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선암사 무우전의 돌담 옆에는 수령 400~600년 된 매화나무 고목이 줄지어 서 있다.
이 봄, 진한 매화의 향기를 느끼고 싶다면 여행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전남 순천의 선암사다. 수령이 400년이나 된 토종 매화나무들이 객을 반긴다. 선암사까지 갔다면 낙안읍성 민속마을을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이순신 장군의 기상이 깃든 곳이다. 인근 순천만 갈대밭에서 일출이나 저녁놀을 보는 것은 여행길의 또 다른 맛이다.
양영훈 여행작가
바야흐로 매향(梅香) 그윽한 봄날이다. 섬뜩한 꽃샘바람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리는 매화는 산뜻하고도 그윽한 꽃향기가 일품이다. 흔히 ‘암향(暗香)’으로도 불리는 매화 향기는 코로 맡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향기’라 한다. 어디선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까지도 알아챌 정도로 마음이 고요해야만 비로소 매화 향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매향은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서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로 이끌어주는 지순(至純)의 향기다. 매화의 은은한 향기와 고고한 기품을 오롯이 느끼려면 아무래도 인적 드문 산사가 제격이다. 오랜 내력을 이어오는 절집치고 한두 그루쯤의 매화 고목이 없는 데는 드물다. 하지만 전남 순천시 승주읍의 선암사(061-754-5247)만큼 진한 매화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남도의 명산 조계산(884m) 자락에 위치한 선암사에는 유난히 꽃과 나무가 많다. 그것도 근래에 심은 것이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제자리를 지켜온 노거수가 대부분이다. 나무의 종류도 동백, 매화, 산수유, 영산홍, 차나무, 수양벚나무, 무화과나무, 소나무, 전나무, 팔손이나무, 은행나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래서 선암사의 경내는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순차적으로 꽃망울을 터뜨리는 꽃나무와 화초들로 늘 화사한 봄빛을 띤다.
<사진> 새싹이 파릇하고 봄꽃들이 앞다투어 피기 시작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의 풍경.
선암사에는 매화나무도 아주 많다. 특히 무우전과 팔상전 주변에는 아주 오래된 토종 매화나무 20여 그루가 모여 있다. ‘선암매(仙巖梅)’라고도 불리는 선암사의 토종 매화나무들 가운데 수령 400년 이상의 고목만도 10여 그루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원통전 뒤에 홀로 서 있는 백매는 수령이 약 620년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많은 매화나무로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가 중창한 선암사의 상량문에 의하면 와룡송(臥龍松)과 함께 심은 나무라고 한다. 이 선암매(제488호)는 지난 2007년 11월에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제484호), 구례 화엄사 매화(제485호),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제486호)와 함께 문화재청에 의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근래 개량된 매화나무들은 대체로 가지마다 빽빽하게 꽃눈이 맺힌다. 하지만 선암매 같은 토종 매화는 작은 꽃송이가 드문드문 맺힌다. 만개한 꽃봉오리도 활짝 벌어지지 않은 채 약간 오므린 상태로 피었다가 진다. 그래서 언뜻 화사함보다는 소박한 멋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또한 선암매의 단아한 기품과 짙은 향기만큼은 겉멋만 화려한 개량 매화가 따라오질 못한다.
선암매가 은은한 꽃향기를 흘릴 즈음이면 장경각 옆의 앵두나무, 조사전 옆의 산수유나무, 적묵당 연못 옆의 수양벚나무도 염려한 꽃부리를 펼침으로써 뭇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곤 한다. 사실 선암사는 꽃이 없는 겨울철에도 화사하기 그지없다. 설선당과 원통전의 문짝에는 탐스럽게 핀 모란꽃이 그려지거나 조각돼 있다.
선암사의 늙은 매화나무들이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는 시기는 대략 3월 25일~4월 10일 사이다. 물론 개화 절정기는 기상 상태에 따라 해마다 달라지게 마련이다. 탐매(探梅)를 제대로 즐기려면 미리 전화로 개화 상태를 파악한 뒤에 길을 찾아가는 것이 좋다.
<사진> 선암사 설선당 문에 새겨진 모란 그림. 백설이 흩날리는 한겨울에도 봄처럼 화사하다.
400년 전 모습 고스란히 간직한 낙안읍성
번잡한 일상을 모두 떨어낸 듯 느긋하게 선암사의 봄 풍경을 즐기노라면, 봄날의 짧은 햇살이 아쉽기만 하다. 아쉬운 발길을 돌려 낙안읍성 민속마을로 향한다. 선암사에서 순천시 낙안면 소재지의 낙안읍성 민속마을까지는 약 20km를 가야 된다. 상사호 호반길과 율치재를 거쳐서 금전산 중턱의 오공재를 넘어서면 낙안읍성과 낙안 들녘이 한눈에 들어온다.
낙안읍성은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축조되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았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7년 8월 9일에는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해남으로 가다가 이곳에 들러 의병과 군량미를 모았다고도 전해진다. 당시 마을의 원로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던 장군은 마을 당산나무에도 술 한 잔을 올렸다고 한다. 이후로 주민들은 그 나무를 ‘장군목’이라 부른다.
낙안읍성이 오늘날과 같은 석성으로 중수된 것은 인조 4년(1626)의 일이었다.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토성이었던 낙안읍성을 둘레 1410m, 높이 4m, 너비 3~4m의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사진>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의 탐방 데크에서 바라본 해넘이.
오늘날의 낙안읍성은 축조된 지 40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옛 모습 그대로 튼실하고 웅장하다. 총 22만3108㎡(약 6만7400평)의 면적에 관아 94채, 민가 218채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고풍스러운 성문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순식간에 수백 년을 거슬러 조선시대의 어느 고을에 들어선 듯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올망졸망한 초가와 권위적인 관아 건물, 돌담 따라 이어지는 고샅길, 대나무와 싸리나무로 엮은 바자울과 사립문, 집안 뒤뜰의 손바닥만 한 남새밭…. 이미 오래전에 밀려 자취를 감춘 옛 고향의 풍경과 정취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더욱이 이곳은 여느 민속마을과는 달리, 120가구 280여 명의 주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고 있어서 사람들의 온정과 체취가 묻어난다.
멀리 순천 땅을 밟은 김에 순천만 갈대밭도 빼놓을 수가 없다. 순천만 갈대밭은 전남 순천시 교량동과 대대동, 그리고 해룡면의 중흥리, 해창리, 선학리 등에 걸쳐 형성돼 있다. 순천 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순천시 상사면에서 흘러온 이사천의 합수지점부터 하구에 이르는 3㎞가량의 물길 양쪽이 죄다 갈대밭이다.
순천만 갈대밭은 안개 자욱한 새벽녘부터 해뜰 무렵, 그리고 하늘과 억새밭의 빛깔이 시시때때로 변하는 해질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 순천만의 일출 포인트는 순천시 별량면의 화포마을, 일몰 명소는 해룡면 선학마을의 나지막한 야산인 용산이다. 나무 데크 산책로를 따라 용산 전망대에 올라서면, S자로 구불거리는 수로와 갯벌 한가운데에 원반처럼 놓인 신생 갈대밭이 한눈에 들어온다. 살랑거리는 봄바람 속에서 해넘이와 저녁놀을 연신 카메라에 쓸어 담는 사진가들의 열정이 붉은 서쪽하늘만큼이나 뜨거워 보인다.
TIP
숙박
선암사 옆에는 순천시에서 운영하는 순천전통야생차체험관(061-749-4202)이 있다. 낮에는 다도 체험, 밤에는 전통민박 체험이 가능하다. 은행나무집(061-754-3032), 고향집(***), 민속민박(***) 등과 같은 낙안읍성 민속마을 내의 초가 민박집도 운치 있다. 순천만 자연생태관 근처에는 무진게스트하우스(061-746-6677), 한옥펜션샘터(061-722-8958), 순천만빌리지펜션(061-746-6677), 순천만쉼표펜션(***) 등의 숙박업소가 있다. 순천시에서 운영하는 순천만에코촌유스호스텔(061-722-0800)도 권할 만하다. 해룡면 상내리의 순천만에코비치펜션(061-725-3355), 놀펜션(061-723-0150)에서는 객실에서도 순천만 일몰과 낙조를 감상할 수 있다.
맛집
선암사 초입의 진일기사식당(김치찌개백반, 061-754-5320)은 양과 질이 두루 만족스러운 기사식당이다. 선암사 상가지구의 장원식당(산채정식, 061-754-6362)과 낙안읍성 동문 밖의 선비촌(한정식, 061-754-2525)도 권할 만하다. 순천만 자연생태관 부근에는 보리밭사이길(보리밥 정식, 061-741-3157), 강변장어집(민물장어구이, 061-742-4233), 대대선창집(민물장어구이, 061-741-3157), 우리밀해물칼국수(061-741-1465) 등이 맛집으로 꼽을 만하다. 순천 시내의 일품매우(한우갈비, 061-724-5455), 다심정가(한정식, 061-744-5009) 등도 순천을 대표하는 맛집 중 하나다.
가는 길
순천완주고속도로 → 승주IC → 선암사 → 낙안읍성 민속마을 → 순천만 자연생태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