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정유재란
한 명의 의병도 일어나지 않은
420년 전의 비극을 잊었는가
임진왜란을 당했음에도 당쟁에 빠져 ‘다시 오는 전쟁’을 외면한 선조를 기억하라.
다시 하는 전쟁에서 왜는 명나라가 아닌 조선 짓밟기에 치중했다.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우고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4일, 20여만 명의 대군을 부산포에 상륙시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은 무방비 상태였기에 전투다운 전투는 거의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왜군은 바람처럼 북상해 한 달 만에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평양도 함락시켰다.
그리고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를 유린해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국토는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왜군에게 남은 과제는 선조의 항복문서를 받는 것이었다. 기고만장한 도요토미에게 뜻밖의 복병이 나타났다.
첫째는 이순신이라는 불세출의 명장이고, 둘째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의병들의 활약, 셋째는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에 따른 군량미의 부족이었다.
곧 잡힐 것 같았던 선조는 의주에 꼭꼭 숨어버렸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이 압록강을 건너오면서 전쟁은 그의 의도와 달리 장기전으로 변해버렸다. 전쟁의 확대를 원치 않는 명나라는 화의를 통해 왜적들이 명나라 땅을 밟는 일을 막으려 했다. 명나라는 심유경을 내세워 협상을 벌였으나 도요토미는 터무니없는 7가지 조건을 내걸었고 화의는 결렬됐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조·명(朝明)연합군은 평양을 탈환하며 서서히 왜군을 남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후퇴하는 왜군에게 일격을 가한 장수는 권율이었다. 권율이 이끈 행주성 전투에서 대패한 왜군은 서둘러 남하해, 부산진 일대에 소규모 부대만 남겨놓고 본대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이러한 후퇴를 할 때 왜군은 종묘를 불태우는 등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다.
1596년 조·명 연합군이 부산진을 공격해 남아 있는 왜군을 섬멸하거나 바다로 쫓아냈다면 전쟁은 4년 만에 종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도요토미의 야망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조선은 ‘이몽학의 난’을 맞는 등 내우외환에 빠져버렸다. 선조가 영민한 통치자였고, 조정 대신들이 4년의 전쟁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다면 철저한 대비를 했을 것이련만, 국정은 계속 혼란스럽기만 했다.
예측 불가능한 ‘정유년(丁酉年)’이기에
해를 넘긴 1597년 1월, 고니시 유키나가가 1만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산진에 상륙함으로써 두 번째 전쟁, 즉 정유재란이 벌어졌다. 2차 전쟁에 동원된 왜군은 12만 명이었다.
그로부터 42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정유년을 맞고 있다. 전 세계 많은 이들의 예측을 뒤엎고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는 그의 행보와 말 한마디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불법체류자를 모두 추방하겠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겠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폐지 혹은 재협상하겠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방위비 분담금을 올리겠다 등 기상천외한 공약을 내걸었음에도 미국인들은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국인들은 그것이 자국에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뉴욕에 들러 트럼프 당선인을 만나 90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주변국 침략에 대해 “침략의 정의는 학계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해 극우의 면모를 보여준 아베였지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발 빠른 행동을 한 것이다. 한국은 그러한 아베를 보면서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트럼프는 일본이 북한의 위협을 물리치려면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주장에 동조해 일본이 핵무장을 한다면 아시아의 평화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 나라만이 대한민국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은 여전히 세계를 먹여 살리면서 위협적인 힘을 넓혀가고 있다. 중국에 상륙해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한류가 새로운 한류를 만들어 각광을 이어갈지, 아니면 혐한의 된서리를 맞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널뛰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 명절에 한국의 백화점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국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왔다. 빈부 격차가 극심한 중국에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90%의 소시민층이 아니라 10%에 달하는 백만장자이다. 1억 명에 이르는 그들이 한국을 찾지 않는다면 우리의 시장 경제는 암울해진다.
가장 변수가 많은 나라는 북한이다. 2011년 12월 김정일의 사망으로 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은은 5년 동안 통치 체제를 굳건히 해왔다. 그의 정적은 사실상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북한 이곳저곳을 시찰하는 그가 가장 마음을 쏟는 곳은 인민군 부대다. 최근 한 달간 9차례나 군 관련 행사에 나섰다는 뉴스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북한 매체들은 날짜를 밝히지 않고 김정은이 ‘인민군항공 및 반항공군 비행 지휘성원들의 전투비행술 경기대회-2016’을 참관해 “침략의 본거지들을 가차 없이 초토화해버리고 남진(南進)하는 인민군 부대들에 진격의 대통로를 열어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러시아는 강력한 푸틴이 풍부한 지하자원을 무기로 버티고 있다. 중동의 거부 나라들은 ‘누가 더 높은 건물을 짓는가’에 혈안이 돼 있는 듯하다. 한때 아시아의 강국이었던 필리핀 두테르테의 강력한 통치술은 비난을 받기는 해도 필리핀 재건에 큰 힘이 될 것임은 자명하다. 대영토를 지닌 브라질,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한 아르헨티나 등 라틴아메리카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다. 예측 불가능의 시기 대한민국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당하고도 모르는 조선의 중신들
예측 불가능한 변화는 늘 상존한다. 이는 420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변화에 대비하는 준비를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 국가와 국민의 운명이 바뀐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선과 명, 왜에서 사망한 사람은 대략 100만 명이 넘는다. 그중 태반이 조선인이었다. 전쟁터였던 조선은 경복궁을 비롯해 수많은 건물과 가옥이 불타고 약탈당했다.
부지기수의 사람들이 왜국으로 끌려갔다. 국토가 황폐화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정유재란을 일으키면서 왜군은 1차 전쟁 때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전라도로 진격해 한때 전주성까지 점령했다. 곡창지대가 적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려 죽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 명나라 협상단이 왜국으로 건너갈 때 명나라는 조선 사신이 동행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의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류성룡만 홀로 “왜국의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도 사신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에는 경중과 대소가 있는 법입니다. 국가의 보존과 멸망이 따르는 일인데 어찌 신하 하나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따라 조선 사신도 왜국으로 건너갔다. 1596년 9월 귀국한 그는 왜가 재침략할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몇이 되지 않았다. 도원수 권율은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했으나 수하 장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마음고생이 컸다. 조정에서는 그러한 장수들을 문책하지 않았기에 군율이 제대로 서지 못했다. 수군을 책임진 이순신만 한시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재침략에 대비했다.
“흉적(兇賊)이 그대로 변경에 있으면서 아직도 틈을 노려 침략할 계책을 품고 있으니 참으로 분개스럽습니다.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진주(進駐)하여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하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이순신은 정유년 1월 1일 치계를 올려 왜군이 ‘침략할 계책을 품고 있음’을 알렸으나, 한 달 뒤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류성룡이 그를 구해내기에는 선조의 마음이 너무 옹졸했다. 그리고 수군의 전권을 쥔 원균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했다. 조선 수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명분은 ‘정명가도’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의 목적은 철저히 조선 땅을 짓밟는 것이었다. 조선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했으며,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오도록 했다. 왜군의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 방화, 강간, 납치는 6년 전쟁의 피해보다 더 컸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 땅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도 정유재란 시기에는 단 한 명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성의 마음이 떠난 탓이다. 그러함에도 선조는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등용해 바다의 패권을 잃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후에 이순신을 재등용하기는 했지만 그 기간에 죽은 병사들과 백성들의 목숨은 아무도 보상해주지 못했다.
‘可勝惜哉(가승석재)’가 아니기를
역사에 ‘만약’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함에도 선조가 1596년 철저한 준비를 하고, 뛰어난 장수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대신들을 기용했더라면
정유재란은 일어났을 것인가? 일찍이 세작(스파이)을 보내 조선 땅을 샅샅이 훑어오도록 한 도요토미였으니, 조선이 치밀한 대책을 세웠다면 2차 침략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심 많고 용렬했던 선조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혜안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쟁에 휘말려들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4년 전에 사망한 정철에 대한 처벌이 ‘가볍다느니, 무겁다느니’ 하면서 갑론을박을 벌였다.
과거 지향적인 국정을 편 것이다.
“이때에 왜적은 변경에 있고 군사와 백성들은 흩어져서 나랏일은 하나도 믿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군사의 지휘를 맡은 신하들이 한마음으로 협력하지 아니하고 이처럼 어긋나 결국 적의 재침(再侵)을 당하였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선조수정실록> 31권, 1597(정유)년 1월 23일의 기록이다. 사관은 ‘애석하기 그지없다’를 ‘可勝惜哉(가승석재)’라 적었는데 이 단어는 정유년을 앞둔 지금 대한민국에 딱 들어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가승희재(可勝喜哉)’를 바라고 싶다. ‘기쁘기 그지없다’를 외치고 싶은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똑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호경 소설 <명량>의 작가
경희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1997년 제21회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 교보문고에서 일했고, 한양여자대학에서 편집론을 가르쳤다. 장편 <낯선 천국>, <명량>, <국제시장>, <남자의 아버지> <설렘>, <가슴 설레는 청춘 킬로만자로에 있다>, <프랑스 컬러링여행> 등을 집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