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지난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를 통해 미·일 간의 관계 진전이 예상되면서 ‘버락·신조 밀월’이라는 표현까지 생겨났다. 사진은 4월 27일 예정에 없이 워싱턴 링컨기념관을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총리의 산책 모습.
지난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와 중·일 정상회담 등 행보가 이어지면서 동북아 외교 정세의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동북아에서 일본의 역할이 확대 조짐을 보이는 지금이야말로 우리 정부가 외교적 전략을 새롭게 수립해 더욱 적극적인 한·미·일 공조체제 마련에 나서야 할 때다.
지난 4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결과를 둘러싸고 ‘한국 외교가 고립화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과 일본 사이에 ‘버락·신조 밀월’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데다, 지난 반둥회의에서는 중·일 정상회담이 진행돼 중국과 일본 사이에 화해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국가들의 적극 외교로 한국 외교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는 초조감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동북아 국가 간 관계를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것은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국익의 득실을 계산해 우리의 외교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번 미·일 정상회담 결과는 일본이 미·일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아시아에서의 역할을 확대하겠다는 선언이다. 즉 1951년 전후체제의 복원과 동시에 ‘기시’의 부활인 셈이다. 1951년 미·일 안보조약에 따라 일본은 미국에 기지를 제공한 이후 1960년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안보조약을 개정해 극동의 안전을 위해 미군의 후방 지원을 확대했다. 외손자 아베는 일본의 미국에 대한 지원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이 공격을 받으면 같이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은 미·일이 중국에 대한 대응을 함께하겠다는 점도 명백히 했다. 그 예로, 일본이 원하는 센카쿠열도와 같은 ‘그레이존(중간지대)’ 방위에 미군이 참여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 중국의 부상에 대해 미·일이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국제사회 압력에 역사 문제 ‘반보’ 물러선 아베
<사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아베 일본 총리가 4월 22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 60주년 기념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회담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아베 총리의 미 의회 합동 연설은 아베 역사인식의 마지노선을 보여준 것이다. 아베는 식민지 시대의 침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으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연행’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번 연설을 보더라도 아베의 역사 문제 인정의 한계는 지난 반둥회의에서 사용한 ‘반성’이라는 단어에서 조금 나아가 ‘식민지 시대에 고통을 줬다’는 표현을 한 것까지다.
아베 자신의 역사인식과는 달리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이 그로 하여금 반보(半步) 더 나아가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일본의 인정을 바라는 식민지 시대 침략, 반성, 사죄의 키워드 전부를 아베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베가 생각하는 키워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과 ‘반성’ 정도이며, 이것이 8월 담화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일본 내에서조차 이번 아베의 연설은 “미국 국민에게는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유대감을 강조하는 반면 아시아에 대해서는 냉담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다. 이것이 시사하는 점은 앞으로 역사 문제에서 아베 총리가 전향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일본 상황을 고려하면 아베 정권으로선 한·일관계 개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이익이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최근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위안부에 대해 사죄한다는 것은 아베로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신과도 맞지 않는다. 이 점에서 앞으로 한·일관계는 순탄하지 않을 것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난 4월의 미·일 정상회담은 미·일 간 이익이 합치된 결과였다. 아베는 동북아에서의 힘의 균형을 위해 미국을 대신해 일본이 군사비를 부담하고 후텐마 기지 이전을 강행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적극 참가함으로써 미국의 재균형 정책에 협조한 것이다. 미국으로서도 재균형 정책을 현실화하려고 일본의 역할을 부여했다는 점은 미국이 아베를 동북아 안정의 협력자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미·일은 아베의 미국, 유럽에 대한 협조주의와 미국의 헤게모니 유지라는 이익의 합치를 이루게 됐다. 즉 아베는 자신이 추구하는 집단적 자위권의 해석 변경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헌법 개정에 대한 국내의 반대를 잠재울 구실을 마련했고, 동북아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역사 문제와 별개로 한·일관계 개선 필요
<사진> 아베 일본 총리가 4월 29일(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고 있다. 아베 총리 뒤로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왼쪽),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앉아 있다.
일본의 역할이 확대되는 것은 우리로 봐서는 득실이 존재한다. 일본의 역할은 한반도 유사시 전쟁 억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반면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반도 내 전쟁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 또한 중·일 간의 군사적인 긴장은 우리의 입지를 어렵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일 간 긴밀한 안보협력을 통해 일본의 군사 역할에 대한 투명화를 지향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일본의 역할이 동북아에서 공공재로서 기능하도록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한국에 대한 일본 내 여론이 악화됐다고 해서 한국이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일본은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국의 문제점을 부각하려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국제사회의 공간을 스스로 축소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은 여러 가지 한·일관계 개선 의지와 행동을 보임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한국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갖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한·일 정상회담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당분간 한·일 정상회담이 없더라도 실무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를 기다리기보다는 한국이 적극적으로 물꼬를 트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제 한국으로서는 동북아 외교 지형을 만들어나가고 각국 관계를 개선하려는 적극외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 아베 방미를 통해 ‘나쁜 일본’만으로 국제사회를 설득하려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를 적극적인 외교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한국이 동북아에서 역할을 확대하려면 그랜드 디자인을 구체화해 한국이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전제될 때 북한 문제와 한·일관계 개선에 대한 해법이 힘을 받을 수 있다.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에 적극적인 자세 필요
<사진> 아베는 방미 연설에서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진은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운데)가 4월 29일 아베 총리의 미국 의회 연설을 방청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미 하원 본회의장으로 향하는 모습.
이를 고려하면 한국은 대일정책을 재점검해야 하며,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의 관점에서 대일정책을 펼치는 것은 자칫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한·일 양국이 역사와 영토분쟁을 둘러싸고 외교전쟁을 벌이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한국 외교의 대전략하에서 대일정책의 그림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한국의 입장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인식 변화를 고려한 대일정책의 점검이 필요하다. 현재의 일본 상황을 고려하면 역사 문제에 대한 원칙적인 대응은 필요하지만, 일본을 압박하는 수단으로서의 ‘과거사 카드’는 효율성을 상실하고 있다. 이에 대한 냉철한 고려를 바탕으로 일본을 우회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국제적 여론 형성, 그리고 민간을 통한 장기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할 시기다.
둘째,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고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한·미·일 공조를 활성화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켜줄 필요가 있고, 한·중·일 정상회담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짐으로써 동북아 협력을 증진시키는 이미지를 확대해야만 한다.
만약 한·중·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적다면 박근혜정부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구체화하면서 동북아에서 한국의 역할을 확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북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원자력 안전 협의체나 재해·재난에 대한 공동 대응 등의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통해 한·중·일의 협력을 증진시켜야 한다. 이 결과 자연스럽게 한·일관계가 개선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2015년 아베 담화에 대해서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한국 차원에서 대응 노력이 필요하다. 아베 총리 담화는 결국 한·일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관계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가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한·일 공조관계가 왜 필요했으며, 앞으로 긍정적 한·일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담론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형성돼야 한다. 한·일 간의 역사 문제, 과거사 문제에 얽매이지 말고, 한·일관계의 전략적인 이익, 현실적인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긍정적인 논의가 확산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도쿄대학 정치학 박사. 도쿄대학 사회과학연구소 객원연구원과 동 대학 법학부 초빙학자를 지냈고, 2002년부터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를 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