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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지난 60여 년간 남북한은 전쟁과 불신, 대결의 악순환을 계속해왔다. 1990년대 냉전 종식 이후 한반도에도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남북관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북한은 3대 세습정권하에서 선군정치를 앞세우며 핵무기 보유국임을 기정사실화하려 하고 있다.
신뢰 프로세스는 국제적 신뢰, 국민적 신뢰를 포함한 것
노태우 정부 이후 박근혜정부까지 20여 년간 다섯 정부를 거치면서 대북정책은 강경과 온건을 오갔고, 남북관계는 앞으로 진전하는 듯하다가도 후퇴하기를 반복하였다. 이와 같은 대결과 불신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박근혜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것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이다. 남북관계의 근본 문제는 신뢰의 부족이고, 불신의 벽을 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국내적으로 신뢰나 원칙 같은 무형의 사회적 자산이 필요하듯이 대외적으로도 신뢰라는 무형의 인프라가 필요하다. 신뢰는 검증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북한의 수많은 도발을 잊거나 북한에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 북한과 신뢰를 쌓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지름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신뢰는 일련의 검증된 행동을 통해 벽돌을 쌓듯이 다음 단계로 나가자는 것이다.
신뢰는 남북 간 신뢰뿐만 아니라 국제적 신뢰와 국민적 신뢰를 포함한다. 남북 간의 신뢰가 어느 정도 있다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남북관계는 큰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국민적 공감대가 뒷받침되지 않는 대북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추진 과정에서의 균형을 중시하고 있다. 균형은 반드시 강경과 유화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할 때는 단호하고 유연할 때는 유연하게 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대립적 요인들을 잘 조율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보와 교류협력, 남북대화와 국제공조, 협상과 억지 간 균형이 잘 유지되면 정권이 바뀌거나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기본 틀이 흔들리지 않고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대북정책은 북한을 포용하거나 압박하거나 경제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경제력에만 의존한 대북정책은 한계가 있다. 신뢰 수준에 맞지 않는 대규모의 남북경협이나 대북 지원은 국민적 합의나 국제적 지지를 받을 수 없었으며, 정치적 합의는 북한이 긍정적으로 합의하고 추진하는 듯 하다가도 북한의 자기 편의에 의해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향후 남북관계는 느리지만 신뢰 수준에 맞추어 단계별로 차근차근 진전되도록 해야 한다. 신뢰 없는 과도한 대북 지원도 문제지만, 신뢰가 지나치게 저하된 상황에서는 경제적 유인책도 효과가 없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남북관계의 진전은 경제적 유인책, 제재, 혹은 양자의 결합을 대북정책의 수단으로 삼아온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신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은 신뢰의 정도에 따라 신뢰 모색, 신뢰 구축, 신뢰 제도화의 3단계를 거치면서 개선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와 같은 남북관계의 경색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장애물 제거는 바로 신뢰의 모색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북핵 문제나 정치적인 사안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시작될 수 있다. 또한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영양 지원은 적정 규모 내에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비롯한 상응한 대응이 없다면 신뢰가 쌓일 수 없을 것이며, 신뢰가 없다면 남북관계의 진전은 어려울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인도적 지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원 품목과 지원량, 모니터딜 등에 관한 명확한 기준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신뢰 모색, 신뢰 구축, 신뢰 제도화의 3단계 거쳐야
신뢰 모색 단계에서 남북관계의 돌파구가 마련되고 신뢰가 쌓이면 신뢰 구축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 구축 단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가시적 진전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경제적 신뢰와 인도적, 사회문화적 신뢰 등 분야별 신뢰 구축을 추진할 수 있으며, 신뢰의 구축 정도와 성과에 따라서 군사적, 정치적 신뢰 구축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신뢰 구축 단계가 지나면 남북 간 통일을 준비하기 위한 신뢰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경제공동체를 거쳐 통일로 가는 통일 준비가 본격화될 것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세 가지 목표를 갖고 있다. 첫째, 남북관계의 정상화이다. 현재 남북관계는 일체의 공식 대화 채널이 단절되고 교류협력이 중단된 상태이다.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 및 호혜적 협력사업 재개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고 있다. 정치군사적 신뢰 구축과 사회경제적 교류협력의 상호 보완적 발전을 통해 이와 같이 불안정한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첫 번째 목표이다.
둘째, 한반도에서의 평화가 신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고,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에 철저히 대비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발전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은 도발을 중단하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어야 하며, 핵개발이 아니라 경제개발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한편 한국의 대북정책도 진화해야 한다. 유화 아니면 강경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대북정책, 투명한 정책 수립과 집행으로 국민이 공감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세 번째 목표는 통일의 초석을 만드는 것이다. 이후의 과정은 경제공동체 형성을 통해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과정으로 엄밀히 말하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범위 밖에 있다. 그러나 정책 추진 과정에서 신뢰가 쌓여 대규모 대북 지원 프로젝트가 시행되는 과정과 경제공동체가 형성되고 통일을 준비하는 과정이 구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굳이 따지자면 분단의 관리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정부는 분단 관리와 통일 준비의 이분법적 논쟁을 끝내고 양자의 조화로운 병행 추진을 분명히 하고 있다. 3월 27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정책 목표로 제시한 ‘한반도 평화 정착’과 ‘통일 기반 구축’은 분단 관리와 통일 준비의 균형 있는 추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통일은 상호체제 인정과 교류협력이 이루어지는 ‘공동체’ 단계를 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한 실질적인 ‘법적 통일’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분단 관리는 통일이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만 일관성 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 통일의 비전과 미래상은 대북정책의 내용과 방향을 설정해주는 등대와도 같다. 통일에 대한 지도자의 의지와 리더십이 추가될 때 국민적 역량을 모으고 국제적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
역대 정부의 모든 대북정책은 북한의 태도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실제 집행 과정에서는 북한의 반응과 동북아 정세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북한 문제를 결코 방치하지 않으며, 남북관계가 진전될 때도 신뢰 수준에 맞지 않는 경협의 확대는 자제함으로써 과속 위험성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과 대북정책 추진 인프라 강화해야
박근혜정부의 대북정책에서 요란한 구호나 거창한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이전 정부와의 인위적 차별화나 이벤트성 사업으로 관심을 끌기보다는 ‘신뢰 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 정상화’와 ‘실질적 통일 준비’라는 모범 답안을 국정과제로 제시하였다. 이를 위해 제시한 중점과제들도 대북 인도적 지원, 당국 간 대화 추진, 국제적 통일 공감대 확산, 국민적 합의 강화, 통일교육, 북한이탈주민의 정착 지원 등으로 화려한 수사보다는 기초체력에 관한 것이다. 평화 정착과 통일 준비라는 양대 목표 아래 내실 있는 정책 추진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뢰는 남북관계의 어느 특정 시점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북 간 긴장을 완화하고 경색 국면의 돌파구를 여는 단계부터 통일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이끄는 남북관계 발전의 동력(Driving Force)이 될 수 있다. 남북 당국 간 관계뿐만 아니라 교류협력 과정에서 남북한 주민 간 친화력 확대, 북한이탈주민의 정착 지원, 통일 이후 남북한의 심리적 통합에 신뢰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통일한국은 자연스럽게 신뢰사회의 기반을 갖추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대북정책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전략적 유연성을 높이고 대북정책 추진 인프라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대북정책 추진 시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려면 원칙의 분야, 전략적 분야, 인도적 분야 등 세 분야로 나누어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인도적 지원 분야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지원되어야 할 영·유아와 산모를 위한 ‘영양’ 지원과 의료품, 의류 등 생필품 지원이 포함된다. ‘영양’은 비타민과 비스켓, 분유 등으로 식량 및 비료 지원과 구분된다.
둘째, 원칙의 분야는 북한 인권 문제, 북한의 비핵화, 천안함과 연평도에 대한 사과, 당국 간 회담 및 민간 교류협력에 대한 대가 지불을 거부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원칙의 분야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모든 대화와 협력이 중단되는 것은 아니나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할 사항이다.
셋째, 전략적 분야는 정치적 상황과 연계하여 신축성 있게 대응하는 분야이다. 북한에 요구할 조건과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줄 수 있는 항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10·4선언의 합의 항목까지 포함해서 남북관계의 진전 수준에 맞춰서 현실에 맞게 추진하면 될 것이다.
대북정책은 가시적 성과가 당장 나타나기 어려운 분야이다. 특히 인내력 있게 원칙을 지키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시적 성과가 없다고 전략 수립과 대북정책 인프라 구축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양질의 물적, 인적 자원을 투입하고 치밀한 전략을 수립하여 앞으로 다가올 기회와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남북회담 시 북한에 대한 요구조건과 줄 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북정책 전문가, 대북정보 전문가, 남북대화 전문가 등을 유지, 보강하는 한편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정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정책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외연을 확대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대북정책의 컨트롤타워와 각 부처의 긴밀한 협조체제가 유지되어야 한다.
최진욱
일본 리츠메이칸대 국제관계학부 객원교수를 거쳐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현 통일연구원 기획조정실장이자 민주평통 상임위원, 한반도포럼 위원,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