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호 > 포럼
포럼
한반도 통일과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한 영국의 관심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250석 넘는 청중석은 시작 한참 전에 만석을 이뤘다. 청중의 절반 이상이 영국 측 인사였다.
호텔 로비에는 정장 차림의 영국 신사 숙녀와 이들을 맞는 교민들로 북적였다.
마치 흥행에 성공한 잘 기획된 영화제를 보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영종 중앙일보 외교안보팀장
지난 11월 19일 런던 시내 밀레니엄글로스터 호텔. 2013년 한영 평화통일 포럼이 열렸다. ‘한반도 평화통일과 북한의 인권’이란 주제로 개최된 행사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주최하고 민주평통 영국협의회가 주관했다. 한영 수교 130주년을 맞아 열린 데다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적인 영국 방문 직후 마련됐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행사는 우선 그 형식 면에서 눈길을 끌었다. 한영 간 민간 차원의 포럼으로 추진됐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측에서는 리처드 모리스 외무부 태평양국장이 참석해 축사를 했다. 또 데이비드 올튼 영국 상원의원과 주한 영국대사 출신인 워릭 모리스 영한협회 회장도 참석했다. 특히 올튼 의원은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한 토론까지 맡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초대 북한 주재 대리대사를 지내 우리에게도 이름이 낯설지 않은 제임스 호어 런던대 선임연구원도 자리했다.
한국 측 참석 인사들도 비중 있는 진용을 선보였다. 박찬봉 민주평통 사무처장과 신우승 평통 영국협의회장이 공동 호스트 자격으로 손님들을 맞았고, 임성남 주영 대사는 환영사를 했다. 외교부에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맡아 북핵 외교를 담당했던 임 대사는 영국의 북한·한반도 전문가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북핵·인권 문제 등 북한 관련 사안 논의
서울에서 발제와 토론을 위해 긴 여정을 한 교수와 전문가들도 그 어느 때보다 주제에 정통하고 전문성을 갖춘 인물들로 짜였다는 평가가 행사장 안팎에서 나왔다. 국제인권대사를 맡은 이정훈 연세대 교수와 김재천 서강대 교수, 박인휘 이화여대 교수, 홍성필 연대교수, 조정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등이다. 스웨덴에서 안식년 체류 중인 조윤영 중앙대 교수는 행사 참석을 위해 날아왔다. 행사 관계자는 “영국 측 인사들의 경우 대개 3, 4개월 전 일정이 짜진다”며 “신우승 평통 영국협의회장이 올튼 상원의원 등 영국 측의 비중 있는 인사를 초빙하기 위해 수개월 전부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성사시켰다”고 귀띔했다.
박찬봉 사무처장은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이슈는 크게 두 가지”라며 핵 개발과 인권 문제 등 북한 관련 사안과 통일을 목표로 하는 남북관계의 개선을 꼽았다. 박 처장은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신뢰 구축을 통해 한반도 문제를 풀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대북·통일정책의 기본구상”이라고 강조했다. 또 “박근혜정부는 2018년 임기까지 추진할 정부 시책의 하나로 ‘한반도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밝힌 바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은 북한이 상호 신뢰에 기초해 북한 문제 해결과 평화통일 추진에서 한국과 협력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폐쇄국가는 국제사회의 평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주민 불만도 강압적으로 쉽게 제어한다”며 한국 정부가 북한을 상대하는 데 영국이 긴밀히 협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신우승 영국협의회장은 개회사에서 “이번 포럼에서 신뢰 구축 프로세스의 성공적 이행을 위한 한영 협력의 역할과 북한 인권 상황의 지속적인 개선을 위한 올바른 전략의 평가 및 대안 모색 등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매우 흥미롭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게 된 데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성남 대사는 환영사에서 “영국은 한국전에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한 국가임에도 수도 런던에 참전기념비가 없었는데, 박 대통령의 이번 국빈 방문을 계기로 테임스강변 국방부 옆 부지에 기념비 건립을 위한 첫 삽을 뜨는 행사를 가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피터 바틈리 한영의원친선협회 사무총장은 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전쟁 당시 희생당한 8만2000여 명의 영국 군인들을 기억하며 양국관계를 높이 평가했다”며 “한국은 상식에 기반을 둔 자유와 민주주의의 선두주자로서 인내를 갖고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는 데 영국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탈북자 사살 등 북한 인권에 특히 관심
한반도 평화통일과 북한 인권을 주제로 한 포럼은 자칫 딱딱하거나 지루해질 수 있는 주제였다. 하지만 참석자들의 위트와 순발력으로 행사는 진지하면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진행됐다.
싱가포르에서 북한 외화벌이 사업을 하다 10년 전 한국에 온 김광진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은 생생한 체험과 깊이 있는 분석으로 참석자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2세션 ‘북한의 인권 실상과 개선방안’에서 토론에 나선 그는 “북한에서 셰익스피어는 물론 첩보영화 007의 제임스 본드도 잘 알고 있었다”고 말해 청중들의 귀를 쫑긋하게 했다. 김 위원이 유창한 영어로 말을 이어가자 청중의 탄성이 쏟아졌다. 김일성대 출신인 그의 영어토론이 뜻밖이란 표정이었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북한의 국제행사 통역을 위해 영어 실무를 배웠다고 한다.
김 위원은 북한이 봉착한 문제와 관련해 “최고지도자의 일관성(Consistency) 결여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에 평양에서 벌어진 일화를 소개했다. 회의에서 졸고 있는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유를 묻자 싱가포르에 나가 있는 딸과 사위 대신에 손녀를 돌보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강 부상은 답했다.
외교관 탈북 망명을 우려해 자녀를 평양에 두고 가도록 한 제도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정일은 자신이 문건에 서명한 것도 잊은 채 “그런 제도는 문제”라고 관계자를 질타했다고 한다. 김 위원의 유머러스한 이야기 전개에 연신 웃음을 보이던 참석자들은 북한 당국의 탈북자 사살 명령 등 참담한 인권 실태 증언에 곧 숙연해졌다.
이날 행사는 북한 인권이 화두였다. 토론자인 데이비드 올튼 상원의원은 탈북자 실태 보고서에 눈물을 흘린 유엔 북한인권조사위(COI) 마이클 커비 위원장의 사연을 소개한 뒤 “북한 정권이 구체적 증거들을 외면하는 건 반인도적 범죄로 기소되는 길을 닦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정훈 인권대사는 “북한 당국의 지속적인 주민 인권 침해는 핵, 미사일과 함께 가장 우려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대사는 지난 3월 출범한 COI의 방북조사 등을 거부한 김정은 정권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는 방안도 추진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특히 이 대사는 포럼 기간 호텔 로비 등에서 영국 측 민간 변호사들과 만나 COI 제소를 위한 법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영국 외무부 관리들과 접촉을 갖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북한에 정확한 정보 전달할 정책 필요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딘버러대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조정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토론을 시작하면서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껄끄러운 관계를 떠올린 듯 “적국에서 왔다”고 말해 참석자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조 위원은 “무력충돌이 아닌 평시상황의 인권 침해에 유엔이 이례적으로 COI를 만든 건 북한 인권의 심각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 부차관보를 지낸 마크 피츠패트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핵·군축팀장은 기조발제에서 “김정은이 직면한 가장 큰 위기는 내부로 유입되는 정보를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라며 대북전단 등 정확한 정보를 전달할 확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북한 변화에 기여한 국가들에게 북한 주민들은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성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 후 북한이 핵 개발에 더욱 집착한 점을 들어 “불행히도 북한 정권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사람들로부터 어긋난 교훈을 배웠고 악마의 전략을 체득했다”고 비판했다.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도 논의가 집중됐다. 스티븐 브라운 전 주한 영국대사는 ‘전쟁이 시작되면 작전계획은 무용지물이 된다’는 독일군 야전사령관 폰 몰트케의 말을 인용한 뒤 “지도자는 무엇보다 현실적이어야 하고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포럼이 성공적으로 끝난 이튿날에는 의미 있는 자리가 런던 한인 밀집 거주지인 킹스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마련됐다. 박찬봉 민주평통 사무처장과 이정훈 인권대사 등이 영국에 정착한 탈북인 단체 대표들과 만난 것이다. 북한군 출신인 김주일 재유럽조선인총연합회 사무총장 등 4명의 탈북인 대표는 “정부 관계자들이 우리를 찾아온 건 처음”이라며 반가워했다. 오찬을 하며 2시간 넘게 이뤄진 만남에는 해외 체류 탈북자 문제와 관련한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유럽 지역에 1200여 명의 탈북 망명자들이 정착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김 사무총장의 설명이었다.
북한 인권 문제에 공감대 형성
이들 탈북인 대표들은 영국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에 쏟는 각별한 관심을 전했다. 지난 3월 말 최태복 북한 최고인민회의(우리의 국회) 의장의 영국 방문 때는 놀라운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최 의장 일행과 영국 측이 만나는 자리에 영국 정부 측에서 탈북인 대표를 참석시키도록 결정한 것이다. 탈북인들이 회담장에 들어서자 자성남 당시 북한대사가 회의장을 뛰쳐나가고, 최태복은 “우린 공화국 배신자 얘기를 듣고 싶지 않다”고 항의했지만 영국 측 인사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결국 옥수수 몇 톤을 얻어가기 위해 북한은 영국의 인권 훈수를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청취한 박찬봉 사무처장은 “본국으로 돌아가 여러분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16기 민주평통이 적극적으로 추진 중인 법률자문지원단을 영국 등 해외 체류 탈북자들의 법률적인 문제를 돕는 데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그중 하나다. 신우승 영국협의회장은 “현지에서 우리 민주평통 조직과 교민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영국은 벌써부터 ‘마그나카르타(Magna Carta)’ 발표 800주년을 맞는 2015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왕의 전횡에 대항해 국민의 권리옹호를 명시한 대헌장의 의미를 드높이는 활동에 역점이 두어진다고 한다. 북한 인권 문제도 그중 하나라는 게 영국 측 인사들의 귀띔이었다. 적절한 시점에 성공적으로 기획된 한영 평화통일포럼은 의미 있는 논의와 공감대 형성이란 성과와 함께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진전이란 과제를 우리에게 남긴 뜻깊은 행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