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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시대

vol 118 | 20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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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공태 일본부의장

“2~3세대에 제대로된 통일·역사교육
가르칠 교육시설 필요해”

뿌리를 지키기 위해 자녀를 보낸 학교에서 자녀들이 6·25는 북침, 천안함 사건은 남측의 자작극이라고 배우고 있는 현실을 무너뜨려야 한다. 한국학교를 늘리는 것이 시급하다.뿌리를 지키기 위해 자녀를 보낸 학교에서 자녀들이 6·25는 북침, 천안함 사건은 남측의 자작극이라고 배우고 있는 현실을 무너뜨려야 한다. 한국학교를 늘리는 것이 시급하다.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에 취임하고 해외 5개 지역 부의장님을 뵈었는데, 유일하게 오공태 일본부의장님에게만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제일 가까운 곳에 계시는데도 그러지 못해 어쩐 일인가 했었는데, 그간 서툴던 한국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4월에 뵈었는데 한국말을 너무 잘하셔서 감탄했습니다. 오늘 연설하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한국말을 능수능란하게 하시는지, 새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공태 일본부의장은 지난 6월 유호열 수석부의장이 제17기 일본·중국·캐나다·남미 해외지역회의 개회사를 통해 공로를 치하할 만큼 왕성한 통일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광복 전 일본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일제강점기의 고통보다 광복 이후 재일동포들이 당해야 했던 차별과 설움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어린 시절엔 나를 왜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했나 하며 부모님 원망을 많이 했다”고 고백할 만큼.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난 것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였다. 일본인 아이들이 “조센징, 조센징” 하며 놀려대고 괴롭힐 때마다 그를 지켜주고 도와주던 조총련계 동급생이었다. 분단의 고통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하던 그에게 그 친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2학년이 되던 해 일본 정부와 북 한 간의 협약으로 조총련계 사람들이 북송선을 타고 대거 북한으로 이주해가면서 그는 다시 외로움에 빠져들어야 했다.

그랬던 그에게 ‘한국인으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사건이 발생했다. 대학 입학 때 대학당국이 ‘본명을 사용하지 않으면 입학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통보를 해온 것이다. 그제야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던 한국 이름을 꺼내보는 커밍아웃 아닌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이다. 입학 후 그는 한국인임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다.

그때 일본 대학가의 학생운동이 대단했다. 1965년 한일협정을 정점으로 한일관계는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도 뜨거운 이슈가 된 것이다. 재일동포들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조총련계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계의 대립을 틈타 수많은 조직들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한일협정 이전까지만 해도 조총련계의 위상은 상당했다. 일본 내 사회주의 운동이 활기를 띠었기에 수적으로는 조총련계가 월등했다. 1946년 조직된 민단은 전체 재일동포 60만 명중 5만 명에 불과했다.

1959년부터 북한은 조총련계 북송사업을 전개해나갔다. 9만 명이 넘는 조총련계 사람들이 북한으로 갔음에도 민단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반전을 가져온 것은 재일동포들에게 영주권을 주기로 한 한일협정의 ‘영주권’ 조항이었다. 영주권을 받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민단, 받지 못한 사람들은 조총련계로 남게 되면서 동포사회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창단 이래 처음으로 민단은 조총련계와 비슷한 세력과 규모를 가지게 되었다.

한일협정 51년, 광복 71주년을 맞이한 2016년 재일동포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조총련계는 한없이 추락하고 민단의 위상은 높아졌다. 여기에는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국력 차이도 큰 역할을 했다.

“잘 모르는 이들은 그래도 조총련계와 함께할 수 있지 않느냐, 왜 그들과 손을 잡지 않느냐고 이야기합니다. 일본 사회에서 조총련은 범죄집단 수준으로 취급받고 있는데, 그들과 같이하면 우리도 같은 사람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요.”

오 부의장의 의견은 단호했다.
“민주평통 활동을 하다 보면 ‘통일은 곧 온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자주 뵙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살다 보면 정말 통일이 오기는 오는 걸까 하는 의문에 휩싸입니다. 조총련 사람들을 보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일동포 밀집지역에 가보면 문 하나를 두고 왼쪽은 조총련, 오른쪽은 민단 측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옆집 문을 열면 김정은 사진이 떡하니 보이는 그런 동네에서 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은 우리가 더 크고 원대합니다.”

재외국민 위한 교육 시스템이 부족하다

그는 일본 내 통일 활동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교육이라고 말했다. 일본에 세워진 민단계 한국학교는 단 4곳. 학생 수는 3000여 명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동포 2, 3세들은 일본 학교나 조총련계 학교에 다니고 있다. 일찌감치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려 학교를 세우고 활발히 교육 활동을 한 조총련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재외동포 교육 시스템은 걸음마 수준이라고 했다. 실제로 조총련계인 조선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70~80%가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2, 3세들이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을 찾다 보니 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조총련계에는 학습조라는 것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게 하는 교육 시스템이죠. ‘6·25전쟁은 남조선의 북침, 천안함은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 곳에서 우리 동포 2, 3세들이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와 자존감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2, 3세들에게 제대로 된 통일교육과 역사교육, 민주주의 이념을 가르칠 학교가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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