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발췌본 <화랑세기>, 1995년 필사본 <화랑세기>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책을 위서라고 했다. 그들은 그들이 20세기 초 이래 세워왔던 신라 골품제, 친족제, 왕위 계승, 그리고 화랑도에 대한 가설에 집착해 새로 발견된 <화랑세기(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1989, 2005)>를 신라인 김대문의 저술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의 세보(世譜), 낭정(郎政)의 대자, 파맥(派脈)의 정사(正邪) 등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여기서는 18세 나이에 화랑의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가 된 김유신이 가졌던 꿈 두 가지를 주목하기로 한다. 하나는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해 외국의 적으로부터 침략을 받는 근심을 없애려는 꿈이었고, 다른 하나는 열 살의 김춘추를 언젠가 왕으로 세우려는 꿈이었다. 이 두 가지 꿈은 모두 이루어졌다. 분명한 사실은 김유신의 두 가지 꿈이 모두 화랑도에 의해 실현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화랑도로 일궈낸 삼한 통합
609년에 화랑이 되었고, 612년 풍월주가 된 김유신은 늘 화랑도 무리들에게 “우리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삼한을 통합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럽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을 다투느냐.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게 되면 곧 나라에 외우(外憂, 외국의 적이 침입하는 근심)가 없어질 것이니, 가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김유신은 삼한 통합을 이루려는 거대한 꿈을 화랑도들이 공유하도록 한 것이다.
화랑도가 어떤 것이기에 삼한 통합의 꿈을 공유할 수 있었을까.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 조직이 편제된 것은 540년 당시 일곱 살의 진흥왕이 즉위했을 때 섭정을 한 지소태후에 의해서였다. 원래 487년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신궁(神宮)에서 대제를 행하던 선도(仙徒)가 있었다. 선도의 우두머리는 원화(源花)였다.
지소태후는 선도를 폐지하고, 화랑도 조직을 만들었다. 그 무리를 풍월(風月)이라 했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다. 이렇게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가 만들어졌고, 그들의 임무도 도의를 힘쓰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 그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들이 화랑도에서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김유신은 화랑도를 적극 활용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뤘다.
화랑도 조직은 크게 선문(仙門)과 낭문(郎門)으로 나뉘었다. 선문은 화랑들로 이뤄졌다. 선문의 우두머리는 풍월주였고 그 아래 부제(副弟)가 있었다. 그들 밑에 화랑도 조직을 좌삼부(도이·무사·문사), 우삼부(현묘·악사·예사), 전삼부(유화·제사·공사)로 나누었는데 이를 합치면 9부가 되었다.
각 삼부에는 각기 좌방대화랑(1인), 좌방화랑(2인), 소화랑(3인), 묘화랑(7인)이 있었다. 이 같은 삼부 외에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 등이 별도로 존재했다.이들 선문의 화랑들은 현재로 따지면 군대의 장교에 해당했다.
5세(五世) 사다함은 열여섯 살에 풍월주가 되었고, 8세(八世) 문노의 경우 마흔두 살에서 마흔다섯 살까지 재임했다. 대를 이어 화랑이 되는 가문도 있었다. 15세(十五世) 유신공과 19세(十九世) 흠순공처럼 형제가 풍월주가 되기도 했다.
화랑도의 무예를 재현한 시범 공연.
풍월주의 임명에는 지소태후, 진흥왕, 그리고 진흥왕의 후궁인 미실 등이 관여했다. 후에는 전임 풍월주들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볼 수 있다. 풍월주와 화랑의 현직에서 물러나면 상선·상화가 되었다. 이들 상선·상화는 화랑도의 낭정(郎政)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선·상화는 조정의 신료로 나가거나 군대의 장군으로 진출했다.
선문의 아래의 낭문(郎門)은 낭두(郎頭)와 낭도(郎徒)로 나뉘었다. 낭두는 현재 군대의 부사관에 해당하는 존재들이다. 낭두는 7등급(후에 9등급)으로 나뉘었다. 낭두는 60살이 넘어서까지도 그 직을 유지했다. 낭두들은 대를 이어 그 직을 차지하며 커다란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낭도는 현재 군대의 사병에 해당한다. 서민의 아들들로 준수하면 낭문에 들어가 낭도가 되었는데, 13~14살에 동도(童徒, 18~19살에 평도(平徒), 23~24살에 대도(大徒)가 되었다.
화랑도에는 화랑도와 관련된 일을 맡았던 여자들이 있었다. 풍월주의 부인은 화주(花主)라고 불렀고, 낭두의 부인들은 봉화, 봉로화, 봉옥화로 불렀다. 한편 서민의 딸로 준미한 자들을 낭문에 속하게 해 남도(南桃)라는 곳에 머무르게 했고, 이들은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화랑들의 애국충절을 표현하던 칼춤을 전승한 진주검무.
김유신은 18세부터 꾸었던 삼한 통합의 꿈을 혼자만의 꿈이 아닌 화랑도 전체의 꿈으로 만들었고, 나아가 신라인들 모두의 꿈으로 만들었다. 화랑도에서 김유신의 삼한 통합이라는 꿈을 공유한 화랑도들은 화랑도 활동을 끝내고 난 후에도 그 꿈을 이어나갔다. 화랑들은 조정의 신료들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낭도들은 30살이 되면 화랑도의 낭적을 지우고 농공에 종사하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으며, 신라 왕경과 지방의 하급 지방관이 되었다.
이로써 화랑도에서 공유한 삼한 통합의 꿈은 신라왕국 전체에 퍼져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612년 김유신의 삼한 통합에 대한 꿈은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평정하며 이룰 수 있었다. 김유신은 삼한 통합이라는 꿈을 58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치열하게 살며 이루어낸 것이다.
김춘추의 왕위 계승
성골왕이었던 26대 진평왕은 왕실에 대를 이을 성골 남자가 태어나지 않자 왕위 계승권자를 새롭게 결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603년 진평왕은 그의 장녀 천명공주와 용수(폐위된 25대 진지왕의 장남)를 혼인시켜 사위인 용수를 왕위 계승권자로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진평왕은 612년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춘 둘째 딸 선덕공주를 왕위 계승권자로 정하고, 천명공주와 용수 그리고 603년 왕궁에서 태어난 김춘추를 출궁시켰다. 진골인 용수가 아니라 비록 여자지만 성골 신분을 가진 선덕공주를 왕위 계승권자로 정했던 것이다.
612년 김춘추가 부모(용수, 천명공주)와 함께 출궁하는 순간, 김유신은 김춘추를 화랑도 전체의 2인자인 부제로 삼았다. 화랑도 활동을 하지 않았고, 열 살밖에 안 된 김춘추를 부제로 삼은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김춘추로 하여금 낭도를 거느리게 하여 위엄을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김춘추를 언제인가 왕으로 삼기 위한 첫걸음을 뗀 조치였다. 진평왕이 비록 선덕공주를 왕위 계승권자로 정했지만 성골의 대가 끊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김유신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진지왕의 손자이고 한때 왕위 계승권자로 정해졌던 용수의 아들 김춘추를 성골들이 사라진 신라의 군주로 모시려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발견된 <화랑세기> 필사본. 김유신과 함께 화랑도를 바탕으로 삼국을 통일하고 왕위에 오른 김춘추(작은 사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칠성우(七星友)라는 결사를 만들었다. 칠성우는 모두 화랑들이었고, 그중 호림공(十四世), 유신공(十五世), 보종공(十六世), 염장공(十七世)은 풍월주였다. 그들 칠성우가 힘을 합쳐 수많은 장애물을 물리치며 결국 654년에 김춘추를 왕으로 옹립했다.
물론 18(十八世)세 풍월주를 지낸 김춘추도 피동적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백제를 정복하는 등 신라 중흥의 군주가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김유신은 풍월주가 되며 꾸었던 또 하나의 꿈, 열 살 나이의 김춘추를 왕으로 삼기 위한 프로젝트를 43년 만에 이루었다.
남북통일과 화랑도
김유신의 두 가지 꿈은 꿈으로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이 되었고, 이 두 사건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한 역사 그 자체가 되었다. 김유신이 없었다면 김춘추의 왕위 계승은 불가능했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수 없었다면 신라의 삼한 통합은 불가능했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신라인 김유신은 현재 한국인을 만든 주역 중에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다. 김유신의 두 가지 꿈은 삼국을 하나로 통합해 더 큰 나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한국인의 미래를 열었다.
신라시대의 삼한 통합과 현재의 남북통일은 그 출발점부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삼한 통합은 적이 된 삼국, 민족이나 종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삼국을 통합한 것이다. 그와 달리 현재의 남북통일은 유엔에 회원국으로 각각 가입돼 있는 서로 다른 국가가 통일하는 개념 이지만 사실은 신라의 삼한 통합 이래 하나로 살아온 민족이 나뉜 것을 통일하는 것이다.
이들 이산가족과 씨족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김유신이 꾸었던 꿈의 또 다른 버전인 화랑도가 필요하다. 새로운 버전의 화랑도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 체제를 신봉하고, 국민이 주권을 가진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수호하는 단합된 꿈(정신)을 갖춘 국민이 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에는 이 같은 통일을 이루기 위한 커다란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강력한 국력을 키우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 종 욱
서강대 명예교수
서강대 사학과 석·박사, 서강대 교수, 한국고대사탐구회 창립, 서강대 총장 역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 학술상 수상. 저서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춘추 : 신라의 피 한국·한국인을 만들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