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의 뮌헨협정은 없다
지난 10월 21~22일 말레이시아에서 민간 차원(Track 2)의 미·북 간 비공개 접촉이 있었다.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대사, 조셉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 등 미국 측 참여인사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접촉에서 북한은 핵 동결을 거론하며 미·북 간 직접대화와 평화협정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접하며 북한의 만성적인 ‘평화협정 집착증’을 재확인하게 된다.
1953년 7월 23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래 북한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는 집요하게 계속되고 있다. 비근하게 올해 제7차 당대회 기간에도 김정은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고 연방제 방식의 통일을 실천해야 한다며 ‘평화협정 체결→미군 철수→연방제 통일’로 연결되는 북한식 통일공식을 재차 주창한 바 있다. 비록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해온 주장이지만 북핵 위기 시대의 엄중함은 이를 진부한 수사로만 여길 수 없게 한다.
평화협정은 현재적이고 잠재적인 전쟁 상태를 종결하고 평화 회복과 현상 유지를 약속하는 국가 간 공식 약속이다. 역사를 보면 강화조약, 불가침협정, 평화회의, 부전조약 등 다양한 형태로 양자·다자 간 평화협정이 체결돼왔으나 이 협약들이 실효적으로 ‘지속 가능한 평화’를 보장해주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평화협정의 성공 여부는 당사국들이 현상 타파를 원하느냐, 현상 유지를 바라느냐 하는 성향과 군사적 균형 상태에 의해 결정돼왔음을 역사는 보여준다.
지속 가능했던 성공적 평화협정은, 당사자 대부분이 현상 유지를 선호하거나, 현상 유지를 원하는 세력이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에 가능했다. 전자의 대표적 예가 17세기 베스트팔렌조약 체계이다. 30년간 전 유럽을 도살장으로 만든 종교전쟁에서 생존한 구교·신교 세력들은 전쟁 상태를 종식하기로 맹세했다. 전쟁의 참화에 지친 조약 당사자들은 현상 유지 세력으로 기능하며 현상 변경 세력의 흥기를 효과적으로 억제했다.
후자의 대표는 나폴레옹 전쟁 후 전전(戰前) 상태로의 복귀와 평화 유지를 의결한 1814년 비엔나회의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들 수 있다. 냉전기간은 긴 평화(Long Peace)의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의 평화는 초반에 파열음을 내던 얄타체제가 상호 확증파괴능력 확립에 따른 미·소 간 ‘공포의 균형’과 흐루시초프 집권 이래 진행된 구소련의 현상 유지 세력화로 안정을 찾게 된 것이 근간이 됐다.
반면 현상 타파를 원하는 세력 간에 맺은 평화협정, 혹은 갈등 상태가 실질적으로 종료되지 않은 상황에서 맺은 평화협정은 수명이 길지 못했다. 전자의 대표로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과 1941년 일·소 중립조약 등을 들 수 있다.
후자의 예로는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은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이 두려워 나치독일의 체코 영토 합병을 승인함으로써 또 다른 전쟁의 원인이 된 1938년의 뮌헨협정, 체결 2년 만에 공산화를 초래한 1973년 베트남 평화협정, 현상 타파 세력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해 2차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한 1919년 베르사유조약 등이 있다. 현상 타파 세력은 작은 ‘기회의 창’이 열려도 조약을 깨는 데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6·25전쟁 정전협정 이래 무수한 도발을 자행해왔고, 급기야 핵무장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균형을 깨뜨리기 위해 전력하고 있는 북한을 현상 유지 세력으로 볼 수는 없다. 북한은 평화협정을 현상을 변경하는 하나의 수단이나 단계로 활용하려고 할 공산이 크다.
북한은 대북 피로증후군에 시달리는 미국과 안보 위기에 직면한 한국을 대상으로, 오른손으로는 핵무력을 움켜진 채 한반도를 인질로 삼아 위기를 극단으로 몰아가고, 왼손으로는 평화협정과 연방제 통일을 들고 강매에 나서는 모순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북한이 내놓은 거짓된 평화의 유혹이 종국엔 파국을 초래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을 냉철히 인식해야 한다. 갈등을 안고 있음에도 불안한 평화를 선택했다가 전쟁의 단초를 제공한 뮌헨협정의 비극이 한반도에 재연돼선 안 되기 때문이다.
김진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 박사. 통일연구원 기획조정실장·국제전략연구실장, 통일준비위원회 정책보좌관, 국제정치학회 연구이사 등 역임. 현재 민주평통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