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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vol 121 | 20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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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베를린 장벽, 휴전선은 언제 열릴까

합의에 기반한 통합능력 ·포용력이
통일 가능케 해

1989년 11월10일 동독이 국경을 개방한다는 발표가 있자, 베를린의 브란데부르크문 곁에 있는 
베를린장벽에 올라가 통일을 자축하는 동서베를린 시민들.1989년 11월10일 동독이 국경을 개방한다는 발표가 있자, 베를린의 브란데부르크문 곁에 있는 베를린장벽에 올라가 통일을 자축하는 동서베를린 시민들.

독일처럼 다름을 인정하고 합의 기반을 넓혀가며,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다.


베를린을 찾는 사람들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옛날 장벽이 세워졌던 자리와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통일 이전에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에는 흔적들이 남아 있다. 장벽을 따라서는 각종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의 중심가 파리저 광장(Pariser Platz)에 있는 건축물로 운터덴린덴로(Unter den Linden)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이 문은 독일 분단 시절 동·서베를린의 경계였으며, 독일 통일과 함께 베를린의 상징이 됐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령으로 1788년에서 1791년까지에 걸쳐 건축됐다. 프로이센 제국의 건축가였던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가 설계했고, 초기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다. 1989년 11월 9일 약 10만여 명의 인파가 이 문 앞에 운집한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졌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자리나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는 한국인들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베를린을 세 차례나 찾았던 필자도 그랬으니까. 똑같이 분단된 나라였지만 독일은 장벽을 허물고 유럽의 최강국으로 우뚝 선 반면 우리나라는 분단체제가 강고해지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한번 합의하면 번복이 없다

독일은 추축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이자 패전국이다. 600여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해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베를린이 네 곳으로 나뉘어 분할 통치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독일 국민들조차 베를린의 분할과 동서독의 분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36년이라는 일제의 잔인한 식민통치의 피해자이자 태평양전쟁의 피해자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선으로 끌려가 일제의 총알받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징용과 종군위안부 등으로 노동력 착취와 인권유린을 당했다. 전시 동원체제에서 전 국민이 수탈을 당했고 민족의 자존심이 짓이겨졌다.

단순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전쟁의 가해국가는 강대국들의 동의를 받아서 통일을 이뤘고, 식민과 전쟁의 피해국은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둘리고 있다. 독일과 한국, 무너진 베를린 장벽과 강고한 휴전선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녀봤지만 독일은 남다르게 다가온다. 독일을 보고 첫 번째로 놀란 것은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 통합 능력이었다. 8000만 명이 넘는 서유럽 최대의 인구대국이자 다민족국가가 노동, 건강보험, 연금개혁을 척척 해낸다. 지난해 기준으로 한 해에 100만 명이 넘는 난민을 수용하면서도 사회적 혼란이 없었다. 스펀지처럼 시스템 내로 잘 흡수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일본도 그렇지만 독일 국민들도 국가나 공적 기구가 결정을 하면 일단 따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력한 국가권력에 순응했던 경험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둘째, 필자가 더 주목하는 것은 높은 수준의 합의 능력이다. 국가나 공적 기구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까지 이해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해 수많은 토론과 공청회를 거친다. 그리고 결정이 합의에 기초해 이뤄지기 때문에 국민들이 순응하는 것이다.

통일 이후 오늘의 독일이 있기까지 사민당의 슈뢰더 정부가 추진하고 기민당의 메르켈 정부가 승계한 ‘어젠다 2010’이 있었다. 어젠다 2010을 통해서 독일은 고령화 시대를 앞두고 건강보험·연금·노동개혁을 이뤄내고 유럽의 강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혹한 속에서 전선을 지키는 육군 장병들. 언제 우리는 휴전선을 허물고 통일을 할 것인가.혹한 속에서 전선을 지키는 육군 장병들. 언제 우리는 휴전선을 허물고 통일을 할 것인가.

그 가운데서도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노동개혁이라고 불리는 ‘하르츠 개혁안’의 합의 과정이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노·사·정과 전문가들이 참여해 ‘하르츠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에서 개혁안을 만들었다. 하르츠위원회는 실업과 노동개혁에 대해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통해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교집합을 확대해나갔다.

하르츠위원회가 독일 의회에 제출한 최종 보고서도 주목할 만하다. 그동안의 논의 과정에서 합의가 안 된 요소들은 빼고 합의 가능했던 부분만 모아서 최종 보고서를 만들었다. 하르츠위원회로부터 넘겨받은 보고서를 독일 연방의회가 입법화한 과정도 흥미롭다. 하르츠개혁안들은 네 차례로 나뉘어 입법화됐다. 하르츠 1∼4가 그것이다. 합의 가능한 부분들부터 입법화하다 보니 동일한 법안이 수년에 걸쳐 분할 처리된 것이다.

게르만의 위대한 포용 능력

합의는 어렵지만 한번 이뤄진 합의를 번복하는 것은 더 어렵다. 독일이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입법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과 합의가 이뤄지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을 가능케 했던 ‘동방정책’, 통일 이후 독일의 부활을 가져왔던 ‘어젠다 2010’이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성과를 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독일을 보면서 두 번째로 놀란 부분은 사회적 약자, 소수자에 대한 넓은 포용 능력이었다. 분단 이후 통일이 될 때까지 서독은 460여만 명의 동독 출신 이주자들을 받아들였다. 동독 국민들의 서독행이 줄을 잇자 동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까지 세웠지만 탈주 행렬을 막지는 못했다. 심지어 동독을 이탈하려는 주민들을 감시하는 국경경비대원까지 장벽을 넘어 서독행을 감행했다.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독행을 택했던 것은 자유와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 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서독으로 먼저 간 친척과 친구들이 별 어려움 없이 잘 정착하고, 자신들의 꿈을 펼쳐가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먼저 간 사람들이 자신들의 미래였고 모델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독 사회가 갖고 있던 넓은 포용 능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서독은 동독에서 직업이 있었던 사람들에겐 서독에서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필요한 사람들에겐 교육의 기회를 줘서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했다. 동독 출신이라고 해서 사회적 차별과 편견도 없었다.

‘역사가 된’ 유럽 냉전과‘ 현실이 된’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데부르크문. 2014년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역사가 된’ 유럽 냉전과‘ 현실이 된’ 독일 통일의 상징인 브란데부르크문. 2014년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찍은 것이다.

동독을 탈출해 서독에 정착한 사람들을 부르는 고유명사도 없었다. 그냥 충청도, 경상도 하듯이 어느 지역 출신이라는 호칭만 있을 뿐이었다. 출신, 지역, 학력, 성별, 나이 등 모든 차별을 극복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능력, 이것이 필자가 주목한 독일 통일을 가능케 했던 중요한 힘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10월 3일 통일이 완성되기까지 동독 주민들의 행로를 보아도 그 점은 뚜렷하다.

1990년 3월 18일 최초로 실시된 자유선거에서 동독 주민들은 서독과의 통일을 결정했다.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를 하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서독과의 통일을 결정한 주체는 동독 주민들이었다.

서독은 동독 주민들이 그러한 결정을 할 수 있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토대를 제공했다. 동방정책을 통해서 구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이주한 동포들을 따뜻하게 포용했다. 독일 통일이 가능하기까지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눈부신 경제적 성취도 있었다.

경제적 성취 위에 잘 갖춰진 인간 중심의 사회복지제도,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하는 넓은 포용 능력, 합의에 기반을 둔 정책의 일관성이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을 앞당긴 힘이었다.

왜 우리는 우리 문제를 국제화하는가

한반도는 지금 전지구적인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체제 위기가 심화되는 북녘 정권은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에 의지해 주민들을 폭압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남쪽에서는 대북 및 통일정책을 둘러싸고 남남갈등이 고조되고 있고 정치권은 정파적 이익에 매몰돼 한반도의 통일 비전과 정책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 답답한 것은 핵무력 강화를 향해 폭주하는 북한 때문에 남북한 문제가 국제화돼 남북한 당사자들의 역할이 극도로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잔혹한 식민 지배를 겪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국이면서 분단된 한반도임에도 광복 71년을 맞은 지금까지 통일로 가는 길은 멀게만 느껴진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이룩한 독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은 진정 무엇일까? ‘다름’을 인정하고 합의 기반을 넓혀가며, 소수자와 약자를 배려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통일을 준비하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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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철 KBS PD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KBS 다큐멘터리국 책임 프로듀서·심의부장, 민주평통 상임위원(16기),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역임. 통일언론상 대상, 국민포장 수상. KBS 주요 프로그램 ‘현지 르포, 북한-중국 자본에 종속되는가’(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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