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이 업어주고
문화가 등을 다독거릴 때
골목길들이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넓어지는 길
골목골목이 소곤거리고
계단마다 반짝거리는 햇살
-신달자 ‘내 동네 북촌’ 중에서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미술사연구소 소장
조선시대에는 청계천이 서울을 가르는 큰 경계선이었다. 청계천 북쪽을 북촌이라 했고, 남쪽을 남촌이라 했다. 남촌엔 주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고, 북촌엔 왕궁은 물론 주로 세도 명문가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예부터 ‘서울’ 하면 북촌을 떠올렸다. 북촌이 서울의 중심이자 우리나라 정치, 문화, 상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런 전통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북촌, 종로 일대를 우리나라 정치 1번지로 부르고 있다.
현재는 종로 일대는 상가로, 인사동 일대는 관광지로 변해서 북촌 하면 이보다 북쪽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북촌로를 중심으로 한 가회동, 계동, 삼청동 일대를 주로 일컫고 있다. 경복궁 서쪽 일대를 서촌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데, 서촌은 서울 남·북촌의 개념과는 다른, 단지 경복궁 서쪽이라는 개념으로 쓰이는 좁은 의미에서의 서촌에 불과하다.
최고급 민박집으로 유명한 취운정.
북촌 길은 남북으로 난 길과 동서로 난 길이 씨줄날줄로 얽혀 있다. 남북길은 우선 지하철 안국역 헌법재판소에서 감사원까지 가는 북촌로와 중앙고까지 가는 계동길이 있다. 또한 종로경찰서 건너편에서 올라가는 길, 구 풍문여고와 덕성여중고를 따라 올라가는 감고당길, 삼청동을 내려다보고 가는 길이 있다. 그리고 창덕궁 돌담길 등 남북로는 크게 6개가 있다.
동서길은 세 길인데 경복궁 정문에서 창덕궁 정문까지의 길, 창덕궁에서 재동 정문을 거쳐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 정문까지의 길, 감사원 앞에서 삼청동길까지의 길이다. 이들 큰길에서 작은 골목길이 이리저리 얽히고설켜 복잡다단하게 이어지고 있는 곳이 북촌이다.
북촌 제1경 창덕궁 돌담길
창덕궁 서편과 우리나라 건축의 산실이던 구 공간사(현 아라리요 미술관) 사이로 난 길이 있다. 여기서 한 블록 들어가면 유명한 한식집 용수산(비원)이 있다. 용수산 왼쪽으로 꺾어지면 재동초등학교를 지나 경복궁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용수산에서 북쪽으로 난 창덕궁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창덕궁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를 북촌 제1경이라 한다. 한옥과 일본 가옥이 공존하고 있는 묘한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창덕궁 담을 끼고 좀 더 북쪽으로 직진하면 왼쪽에 불교미술박물관 자리가 나온다. 지난해 국내 유일한 불교 사립박물관이 사라진 게 못내 서운하다. 여기서부터 창덕궁의 아름다운 담장은 민가에 가려 볼 수 없게 된다. 국가나 서울시에서 민가를 구입해 철거하기를 학수고대한다. 여기서 50여m 직진하면 2차선 길은 사라지고 좁은 골목길이 나타난다. 서쪽인 왼쪽으로 꺾어지면 중앙중고교로 가는 언덕길이 나타난다.
서울시 문화재인 고희동 가옥.
이 삼거리 골목길 입구 왼쪽(서편)에 근대 유명화가인 고희동 가옥(서울시 등록문화재38호)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고희동 전시관(수~일요일 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오른쪽(동편)으로는 이기태 전통연공방, 하늘물빛 전통염색공방, 궁중음식연구원(중요무형문화재 38호) 등 공방들이 줄지어 있어 ‘원서동 전통공방길’이라 부른다. 궁중음식연구원 마당엔 궁중 우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화강석을 곱게 치석한 전통 우물로 뚜껑도 남아 있다. 궁중 나인들이 사용했던 우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가 북촌 제2경이다.
고희동 가옥에서 서쪽 길로 직진해 언덕을 지나면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세운 중앙중고등학교 정문이 나타나는데, 여기서 남쪽으로 계동길이 뻗어 있다.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과 최지우의 고교 시절을 촬영한 곳이고, 북촌 제3경 부근이다.
서울 유일의 한옥마을 ‘북촌로 11길’
계동길을 내려가다 보면 백상정사라는 석왕사 서울분원이 있다. 그 건너편에 이 동네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식수로 사용하던 석정보름우물이 있다. 근대 최고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한용운 스님(백상정사에 거주)과 천주교 주문모 신부가 이곳에 은거하면서 이 우물물을 마시고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길로 한옥이 늘어서 있어 장관을 이룬다.
50여m 더 내려가면 중앙중고등학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교육자였던 김성수 선생 옛집이 그대로 남아 있고, 계동교회가 있다. 여기서부터 현대 사옥까지 먹자골목이 형성돼 있는데, 밀양 손만두 등 맛집이 즐비하다. 계동길 입구가 되는 현대 사옥 건너편에는 구한말 세도가였던 민형기의 집인 ‘민재무관댁’ 한옥이 있다. 지금은 북촌 문화를 소개하는 북촌문화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옛 경기고 자리에 들어선 정독도서관.
헌법재판소를 지나 사거리를 지나면 오른쪽(동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등학교인 재동초등학교가 있고, 건너편(서편)이 가회동 주민센터다. 주민센터 자리는 독립운동가 이상재(1850~1920) 선생이 살던 집터였다. 주민센터와 북촌박물관 사이길 골목 세 번째 집이 근대 최고의 한옥으로 유명한 백인제 한옥(민속자료 22호)이다. 또한 부근에 천도교 교주이자 3·1운동 주역인 손병희 선생이 살던 집터가 있다.
주민센터 건너편 재동초등학교 북쪽 담을 끼고 동쪽으로 들어가면 서울시장 공관이 있다. 전통 한옥에서 변모됐지만, 옛 전통 한옥 대문이 그대로 있다.
주민센터에서 한 블록 북쪽으로 직진하면 돈미약국이 나온다. 돈미약국에서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면 오랜 역사를 가진 가회동 성당이 있다. 성당은 새로 건축을 해서 고색창연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볼 수 없다. 건너편에는 대표적인 도심 불교선원인 안국선원이 자리 잡고 있다. 더 직진하면 언덕 위에 감사원이 있고,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삼청동길이 나온다.
가회동 성당.
이른바 한옥길로 불리는 북촌로11길은 돈미약국 옆 갤러리 한옥(한국미술사연구소)에서 시작한다. 전통 동양화와 불화를 주로 전시·판매하는 전통 화랑으로 유명하다. 북촌로11길은 거의 모두 한옥으로 이뤄진 서울 유일의 한옥마을로 관광 명소가 되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맹사성 등 유명한 사대부의 대가(大家)들이 있었으나 1920~30년대에 재개발하며 30~50평의 한옥 밀집촌이 형성됐다. 한옥길은 서북쪽으로 계속 이어져 좌우로 즐비한 한옥들을 끼고 정상까지 이어진다.중턱에서 정상까지 두 길이 나오는데 한 길은 한옥길의 중심이고, 다른 길의 끝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직전 살던 취운정이 있다. 이곳은 지금은 최고급 민박집으로 유명하다. 이 정상에 이준구 가옥과 북촌동양문화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야말로 전망이 일품인 명당자리이다. 그래서인지 조선 초 명재상 맹사성이 이 일대에 집을 짓고 오랫동안 살았다. 한옥길 입구에서 여기까지 북촌 4, 5, 6, 7경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명실상부한 북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가마득히 올려다보게 되는 계단길
종로경찰서 정문 건너편 작은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중간에 근대 한국 불교의 산실이던 선학원이 자리 잡고 있고, 그 끝에는 윤보선 가옥(민속자료 27호)이 있다.
이보다 서쪽 인사동길을 건너면 옛 풍문여고와 덕성여중고교가 좌우로 있고, 길 끝에는 선재미술관이 있다. 길을 건너면 옛 경기고 자리인 정독도서관과 서울교육박물관이 있다. 이 길을 감고당길이라 하는데, 감고당은 인현왕후의 친정이자 명성황후가 왕비로 책봉받았던 집이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삼청동으로 가는 화개길과 동양문화박물관과 삼청동 전망대로 올라가는 길이 이어져 관광객들의 산책길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백인제 한옥으로 가는 한옥 골목.
율곡로 동십자각(유형문화재 13호)에서 왼쪽(서편)으로 경복궁 담을 끼고 북쪽으로 직진해 민속박물관 정문을 지나면 삼청동길과 청와대길이 갈라진다. 동십자각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법련사(송광사 말사)가 나오고, 한국현대미술관(서울분관)이 나타난다. 원래 종친부 터였으나 국군병원을 거쳐 최근에 현대미술관이 되어 대표적인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이때 종친부 건물(유형문화재 51호)도 복원해 공개하고 있다.
삼청동길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동편)으로 ‘삼청동문’ 각자(刻字)와 한옥길로 연결되는 계단길들이 가마득히 올려다보인다. 이곳이 북촌 8경이다. 왼쪽(서편)으로는 총리 공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더 직진하면 오른편(동편)에 금융감독원 교육관이 있는데, 경내에 번사창(유형문화재 51호)이 있지만 공개되지도 않고 안내판도 없다.
건너편에는 삼청동 등나무(천연기념물 254호), 측백나무(천연기념물 255호)가 있지만 지나치기 쉽다. 더 북쪽으로 직진하면 왼쪽(서편)으로 김홍기 가옥(민속자료 8호)과 칠보사가 나타나고, 큰길로 더 직진하면 삼청공원이 펼쳐진다. 삼청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북촌 탐방의 대미를 장식하면 최상의 탐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