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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vol 120 | 2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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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의 퍼싱 배치와 한국의 사드 배치

‘거짓 평화투쟁’에 속지 말라
공산주의자들은 원인과 결과를 바꿔놓는다

데탕트 이후 유럽에서 신냉전을 일으켰던 구소련의 SS-20과 미국의 퍼싱 중거리미사일(작은 사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SS-20을 동독에 먼저 배치한 것은 지우고 미국이 퍼싱을 서독에 배치해 평화가 흔들렸다고 거짓 주장했다.데탕트 이후 유럽에서 신냉전을 일으켰던 구소련의 SS-20과 미국의 퍼싱 중거리미사일(작은 사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SS-20을 동독에 먼저 배치한 것은 지우고 미국이 퍼싱을 서독에 배치해 평화가 흔들렸다고 거짓 주장했다.

독일 통일 전 구소련은 동독에 SS-20 미사일을 먼저 배치했다. 그에 대해 서독이 미국의 퍼싱 미사일을 배치하자 공산주의자들은 전쟁 공포심을 퍼뜨리며 퍼싱을 철수시키기 위한 평화투쟁을 벌였다. 본말을 전도시킨 것이다.


대한민국과 미국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양국은 북한의 지속적인 미사일 발사 실험과 핵무기 개발에 대한 대응책으로 이 결정을 하게 된 것이다.

방어적 요격미사일은 한국의 군사·안보적 빈틈을 메워줄 것이다. 이 미사일이 없다면 갈등이 첨예화될 경우, 한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공격에 무방비로 당해야 하는 위험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위협하기만 해도 한국은 어쩔 수 없이 북한의 협박 요구에 응하든지 아니면 또다시 전쟁으로 빚어질 폐허를 감수하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북한 정권은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에 반발하고 있다. 평양은 그러한 방어미사일의 배치가 역내 불안정을 야기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북한의 공격적인 미사일 개발로 한국이 어쩔 수 없이 사드 배치를 결정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공산주의의 정치선전 패턴은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갈등 고조의 원인을 항상 적에게 돌린다. 이번 경우에도 남쪽에 책임을 지우고 있다. 북한은 북한 내부적으로 남북한 관계를 설명할 때 실질적 안보 상황을 왜곡한다. 북한은 한반도 지역의 불안을 야기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원인이 북한 정권의 핵무장이 아니라 한국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드가 지역 불안을 조장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북측이 노리는 안보정책적 노림수가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다. 미국의 요격미사일이 한국에 배치된다면, 북한의 미사일 무장이 갖는 전략적 의미는 감소되기 때문이다. 북한이 한국에 정치적 양보를 강제하기 위해 미사일 공격을 단행하겠다고 위협해도 한국은 더 이상 무방비 상태로 당하지 않는다. 사드 배치는 북한 정권이 군사적 위협으로 한반도 평화를 어지럽히려는 정책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남중국해 도서 영유권을 둘러싼 미·중 간의 긴장을 고려하면, 중국의 북한 두둔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한반도 상황을 냉전기 유럽에서의 서방권 대 구소련 간의 분쟁관계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1975년에서 1986년 사이에 유럽에서는 중거리미사일 배치에 대한 갈등이 있었다. 당시 동·서독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WTO)에 속해 있었다. 양 독일은 미사일 배치 분쟁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편에도, 소련의 편에도 서지 않았다. 이 문제로 전쟁이 발발하면 분단 독일은 전쟁의 한복판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와 워싱턴은 핵무기를 동원할 수 있었다.

원인과 결과를 바꿔놓는 선동

위기는 1975년과 1976년 구소련이 유럽을 향해 동독에 SS-20 중거리 핵탄도미사일(사거리 4500km)을 배치하면서 시작됐다. SS-20 중거리미사일은 유럽과 아시아는 공격할 수 있으나, 미국을 위협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미국이 유럽 안보 문제로부터 분리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1949년부터 구소련이 고대하던 바였다.

SS-20 배치는 대대적인 정치선전을 수반했다. 미국이 구소련에 대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비난 등이었다. 이 선전은 서유럽에서도 효과를 나타냈다. 나토의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이 확산된 것이다. 철의 장막을 맞댄 동서독 양 진영이 미사일 배치 문제로 유럽에서 제한 핵전쟁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서독은 NATO에 군사전략적 대응을 촉구했고 그 결과 1979년 나토는 2단계 계획을 결의했다. 첫째는 미국과 구소련 간 협상으로 소련의 선제공격 무기인 중거리미사일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군축협상이 무산된다면 나토는 서유럽에 미국의 중거리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는 1979년 서구의 맞대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1983년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미국의 퍼싱(Pershing) 미사일을 서독에 배치하는 방안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퍼싱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대중운동(평화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구소련의 선(先)무장이라는 원인과 미국의 미사일 배치라는 결과를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독의 세칭 ‘평화전사’들은 구소련의 SS-20 미사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미국이 전쟁을 원하고 있다는 주장만 반복했다. 미국의 중거리미사일은 구소련을 제압하기 위한 선제공격 무기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영향 받은 ‘평화공세’는 대중들에게 ‘핵전쟁으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조장했다. 그들의 구호 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 모두는 핵으로 인한 죽음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었다.

방어용 요격미사일을 배치하려는 한국과 달리 1983년 서독에는 모스크바까지 도달 가능한 미국의 중거리미사일이 배치됐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는 1985년 구소련의 대통령이 됐던 미하엘 고르바초프에게 ‘전략 핵무기와 중거리미사일의 철수를 결정한 동기’를 질문한 바 있다.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근교의 요격미사일 배치 기지를 방문해 기지사령관으로부터 “전시 상황이면 독일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이 경고시간 없이 바로 모스크바로 날아올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서구 진영과 구소련이 함께 핵 지옥이 돼 멸망할 수 있는 위험스러운 게임을 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1987년 이런 죽음의 게임을 멈춘 것은 고르바초프 구소련 대통령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공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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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프레드 빌케 전 베를린자유대교수
1941년 독일 카셀 출생.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 교수 자격 취득, 베를린경영대 사회학 교수, 뮌헨현대사연구소장 역임. 현재 그라츠 루드비히 볼츠만 전쟁결과연구소 연구위원(현대역사학자). 평론가로도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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