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정은이 5월 러시아를 방문할지 관심을 끌고 있는 가운데 북한이 펼치고 있는 친러 정책이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 집권 이후 나타난 북·러관계의 긴밀화를 북한이 중국에 양국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정치·외교적 시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북·러관계와 북·중관계는 양국의 대북정책 목표를 고려할 때 상호 보완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이 집권 후 첫 해외 방문국으로 중국에 앞서 러시아를 방문할지 여부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난해 12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5월 9일 러시아의 제2차세계대전 승전 기념일 행사에 김정은을 초청한 바 있으며, 1월 21일 러시아 타스통신은 이에 대해 북한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개인적으로는 김정은의 방러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김정은의 모스크바 방문이 성사될 경우 이는 국제사회는 물론 북한에 주는 파장이 매우 클 전망이다.
김정은은 지난 3년 동안 ‘조문 정국’을 이끌면서 권력 기반 강화와 경제 여건 개선에 주력하는 등 국내 정치·경제·안보 우선 정책을 추진해왔다. 국제사회의 반대와 제재에도 불구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은 강행하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기정사실화했다. 장성택 등 잠재적 반김정은 세력의 숙청과 핵심 측근들에 대한 인사 조치를 통해 당과 군내 통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 경제 여건 개선을 위한 낮은 수준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6자회담 재개를 주장하면서도 한·미·일 3국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핵 포기를 위한 진정성 있는 사전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핵무기의 고도화에 공을 들였다.
김정은이 이처럼 권력 승계의 안정화 작업과 핵 능력 강화를 바탕으로 대외적 행보를 시작할 시점에서 러시아의 승전 기념일 행사는 김정은에게 첫 해외 순방과 정상외교 데뷔의 장을 마련해줄 것이다. 김정은이 러시아 승전 기념식에 참석한다면 북·러, 북·중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이 행사에 동시 초청받은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참석할 경우 남·북, 북·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도 높다. 물론 이들 정상회담은 비공식 성격을 갖는 짧은 만남이겠지만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것이며, 남북관계는 물론 동북아 정세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사진> 친중파이자 북·중관계의 연결고리였던 장성택(사진 가운데)의 숙청도 북·중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북한, 대러·대중 관계의 재조정 추진
북한은 지난 3년 동안 대러·대중 관계를 재조정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북한은 냉전기 중·소 갈등을 이용해 중·소 양국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균형·중립 정책 또는 어느 한 국가에 경사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국익 우선의 실리 외교를 효율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1990년대 구소련 공산당 정권 붕괴, 러시아의 민주화와 경제적 약체화 및 한·러관계의 긴밀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대중 관계를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케 했다.
러시아는 한·러관계에서 기대했던 경제 협력의 부진과 북·러관계의 약화에서 초래된 동북아 전략 환경에서의 영향력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대북 접근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북·러관계가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로 발전한 것은 2000년 1월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한 푸틴의 전략적 사고에 기인했다. 푸틴은 같은 해 7월 구소련 및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김정일도 2002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친 방러를 통해 북·러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2002년 가을 제2차 북핵 사태의 발생, 러시아의 강대국으로의 재부상과 유엔 대북 제재 참여는 북·러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김정일이 사망하기 4개월 전인 2011년 8월 바이칼호 인근 울란우데를 방문해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전까지 8년 동안 양국 간 정상회담이 열리지 못했다.
북·러관계의 소원화는 북한의 대중 접근정책을 한층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북한은 중국의 북한 핵개발을 포기시키기 위한 6자회담 참여와 유엔 대북 제재 동참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의 수차례 방중과 고위급 인사 교류를 통해 높은 수준의 협력관계를 2013년 3월 시진핑 정부 출범 때까지 유지했다. 북·중관계는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시진핑 주석의 취임을 전후해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탈냉전기 최악의 관계로 변화했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014년 7월 북한 대신 한국을 방문했으며, 구소련 말기 고르바초프처럼 북한보다는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이는 시진핑 주석이 북한을 중국의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해온 전임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북한을 동북아 전략 환경을 중국에 불리하게 만드는 핵심 요인으로 보는 경향 때문이다. 즉, 중국은 미국의 대중 견제를 위한 미·일동맹의 강화, 한미 군사협력의 확대 등과 같은 동북아 정세의 변화가 북한의 핵개발로 촉진되고 있다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한편 친중파이자 북·중관계의 연결고리였던 장성택의 숙청도 북·중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북한은 이러한 중·러의 대북 인식과 정책에 대응해 국내외적 자구책을 강구하면서, 현재 러시아에 치우친 대중·대러 정책을 추진해오고 있다. 그러나 북·중 간 정치·경제적 상호 의존성 등을 고려해볼 때 북한이 제4차 핵실험을 단행하지 않는다면 2015년 북·중관계는 개선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사진> 지난해 11월 18일 김정은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한 최룡해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조선중앙TV 화면
최근 북·러관계의 긴밀화 추이
최근 북·러관계의 긴밀화는 북·중관계의 소원화, 지정학적 이익을 중시하는 푸틴의 대통령직 복귀,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서방세계의 대러 제재와 러시아의 신동방 정책의 강화, 김정은의 국제적 고립 탈피와 경제·군사 협력 확대 노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난 결과다.
제3기 푸틴 정부는 2012년 5월 출범과 더불어 극동·시베리아 개발과 아·태 경제권으로의 편입을 위해 신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고, 이를 위해 정부 출범과 동시에 극동개발부를 신설했다. 푸틴은 동북아 전략 환경 개선 및 극동·시베리아 발전을 촉진할 남·북·러 3각 협력에서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하면서 대북 관계 긴밀화에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3년 9월에는 나진~하산 철도의 개·보수를 완료해 시베리아횡단철도(TSR)~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을 통한 남·북·러 물류 협력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2014년 4월 말에는 경제부총리와 극동개발부 장관을 평양에 파견해 양국 간 경협 확대를 협의케 했으며, 5월 초에는 그동안 양국 간 경제 협력은 물론 방산 협력에 매우 부정적으로 작용했던 북한의 대러 채무 문제를 해결했다. 즉, 푸틴은 북한의 대러 채무 110억 달러 중 100억 달러를 탕감하고, 10억 달러를 북한에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대러 채무 문제를 매듭지었다.
북한의 경우, 2014년 9월 말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수 년 만에 러시아를 방문해 이바노프 외교장관 등 고위급 인사들과 회담했고, 11월에는 최룡해가 김정은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 이바노프 등 고위급 인사들과 만났다. 북한은 최룡해의 방러를 통해 양국 정상회담, 러시아제 전투기 구입 등 방산 협력, 합동 군사훈련 등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북·러가 직면한 국제사회에서의 외교적 고립도 양국 관계를 긴밀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한 결과 서방세계의 경제·외교 제재를 받고 있다. 북한도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로 유엔의 경제·외교 제재를 받고 있으며, 작년 가을에는 유엔에서 북한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권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런 국제적 상황에서 북한은 2014년 3월 말 리투아니아에 의해 발의된 유엔총회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무효안에 대해 193개 회원국 중 반대표를 던진 11개국의 한 국가가 되었다. 러시아도 중국과 더불어 유엔 안보리의 북한 인권 결의안 채택을 반대하고 있다.
일부 언론 및 학자들이 김정은의 집권과 더불어 나타난 ‘북·러관계의 긴밀화’와 ‘북·중관계의 소원화’를 상호 대체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즉, 북한의 대러관계 긴밀화는 북한이 중국에 대해 양국관계 개선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정치·외교적 행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북·러, 북·중관계는 중·러관계의 현황과 중·러 양국의 대북정책 목표들을 고려할 때 상호 대체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관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진> 취임 이후 북한과 다소 거리를 둔 시진핑 주석은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지난해 7월 북한 대신 한국을 방문했다. 방한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한국가구박물관을 관람한 시진핑 부부.
북한의 대러 접근은 중국에도 이익
러시아와 중국은 1996년부터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켜오고 있으며, 특히 푸틴 정부 때 더욱 긴밀한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왔다. 중·러 양국은 미국의 일방주의 또는 패권주의에 반대하면서 다극화된 국제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왔다. 유엔 안보리에서는 미국 주도의 특정 국가 내정 및 분쟁 개입을 위한 안보리 결의안(예:시리아 사태)을 저지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왔다.
또한 양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미국 주도 국제 금융기구에서 신흥국의 역할 증대를 위해 공조하면서 주요 신흥국 모임인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를 정상회의체화하고 ‘신개발은행(NDB)’을 창설하는 데 협력했다. 또한 양국은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유라시아의 포괄적 다자 협력체로 발전시키면서 연례 합동 군사훈련을 추진해오고 있으며,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를 통해 유라시아 협력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또한 양국은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체제(MD) 구축을 반대하고 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서방세계의 대러 제재를 반대하면서 러시아와 경제·에너지·방산 분야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양국은 북한 핵·인권 문제, 김정은 정권 안정성 유지 등 북한 문제를 다루는 데도 공통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북한의 대러 접근정책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는 북한의 국내외 정책 변화를 촉진시켜 중국의 대북정책 추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러시아도 대북 관계에서 중국과 경쟁적 관계 설정보다는 양자 협력하에 북·중·러 3각 협력과 남·북·러 3각 협력 활성화를 통해 역내에서 전략적 이익 제고를 추구하고 있다. 북한의 대러 접근정책도 전통적 대러·대중 균형외교 연장선상에서 한시적으로 실리 추구의 대러 접근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따라서 북한이 시진핑 정부가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제4차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을 자제할 경우 북·중 간 정상적인 우호·협력관계가 올해 안에 복원될 것으로 전망된다.
고재남 국립외교원 교수
미국 미주리대 정치학 박사. 한국슬라브학회 회장,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겸임교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강사,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 역임