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25 합의 이후 한반도의 1년
북 핵·미사일에 일치된 자세 필요 남북관계 위기 속에서 기회 찾아야
8·25 합의로 이산가족 만남이 있은 뒤 남북대화의 문이 닫혀버렸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이 이어지면서 한반도는 엄중한 상황에 빠져있다. 그렇게 대립하고 있기에 통일의 가능성은 상존하는 역설을 발견한다.
북한의 도발적 행태로 촉발된 남북관계 긴장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1월 초 4차 핵실험을 감행한 김정은 체제는 국제사회의 우려와 제재조치에도 불구하고 핵 개발과 미사일 시험 발사에 집요하게 매달리고 있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전면에 나서 핵탄두를 공개한 것은 물론, 미사일 발사장에 직접 나가 참관하고 조속한 개발을 재촉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이런 호전적 행보는 불과 1년 전 남북 간에 타결된 8·25 합의 때와는 큰 차이가 난다. 김정은의 위임
을 받은 최측근 군부 인사가 남북 간 공식 회담을 통해 관계 개선을 약속했지만 얼마 못 가 손바닥 뒤집듯 위반한 것이다. 심지어 도발 국면을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주도하고 있는 모양새까지 드러내고 있다.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의 속셈과 김정은 체제의 본색을 들여다보려면 무엇보다 목함지뢰 사태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지난해 8월 25일 새벽 0시 55분 판문점 평화의 집. 상기된 표정의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북한의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이 손을 잡았다. 남북 고위급 접촉에서 팽팽하게 맞서던 이들은 쟁점을 타결하고 6개항의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틀 전인 23일 오후 3시 30분부터 열린 33시간의 마라톤 협상을 마무리하는 순간이었다.
유감이라 해놓고 “괴이한 행동”이라며 부정한 북한
당시 접촉은 북한이 우리 군 장병을 겨냥해 비무장지대(DMZ) 남측 지역에 목함지뢰를 몰래 매설해 우리 병사가 부상한 사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북한의 비열한 행동으로 지난해 8월 4일 김정원·하재헌 당시 하사(중사 진급)가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이런 북한의 호전적 행동에 대응해 우리 군 당국은 우선 대북 심리전 방송 재개에 즉각 착수했다. 그러자 북한은 김정은을 지칭하는 이른바 ‘최고 존엄’을 모욕했다고 주장한 뒤, 우리 지역에 대한 타격 운운하며 ‘준전시 사태’를 선포하는 등 적반하장식으로 나왔다.
긴장 수위를 올리던 북한은 갑작스레 고위급 접촉을 제안하며 전방지역에서의 대북 심리전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 대표단은 남북 간 긴장 상황 조성의 원인이 된 목함지뢰 도발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며 북한이 호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마땅한 출로를 찾지 못한 북한은 회담 테이블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사실상 시인하고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는 8·25 합의로 불리는 6개 항의 고위급 접촉 합의문에도 담겼다. 북한의 사과에 따라 우리 군 당국도 대북 심리전 방송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후 북한의 태도는 미심쩍은 대목이 적지 않았다.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9월 2일 북한 국방위원회는 담화를 내고 목함지뢰 도발이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국방위는 “괴이한 것은 남조선 당국이 우리가 공동보도문에서 표명한 ‘유감’이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건에 대한 우리의 시인이고 사과인 것처럼 여론을 돌리고 있는 것”이라고 발뺌했다.
북한은 그러나 10월 하순 금강산에서 남북한 이산가족 각 100명이 상대 가족을 만나는 상봉 행사를 치르는 데 합의했다. 1년 8개월 만의 이산상봉 재개에 남북관계 복원에 대한 기대감이 쏠렸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북한은 남북관계 복원을 위한 당국대화나 교류협력에 호응해오지 않았다.
8·25 합의의 후속조치로 새해 남북한 사이에 유화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라던 기대도 물거품이 됐다. 새해 벽두 북한이 핵실험에 들어가면서 모든 걸 삼켜버렸다. 1월 1일 육성 신년사에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대화를 강조했던 김정은이 불과 며칠 만에 이를 뒤집은 것이다. 최고지도자의 언급마저 헌신짝처럼 집어던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현재의 남북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한 상황이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위협의 수위를 최고조로 올리면서 위장 대화 공세를 퍼붓는 이중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관영 매체들은 김정은이 한반도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는 미사일 발사 훈련을 참관한 사실을 사진과 함께 수시로 공개한다.
부산 지역의 항만과 공항시설을 겨냥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치고 있는 것이다. 또 대남기구들을 총동원해 민간단체까지 참여하는 ‘민족대회합’을 열자고 주장해왔다. 일부 친북단체들을 동원한 화전(和戰) 양면 전략을 구사해 우리 체제 내부를 분열시키고 우리 정부의 대북 원칙을 뒤흔들어보자는 속셈이 깔린 움직임이라 평가할 수 있다.
분단이 돼 있는 한 통일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지금의 남북 대치를 두려워하지 말고 통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대도약을 이루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다시 엄중해진 남북 상황
북한은 자신들의 거듭된 대화 공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와 여론의 반응이 싸늘하자 다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위협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형국이다. 북한의 핵 도발 겁박은 과거와 다른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다. 핵무기 대남 선제 타격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며 “적들의 머리에 핵 뇌성을 터칠 것”이란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그동안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 일부 지도층을 포함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일리가 있다”는 식으로 감싸는 태도를 보여왔다. 또 사패산 터널이나 제주 민군 복합항 건설에는 환경 파괴 등을 이유로 극렬하게 반대하던 환경단체 등이 북한의 핵실험에는 유독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벌어졌다. 북한 핵이 민족의 재앙을 가져올 위험성 등을 고려해볼 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북한 핵 문제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쳐다볼 수 없게 됐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몇 가지 짚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첫째는 정부와 국민이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해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일치된 자세를 보이는게 중요하다. 우리 아들·딸과 미래세대의 삶을 위해 한반도에서 핵 도발과 미사일 발사로 초래될 재앙은 없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필요한 것이다.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남한 배치를 둘러싼 논란을 하루빨리 봉합하고 북한의 핵·미사일을 효율적으로 막아내기 위한 방안에 모두가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얘기다.
대담론보다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실행하는 게 필요하다. 그동안의 통일 논의나 준비는 지나치게 총론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남북통일 과정에서 맞닥뜨릴 여러 문제에 대한 연구나 해법은 미흡했다. 이젠 통일을 위해서는 정말 꼼꼼한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게 할 국민공감형 로드맵이 요구된다.
셋째, 구호나 말보다는 행동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야 한다. 중·장기적인 구상이나 대책 없이 일회성 이벤트나 캠페인에 머무는 통일 준비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그야말로 손에 잡히는 통일 준비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민주평통이 벌이고 있는 북핵 반대를 위한 자문위원 릴레이 시위 등은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북핵 재앙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넷째, 통일 미래세대라 할 수 있는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통일교육과 다양한 관련 체험 활동을 적극 마련하는 게 요구된다. 이와 함께 세대 간 통일 인식의 격차를 줄여나가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통일 문제와 관련한 세대 간의 이념과 가치관 격차를 줄여나가고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통일은 대도약을 위한 블루오션일 수 있다
물론 꼬일 대로 꼬인 현재의 남북관계를 보면 통일의 길이 암담하게 느껴질 때가 적지 않다. 핵을 거머쥔 채 한반도의 평화와 우리 민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북한 김정은 체제의 행태를 보면 과연 통일의 길이 열릴 수 있을까 하는 절망감이 들 수도 있다. 자칫 분단이 고착화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통일은 반드시 이뤄야 할 민족의 염원이자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는 목표다. 우리 경제와 기업이 새로운 도약을 꿈꿀 수 있는 기회이자 블루오션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분단으로 떠안은 유·무형의 사회경제적 비용 부담을 해소하고, 분단 유지에 투입해야 했던 돈과 사람을 경제로 돌리는 과정일 수도 있다. 제주에서 백두산 삼지연을 잇는 국내선 항공노선이 생겨 통일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여름에는 삼지연의 자연휴양림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제주에서 휴가를 즐기는 날이 올 수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초코파이와 라면 같은 식품이 2400만 북한 주민을 새로운 시장 고객으로 맞고, 스타킹과 일회용 생리대, 콘돔 등이 불티나게 팔리는 때가 온다면 어떨까.
동서독 시기 분단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門)을 두고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은 “브란덴부르크의 문이 닫혀 있는 한 통일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고 설파했다. 통일을 향한 이런 집념이 독일 통일을 일궈낸 것이다. 준비된 통일은 축복이지만 준비 없이 맞는 건 재앙일 수 있다. 남북관계의 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과 기회를 찾아야 한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