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신사적입니까. 우리나라도 여러 외국의 나라들에서처럼 상품을 살 때 카드를 쓰고 있습니다. 판매원도 주민도 돈 계산을 현금 출납에서 카드 하나로 하는 것을 아주 편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양 광복백화점의 여직원이 평양을 찾은 외국인에게 한 말이다. 북한은 2010년대 초부터 자국 내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고 있다. 특히 2010년 5·24 조치(천안함 폭침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취한 대북 제재조치) 이후 조선무역은행에서 출시한 ‘나래’와 고려은행의 ‘고려’, 조선중앙은행의 ‘전성’, 황금의 삼각주은행에서 발급한 ‘선봉’ 카드 등 전자결제 시스템이 한층 발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카드 사용뿐만이 아니다. 평양과 평성, 함흥 등에서 택시가 증가하고 있는 모습은 대북 제재의 영향과는 무관한 양상을 띠고 있다.
현재 북한에서 출시된 나래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은 2010년 말에 카드가 도입된 후 계속 확산되고 있다. 미래과학자거리, 경흥거리, 광복거리 등 평양시 전체 지역으로 확산된 카드 가맹점은 평양 시내 주요 호텔과 식당, 상점(슈퍼마켓), 외화상점, 이동통신판매소(휴대폰판매소) 등 수백 곳에 달한다. 카드를 사용하는 계층도 외국인 관광객은 물론, 국가기관 고위 간부, 무역 관련 일꾼, 유학생을 비롯해 일반 주민과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지고 있다.
함경북도에 거주하는 한 주민은 “평양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자녀들이 방학을 맞아 집에 왔다가 개학을 앞두고 평양으로 갈 때면 중국 돈(위안)을 달러로 바꿔서 보내느라 며칠씩 시장에 가서 돈 장사꾼들을 찾아 발품을 판다”고 했다. 지방에서의 환율과 평양에서의 환율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 평양에서 환전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평양에서 사용하는 카드는 달러로 입금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0년부터 나래 등 전자결제 시스템 등장
그는 “딸애들이 친구들과 함께 시내에 나가 식사(외식)를 할 때는 물론 백화점에서 물건 하나를 사려 해도 카드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달러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 주민에 따르면 광복백화점(광복지구상업중심)의 경우 전부 카드를 사용해야 하고, 평양시 중구역, 서성구역, 모란봉구역, 평천구역, 동대원구역 등에서도 상점과 식당을 이용할 때 카드 결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을 자주 드나드는 무역일꾼들과 외무성 산하 기관들에 종사하는 직원과 그 가족들, 유학생들은 2000년대와 비교해 한층 고급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의 생일이면 카드를 사용해야 하는 고급 식당을 이용하고, 카드로 선물 구매를 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애쓰고 있다.
일부 젊은 유학생들 중에는 “카드가 몇 개 있느냐”로 경제력을 뽐내기도 한다. 같은 품종의 상품을 구매한다고 볼 때 백화점에서 카드로 구매하는 가격과 현금으로 시장에서 구매하는 것은 가격 차이가 있다는 것을 대부분 주민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백화점을 가느냐, 시장을 가느냐가 해당 주민의 생활 여건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북한의 대규모 도서관인 인민대학습당과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건축대학 등 대부분 대학들의 도서관에서도 카드 사용 시스템이 도입된 상태다. 이전에는 표나 현금으로 이용하던 평양지하철에서도 카드를 사용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북한 상점과 음식점, 도서관, 지하철 등에서 카드 사용이 늘면서 북한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얼마일까. 아쉽게도 북한 당국의 외부 정보유출 통제·관리가 엄격해 정확한 통계가 집계되지 않고 있다. 다만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입수되는 정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외국인들이 북한을 방문하는 기간 동안 숙박, 식사, 이동 등에 카드 사용을 유도해 많은 외화를 획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전자결제카드 ‘나래’와 사용설명서, ‘선봉’ 카드와 카드단말기.
1990년대 중반 이후 만성적인 경제난 속에 매일 시장 활동을 해야 하는 북한 여성들은 대부분 한 번쯤 돈 가방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외화에 비해 가치가 바닥인 북한 돈으로 물건을 구매하려면 돈을 세는 것만 해도 시간이 걸리는 데다 조금만 방심해도 돈 가방 끈이 잘려나가거나 돈을 털린 채 가방만 매달려 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 북한의 상점과 장마당이다. 이런 일은 백화점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북한 주민들의 치명적 고민을 해결해주는 카드가 출시되면서 주민들의 걱정이 하나 줄어둔 셈이다. 돈이 들어 있는 돈 가방을 가지고 다니는 것보다 얇은 카드 한 장은 보관하기도 좋고 사용도 편리하다. 실제 카드를 사용하고 있는 주민들 대부분이 부피가 작고 계산하기도 쉬운 카드 결제를 좋아한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평양의 한 주민은 “백화점을 가거나 식당을 가도 돈 가방을 잃어버릴 걱정이 없어서 정말 편리합니다. 카드가 나오기 전에는 돈 가방을 사용하면서 조금만 방심해도 전부 잃어버리기도 했는데 카드는 간단해서 잃어버릴 걱정이 없고 돈을 세서 내고 받는 절차 없이 간단해서 모두 좋아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북한을 방문했던 한 외국인이 촬영한 사진에서도 보통강백화점과 광복백화점 등을 이용하는 주민들이 카드 결제를 위해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카드 사용에 신난 북한 주민들
북한 내 카드 사용은 주민들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택시 요금도 카드로 지불하고, 상점이나 백화점은 물론 꽃집에서도 카드 결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평양시 외곽인 형제산구역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지난해 7월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살고 있는 친척집에서 (김일성) 애도 행사를 가게 됐는데, 친척 언니가 모란꽃상점에서 카드로 꽃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잘사는 것처럼 보여서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사는 형제산구역은 대부분 농촌 지역이어서 그런지 카드 사용자가 없는데 도심에 나오니까 확실히 카드 사용자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면서 “같은 평양시에서도 ‘도시와 농촌의 차이’가 있는데 지방에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황해남도에 사는 한 주민은 “평양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할 때 택시를 이용했는데 ‘평양역에서 3대혁명전시관까지 10달러, 카드도 된다’는 운전수(택시기사)의 말에 한참을 대답할 수 없었다”면서 “우리(북한) 돈을 주로 사용하는 황해도와 달리 평양에서는 달러를 사용하는 것도 신기하고, 카드를 사용하는 것도 이색적이었다”고 말했다.
평양의 곳곳에서 택시들이 늘어난 것이 눈에 띈다.
관광이나 비즈니스를 목적으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평양의 큰 시장인 통일거리시장과 능라시장에서도 외국인들이 카드로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에서 ‘나래’ 카드를 직접 사용해본 외국인들은 “물건을 산 후 유로나 달러를 내면 거스름돈이 없어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지만, ‘나래’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서부터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같은 물건이나 음식이라도 북한 주민들이 내는 카드 금액보다 외국인들이 내는 카드 금액이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게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다. 외국인들은 비싼 가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식당과 호텔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카드 출시 노림수
관광의 경우 돈을 얼마만큼 지불하는가에 따라 대우도 달라진다. 2016년 평양과 개성, 양강도 지역을 관광했다는 한 외국인은 3만 달러를 냈더니 평양에서 삼지연까지 일반 여객기가 아닌 전용 비행기를 타고 갔다고 증언했다. 여행 기간 동안 사진 촬영 제한이나 규제 같은 것도 별로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 당국에 ‘갑부’로 보인 그 외국인은 북한이 김일성 ‘혁명 활동 성지’로 특별 관리하는 삼지연 못가에서 수영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고 증언했다.
북한이 이처럼 카드 사용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노림수는 무엇일까? 북한은 2010년에 있은 5·24 조치 이후 자금난을 겪게 됐다. 이후 연속되는 핵실험 등으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강력하게 실행되면서 돈을 많이 벌어들이던 일부 품목들에 대한 규제로 자금난이 심화됐다. 실제 북한은 무기, 마약, 인력 수출, 가짜 달러 제조 등으로 고액의 자금을 마련하던 창구가 대북 제재로 막혀버린 이후 무역 관련 회사들의 규모를 키우고 무역액 부담을 늘리고 있는 형편이다.
카드는 외국인 관광객을 통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쓰일 뿐 아니라 북한 내 화교 및 탈북민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외화 뽑아내기’ 작전에도 유용하게 사용된다. 또한 북한 주민들 사이에 음성적으로 거래되고 있는 달러를 흡수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이유야 어쨌든 북한 주민들이 자유로운 카드 사용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북한 주민들이 자본주의 경제 활동을 통해 한층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강 미 진
데일리NK 기자
북한 양강도 백암군임업전문학교 졸업. 북한을 탈출해 2010년 7월 대한민국 정착. KBS 한민족방송 강사, 법무부 법사랑위원회 위원, 데일리NK·국민통일방송 보도국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