립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해방 이후 최악’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재난 상황을 비교적 신속히 국제사회에 알렸다.
북한의 관영매체인 조선중앙통신은 9월 3일 “8월 29일 발생한 태풍 10호(라이언록)와 북서쪽에 형성된 저기압 마당이 합쳐지면서 8월 29일부터 9월 2일 사이 함경북도를 비롯해 조선의 전반적 지역에서 센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며 태풍 피해 소식을 처음으로 전했다.
당시 조선중앙통신은 “두만강 유역에 관측 이래 가장 큰물(홍수)이 발생해 강이 범람하면서 일부 지역이 혹심한 피해를 봤다”면서 구체적인 피해 상황으로 회령시에서만 15명이 행방불명됐으며, 함경북도 전체적으로는 8670여 동, 1만7180여 가구의 주택이 완전 또는 부분 파손되면서 4만4000여 명이 대피했다고 보도했다.
북, 자존심 접고 국제사회에 지원 요청
이후 AFP통신은 9월 12일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을 인용해 북한 함경북도 일대를 강타한 홍수로 133명이 숨지고 395명이 실종됐고, 3만5500가구 이상이 홍수 피해를 본 것으로 집계됐다며 피해 규모가 북한의 첫 발표보다 크다는 소식을 전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도 13일 3〜5면에 걸쳐 수해 복구 지역에 대한 지원이 전국적 범위에서 확대되고 있는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하면서 피해 규모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 북한의 도발로 전례 없이 강력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진행 중인 상황이었지만, 국제기구는 대규모 수해로 고통 받고 있는 북한 주민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9월 중순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은 북한 함경북도의 수재민을 돕기 위해 52만 달러(5억9000만 원 상당)를 지원했고,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최근 심각한 홍수 피해를 본 북한 주민 14만 명에게 식량을 지원했다.
북한도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역점 사업인 평양 ‘려명거리’ 건설사업을 늦추면서까지 수해 복구에 주력했다. 자존심을 접고 국제사회에 수해 지원도 요청했다.
제71차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9월 23일 헬렌 클라크 유엔개발계획(UNDP) 총재, 같은 달 24일에는 스티븐 오브라이언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 국장과 피터 마우러 국제적십자사연맹 총재를 만나 수해 지원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유엔대표부 권정근 참사는 미국의 대북 지원단체들에 이메일을 보내 최근 발생한 함북 지역 수해 현황을 설명하며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북한은 국제 구호단체는 물론 미국의 대북 지원단체들에까지 지원 요청을 하면서 정작 ‘최대 우방’인 중국에는 구호 요청을 하지 않아 그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북한 외무성은 9월 14일 몽골, 베트남 등 아시아 9개국 대사들을 초청한 모임에서 수해 복구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해달라며 공식 지원을 요청했으나 이 자리에 리진쥔 북한 주재 중국대사는 초대받지 못했다.
이를 두고 외교가에선 9월 9일 북한의 제5차 핵실험 이후 더욱 냉각된 북·중관계의 상황과 ‘대북 강경’ 입장을 견지하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만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중국은 북한의 5차 핵실험 직후 ‘결연한 반대’ 입장을 표시하고 다음 날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를 초치해 항의하는가 하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 대북 제재 논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북한에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자 한국 내에서도 지원 여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다. 국내 54개 대북 지원 민간단체들로 구성된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북민협)는 9월 초 수해로 고통 받는 북한 주민을 지원할 목적으로 제3국 대북 접촉을 신청했으나 통일부는 불허를 결정했다.
정부는 지난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를 잠정 중단하면서 방북은 물론 중국 등 제3국에서 이뤄지는 대북 접촉과 팩스 등을 통한 간접 대북 접촉도 일절 승인하지 않고 있다. 수해 지원을 목적으로 한 민간의 인도적 대북 지원도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가속하는 상황에선 허용할 수 없다는 게 현 정부의 입장이었다.
국내 민간단체 수해 지원 신청, 통일부는 “NO”
특히 8월 말 대규모 수해가 발생한 이후로도 북한이 ‘핵탄두 폭발시험’이라고 명명한 5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을 목적으로 한 신형 위성로켓 엔진시험을 단행했기 때문에 민간의 대북 수해 지원도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은 9월 19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측은 수해가 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5차 핵실험을 감행했다”며 “이러한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핵실험에 쓸 것이 아니라 북한의 민생을 위한 수해 복구에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대변인은 “(수해 지원이) 당면한 북한의 과업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과는 관계없는, 민생과는 관계없는 부분에 자기들의 비용과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북한의 책임이 먼저 다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부 당국자도 다음 날 언론 브리핑에서 북한의 신형 위성로켓 엔진시험 발표에 대한 입장을 묻자 “북한이 수해로 막대한 피해를 봐 스스로 ‘해방 이후 최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라며 “그런데도 주민을 돌보지 않고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 핵과 미사일 도발을 지속하는 북한의 행태가 개탄스럽다”며 북한 당국을 비난했다.
북민협과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등 국내 민간단체들은 정부가 직접적인 대북 수해 지원을 차단하자 국제기구와 해외동포단체 등을 통한 간접 지원 방식을 택했다. 북민협은 북한 함경북도 수재민을 돕기 위한 지원금 2억여 원을 국제적십자사연맹에 보냈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해외동포단체를 통해 역시 함경북도 지역에 라면과 밀가루, 아동용 방한복 등을 지원했다.
우리 정부는 국제기구 등을 통한 국내 민간단체의 대북 수해 지원에 대해서도 “법적으로 막을 방법은 없지만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통일부 당국자는 10월 12일 “수해 발생 이후 핵실험과 미사일 도발을 감행하는 북한 당국의 잘못된 행태와 국민 정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일부 민간단체의 대북 수해 지원 활동은 적절하지 않다”고 밝혔다.
최근 막을 내린 국회 국정감사에선 대북 수해 지원을 무작정 막는 정부의 완고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10월 13일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국감에서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은 대규모 수해를 본 북한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은 “적십자사는 인도주의적 정신에 따라 국제 구호단체로서 역할을 해야 하고 정치적으로는 중립이어야 하며 간섭을 받아서도 안 된다”며 대북 수해 지원을 주장했다.
정부, 국제기구 통한 우회 지원도 “부적절”
다음 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도 야당 의원들은 대북 수해 지원을 주문했으나, 정부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미국의 민간단체는 수해 지원을 하는데 우리 민간단체는 왜 수해 지원을 할 수 없느냐”는 한 야당 의원의 지적에 “인도 지원 문제에 대한 정부 입장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나, 5차 핵실험 이후 여러 상황이 엄중하고 특별하기 때문에 미국과 다른 상황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며 “수해 관련 사항은 현재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최근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에 속도를 냄에 따라 북한 내 취약계층을 위한 인도적 지원은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지속해서 추진한다는 정부의 기존 입장도 달라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여권 일각에서도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대북 인도적 지원은 계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새누리당 윤상현 의원은 10월 14일 국회 외통위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홍용표 장관이 대북 수해 지원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박근혜정부는 정치적 상황과 관계없이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은 한다고 했는데 그런 식이면 원칙이 흔들린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