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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vol 119 | 20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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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를 통해 들여다보는 광복, 분단, 그리고 통일

맥아더가 지켜준 대한민국,
통일 이뤄야 ‘진정한 광복’완성된다

1950년 9월 15일 참모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1950년 9월 15일 참모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원수(오른쪽에서 두 번째).

‘타고 난 전사’ 맥아더의 공과는 무엇인가. 그를 통해 지켜낸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
‘온전한 광복’은 겨레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과 체제 아래 ‘통일’되어 자유와 인권, 번영을 누리게 되는 ‘그날’ 성취된다.


맥아더를 통해서 본 광복과 건국,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미국 육군 원수 반열에 오른 맥아더는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관이자 전사였다. 맥아더만큼 극단의 찬사와 비난을 한 몸에 받은 군인은 미국 역사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뉴욕에서 열린 그의 퇴임 퍼레이드에는 700만여 명이 몰려 열광했다. 반면 이른바 지식인들 특히 정치학자들은 ‘군에 대한 문민의 통제’ 원칙을 들어 그를 비난하고 트루먼 대통령을 옹호했다.

윌리엄 맨체스터는 맥아더에 대한 가장 균형 잡힌 평가서로 꼽히는 맥아더 전기 <미국의 카이사르 : 더글러스 맥아더, 1880-1964(American Caesar : Douglas MacArthur, 1880-1964)>를 썼다. 900여 쪽이 넘는 이 책에서 맨체스터는 “맥아더는 전쟁을 ‘정책의 연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정책의 붕괴(단절)에 의한 결과물’로 보았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면 승리해 평화를 회복할 때까지는 온 역량을 군인에게 모아줘야 한다고 믿고, 그에 대한 정치적 제약에 반발한 인물이었다”고 기술했다(752쪽). 중공군의 참전으로 6·25의 전세가 복잡해지자 맥아더는 만주를 폭격해 적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고자 했으나 트루먼 정부의 반대로 무산된 사례, 소위 ‘맥아더·트루먼 갈등’과 관련한 평가다.

중·소는 3차 세계대전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맥아더는 공산군에게 만주를 ‘불가촉 성역’으로 있도록 허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고 봤기에 만주 폭격, 심지어는 원폭의 사용도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먼과 참모들은 ‘제한 전쟁’을 작정했기에 이 요구를 거부했다. 워싱턴 당국은 확전은 스탈린의 계략에 말려들어 궁극적으로는 서유럽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함정으로 보고, 압록~두만강 이북에 대한 모든 군사작전을 금지했다.

역사에 가정을 적용하는 것은 부질없지만 만주 폭격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리라는 워싱턴의 우려는 과장된 측면이 강했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50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고,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기에 또 하나의 세계대전을 치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중국 또한 가까스로 내전을 평정해 공산 정권을 세운 지 1년 남짓밖에 안 돼 대규모 전쟁을 감내할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공군 참전 직후부터 만주를 폭격했다면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는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중공군의 3, 4차 공세를 물리치고 문산~양양 선까지 진출했던 1951년 3월 이후엔 다시 북진을 개시해 통일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 우선주의’에 사로잡힌 워싱턴은 한반도라는 구덩이에 발을 깊게 담글 의지가 애당초부터 없었다. 태평양을 지킬 수 있는 보루인 일본을 단독으로 확보하고 있었으니 더 말해 뭣하겠는가?

되돌아보면 이는 소수파였던 ‘아시아통’의 맥아더 그룹이 압도적인 다수파인 ‘유럽 우선주의’의 마셜과 국무부 그룹에 ‘팽’당한 사례였다. 맥아더는 1951년 5월 ‘문민 통제의 원칙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反)민주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유엔군 사령관 및 미 극동군 사령관 직책에서 해임당했다. 그 후로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조차 예측하지 못한 무능한 지휘관으로 학자들에게 매도당하기까지 했다.

과연 그런가? 무능한 정보참모의 대명사가 된 윌로비를 휘하에 두었던 맥아더에게 전혀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보 수집과 정보 판단의 최종 책임은 ‘당연히’ 워싱턴 당국에 있다. 이것은 상식의 문제이다. 워싱턴 당국이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을 예측했다거나, 이에 대한 경보를 현장 지휘관인 맥아더에게 발령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맥아더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희생양’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가 제3대 필리핀 총독이었기에 맥아더는 어린 시절부터 아시아에 친숙해, 미 군부 내의 소수파인 아시아 그룹의 대부가 되었다. 맥아더가 한국과 실질적으로 인연이 닿은 것은 한반도 분단 내용을 담은 ‘일반명령 제1호(General Order №. 1, 1945. 8. 17)’를 그의 이름으로 발령하면서부터였다.

이 명령은 합참을 비롯한 워싱턴 당국이 작성한 것이었다. 당시 태평양 지역의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의 이름으로 항복한 일본 군인들이 지역에 따라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지를 지시한 것이었다. 이 명령에 따라 38선 이북에는 소련군,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해 일본군을 무장해제하면서 한반도는 분단되었다(분단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는 이완범의 <한반도 분단의 역사> 참조).

한반도 적화를 막은 맥아더

두 번째는 38선 이남지역에 미 군정을 설치한다는 ‘맥아더 포고령 제1호(1945년 9월 7일)’의 발령이었다. 9월 8일 인천에 들어온 미군은 이튿날 서울에 입성해 일본 총독으로부터 항복 서명을 받고, 그로부터 3년 가까이 이 땅에서 군정을 펼쳤다. 남한 주둔 미 24군단은 맥아더 휘하였으므로, 남한은 맥아더 관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4군단장인 하지 중장은 워싱턴의 통제하에 직접 군정을 시행했기에 맥아더는 일본 통치에 주력했다.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터지자 맥아더와 한국의 직접적 인연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 대북 선전포고를 하며 ‘미국의 이름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현명하게도 유엔 안보리를 움직여 국제사회와 더불어 ‘유엔의 이름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유엔 안보리는 미국의 주도하에 연달아 3개의 결정적 결의안도 통과시켰다. 안보리는 6월 25일(S/1501, 또는 UNSC-82)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면서 38선 이북으로 즉각 복귀할 것을 요구했다. 27일에는(S/1511, 또는 UNSC-83) 유엔 회원국들이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도록 권고했고, 7월 7일에는(S/1588) 유엔군 사령부 창설을 결의했다. 유엔의 위임을 받은 미국은 7월 10일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그러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 맥아더는 특유의 리더십과 ‘전사 본능’을 발휘해 전광석화 같은 초기 대응에 나섰다. 6월 27일 휘하에 있는 해·공군 부대를 한반도 전역에 전개시키고, 참모들을 대동해 수원비행장을 거쳐 영등포의 한강 방어선을 시찰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나오는 신동수 일병과의 감동적인 대화는 여기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도쿄로 복귀한 맥아더는 즉각 지상군 투입을 준비해 6월 30일 1개 포대(중대)를 포함한 대대 규모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TF Smith)’를 부산에 도착시킨 다음 7월 5일 오산 북방 죽미령에서 초전을 치르게 했다. 그 후 속속 투입된 미군들은 지연전에 나선 한국군 부대들과 함께 공간과 인력을 소모해가며 ‘시간을 버는’ 작전에 몰입했다. 그 덕택에 낙동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윽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기습 남침 한 달 안에(북한은 소련군이 작성해준 ‘29일 작전계획’을 갖고 있었다) 적화통일을 이루려던 북한의 야망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필자는 1945년 8월 15일을 ‘미완의 광복’을 한 날이라고 본다. 그날 35년 동안 지속된 일본제국주의의 압제 사슬이 벗겨졌다. 지금 이날을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으나, ‘온전한 광복’은 겨레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과 체제 아래 ‘통일’되어 자유와 인권, 번영을 누리게 되는 ‘그날’ 성취된다고 본다.

광복과 건국과 통일의 문제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누리는 ‘광복’은 국토의 절반, 인구의 3분의 2에게만 허용된 ‘부분 광복’ 혹은 ‘불완전한 광복’이다. 진짜 ‘광복절’은 자유민주주의로 통일을 이루는 날로 미뤄두고, 1945년 8월 15일은 그냥 ‘나라를 되찾은 날’로 기억했으면 한다. 건국 문제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것은 이념적 진영 논리나 정치적 이해관계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상식의 잣대로 보면 될 것이다. 한 국가가 대내외적으로 인정받는 기본 요건은 영토와 국민과 주권이다. 이는 만국에 통용되는 상식이다. 1919년 4월 13일 선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세 요건 중에 어느 것도 갖추지 못한 문자 그대로 ‘임시’ 정부이자 ‘망명’ 정부일 뿐이다. 우리 헌법 전문의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는 계승한다는 것이지 임시정부 선포를 곧 대한민국 건국으로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1948년 8월 15일 영토와 국민 주권을 오롯이 갖춰 건국한 대한민국이 1919년 이래의 위대한 독립정신과 투쟁, 그리고 임시정부가 표방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주의를 받들어 계승하겠다는 명시일 따름이다. 1919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씨앗이 ‘잉태’된 해이지 대한민국이 ‘탄생’한 해가 아니다.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라면, 그 후의 독립투쟁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니 터무니없는 짓이 되고 만다.

맥아더 원수와 일본 쇼와 천왕. 1945년 패전으로 일본 천왕은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었다.맥아더 원수와 일본 쇼와 천왕. 1945년 패전으로 일본 천왕은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었다.

1948년 8월 15일에는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도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1948년 5월 30일 총선거로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구성되고,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으며, 마침내 8월 15일 정부가 출범함으로써 입법, 사법, 행정의 공화국 3부 설립이 완결되었다. 그러니 그날이 바로 대한민국의 건국이 완성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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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성 한국위기관리연구소장
육사 26기,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역사학 박사. 육사·국방대 교수, 대통령 안보보좌관실 국제안보담당 보좌관, 국방대 안보문제연구소장 등 역임. 현재 한국군사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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